107화
이한은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전신으로 느껴졌다.
지금 볼라디 교수가 번개 원소 말고 다른 원소들도 불러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즉...’
사실 지금 이한이 눈 가리고 번갯불을 피하는 것만 해도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본인이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볼라디 교수가 어지간한 일로 미소지을 리가 없는 것이다.
말이 번갯불이 쏘아지기 전에 궤도를 읽고 피하는 거지 원래는 눈 뜨고도 어려운 일.
검술 훈련으로 단련된 동체시력.
타고난 마력 감지력.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한이 그걸 너무 쉽게 해내자, 볼라디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난이도를 올려버렸다.
가르시아 교수가 지나가다가 봤으면 ‘뭐하는 거예요!?’하고 기겁했을 광경이었다.
눈 뜨고도 어려운 일을 완전한 암흑 속에서 시키다니.
문제는 이한이 거기서 또 그걸 완벽하게 해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볼라디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번 난이도를 올려버렸다.
서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교수와 제자.
덕분에 이한은 원소 탐지 훈련 첫 날에 말도 안 되는 살벌한 난이도의 시련을 치르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다른 원소들은 속임수인가?’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이한은 그저 집중했다.
번갯불만이 아니라 다른 원소들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유롭게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볼라디 교수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다른 원소들을 띄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속임수!
이한이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번갯불을 피해낸 방법은 간단했다.
눈이 가려지고 동체시력이 막히자 순수한 마력 감지력으로만 승부를 본 것이다.
단순하게 직선으로 쏘아져 나오는 번갯불도 그 안의 흐름을 보면 짧은 시간 사이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쏘아져 나오는 순간 폭발력을 얻기 위해 마력이 살짝 응축한다는 걸 깨달은 이한은 그 전조 현상을 파악하고 번갯불을 피해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번갯불이 아니라 다른 속성의 원소들이 이것저것 섞이기 시작하면...
마력의 속성별로 구분해서 전조를 감지하고 그 중에서 번갯불만을 찾아내 마력이 응축되는 현상을 잡아내야 했다.
게다가 볼라디 교수의 지랄맞은 성격을 봤을 때 속임수로 대기시켜 놓은 다른 속성의 원소들도 공격에 가담할 수 있었으니, 그쪽에도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할 수 있을까?’
이한은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뿜어내는 원소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불가능해보였다.
그렇다면...
‘최대한 덜 아프게 맞는다!’
* * *
이한의 예상은 빗나갔다.
정말 놀랍게도, 이한은 또 성공한 것이다.
“......”
원래라면 바로 자기 할 말을 했을 볼라디 교수도 놀라움에 잠시 침묵했다.
‘타고났군.’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갖고 있는 건 막대한 마력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저렇게 막대한 마력을 선천적으로 갖고서 태어난 이상, 그 마력을 다뤄 마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난이도의 일이었다.
하물며 그게 신입생이라면 더더욱.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성격이 겸손해서 그런지 본인이 마법을 익히는 속도가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 정도도 충분히 빠른 편이었지만, 제국의 기라성 같은 천재 마법사들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살짝 밀리는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갖고 있는 마력량을 계산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만한 마력을 갖고, 저 정도 속도로 마법을 익힌다는 것 자체가 그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갖고 있는 마력 때문에 그걸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주변의 마력을 감지할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마력량의 페널티가 없는 분야에는 재능의 편린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딱!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눈을 가린 손수건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담담했다. 교수도 굳이 따로 말하진 않았다.
“첫 날에 다 통과할 줄은 몰랐는데.”
“...교수님께서 한 번에 해주셔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이한은 ‘그러니까 앞으로 작작 좀 하시죠’라는 뜻을 공손하게 돌려서 말했다.
하지만 교수들에게는 원래 공손하게 돌려서 말하면 잘 전달이 되지 않았다.
“감사할 필요는 없다.”
“?”
이한은 순간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해했다.
볼라디 교수는 지금 이한이 ‘교수님께서 한 번에 과제를 내주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다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이한이 좌절하고 있는 사이 볼라디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
“원래라면 더 시간을 들여가면서 원소 탐지 훈련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이한은 안심했다. 볼라디 교수의 말을 들어보니 오늘 강의는 일단 끝난 모양이었다.
볼라디 교수는 천으로 싼 꾸러미를 내밀었다.
“지친 것 같군.”
“...!”
이한은 깜짝 놀랐다.
물론 눈 뜨고 번갯불 피하고, 눈 감고 번갯불 피했으니 지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볼라디 교수가 걱정해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지?’
처음에는 꾸러미 안에 무슨 함정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볼라디 교수는 해골 교장 같은 악의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꾸러미의 포장을 벗겼다.
‘약재라도 들어있나?’
꾸러미 안에 있는 것은 마법서였다.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본 번개 마법과 그 응용에 대한 책이다. 다음 시간까지 익혀오도록.”
“......”
볼라디 교수는 해골 교장 같은 악의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 좀 미친놈이라서 그렇지.
이한은 뒤늦게 볼라디 교수가 ‘지친 것 같군’이라고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냥 이한을 보고 든 생각을 순수하게 말한 것이었다.
그 말과 꾸러미는 전혀 별개였고!
“...알겠습니다.”
이한은 표정 관리를 하며 마법서를 집어넣었다.
욕을 하더라도 볼라디 교수가 없는 곳까지 가서 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 쪽지시험 주간 아니었나?’
생각해보니 지금 볼라디 교수가 익히라고 준 마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볼라디 교수는 쪽지시험이 없지만 다른 강의들은 아닐 테니까.
-■■■!
강의실 밖, 본관 앞뜰에서 들리는 소환수의 괴성에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저게 무슨 일입니까?”
“교수들이 탈출한 소환수들을 처리하고 있군.”
“??”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번 주만 해도 탈출한 소환수들이 학교 안을 돌아다녔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게 교수들 아닌가.
왜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째서?”
“시험 보는데 방해할 수 있으니 처리하는 거겠지.”
“......”
이한은 할 말을 잃고 강의실을 나가기 위해 인사했다.
‘괜히 물어봤군...’
* * *
볼라디 교수가 준 책, <기초 번개 원소 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좋은 책이었다.
‘아니. 이거 누가 쓴 거지?’
대부분의 마법서들이 신입생들이 읽는다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했을 때 <기초 번개 원소 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는 정말로 친절한 편이었다.
1서클 마법 <번개 생성>도 단순히 주문과 동작만 설명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1서클 원소 마법들과 달리, 번개 원소는 생성 이후 그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풋내기 마법사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번개 원소를 불러낸 다음 통제를 잃고 불특정한 방향에 뿌려버리는 것인데, 이를 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준비하라. 먼저 번개 원소가 잘 통하지 않는 두꺼운 옷을 입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이한은 이 책을 쓴 마법사의 다른 책도 찾아보고 싶어서 뒤를 확인했다. 그런데 저자가 없었다.
‘마법학교 내에서 쓴 책인가?’
제국의 책들은 체계적으로 대량생산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았다. 개인이 몇 권 손으로 써서 만든 다음에 전수하는 것들도 많았던 것이다.
마법학교 안의 책들은 더욱 그랬다.
도서관에 가면 안 그래도 책들이 무질서하게 분류되어 있는데 그 중에 절반 넘는 책들이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은 자기만 만족하면 그만이지 남들까지는 배려하지는 않는 자들!
‘내가 책방 주인이라면 저런 책들은 다 치워버릴 텐데.’
볼라디 교수에 대한 증오와는 별개로 이한은 이 책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은 잘못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다음 시간에 볼라디 교수는 분명 이한이 이 책을 마스터했다는 가정 하에서 강의를 진행할 것이고...
“반갑다, 워다나즈!”
뒤에서 교수가 쾌활하게 말을 걸어오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행히 상대는 아는 얼굴이었다. 볼라디 교수의 얼마 없는 친구, 키르민 쿠 교수였다.
“<기초 마법의 이해> 강의를 들으러 가는 건가? 맞지?”
“예.”
“잘 됐다! 같이 가면 되겠네. 나도 마침 강의실로 가고 있던 참이었지.”
키르민 교수는 볼라디 교수와 친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쾌활한 사람이었다.
이한은 그 모습에 살짝 기대가 들었다.
젊고, 성격 좋고, 교우관계가 원만한 교수들은 확률적으로 학생들에게 잘 대해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마법학교에서도 그 법칙이 통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환상 마법을 가르치시는 겁니까?”
“그래. 배그렉 교수는 환상 마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환상 마법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단다.”
어느 마법 분야든 깊게 파고들어 가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한한 법이었다.
구역에 침입자를 방지하는 결계 마법을 치거나 적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건 환상 마법의 일각일 뿐.
아예 공간 마법과 결합해서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기괴한 환상의 미궁을 만드는 마법사도 있었고 정신 마법과 결합해서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쓰러뜨리는 마법사도 있었다.
설명을 들은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도둑질하기 좋겠군.’
자신의 몸에 환상을 둘러서 시선을 피하거나 설치되어 있는 환상 마법을 파훼하거나 등등.
아무리 키르민 교수가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다른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워다나즈. 저번에 널 보니, 네가 환상 마법에 재능이 있는 걸 알겠던데?”
키르민 교수의 말에 이한은 반색했다.
원래 교수한테서 ‘자네는 재능이 있군’같은 말을 들으면 조심해야했다.
방심하는 순간 교수 밑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제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이미 그런 걱정을 하기에는 늦었다. 애초에 마법학교에 들어온 순간부터 교수 밑에서 배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중요한 건 친절하고 괜찮은 교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키르민 교수는 친절하고 괜찮은 교수일지도 몰랐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환상 마법도 나쁘지 않지. 뭐든지 잘 익히기만 하면 어디든 먹고 살 수 있지 않나?’
“환상 마법에는 많은 마력이나 뛰어난 원소 친화력, 비상한 계산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바로 세밀한 통제력이란다. 내가 보기에 워다나즈 너는 타고났어.”
“...???”
이한은 당황했다.
막대한 마력 때문에 세밀한 통제력과는 거리가 먼 이한한테 무슨?
‘저번에 과제 제출 때문에 착각하고 계신 거 아닌가?’
그건 볼라디 교수가 될 때까지 패서 몸에 익은 거지 이한의 재능이 뛰어난 게 아니었다.
“감... 감사합니다.”
“네가 관심 있는 마법 분야가 있는지 궁금한데. 보통 너처럼 재능 있는 신입생들은 하나만 고르지 않고 여러 분야를 고르곤 하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키르민 교수는 이한의 대답에 바꿔서 질문했다.
“그러면... 강의 시간 외에 따로 만난 적 있는 교수가 배그렉 교수 말고 누가 있지?”
이한이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 이한에게 관심 있는 교수를 알 수 있는 질문이었다.
제자들만 스승을 고르는 게 아니라 스승도 제자를 고르는 것이다.
“일단 우레걸음 교수님...”
“아하. 연금술.”
“번개걸음 교수님.”
“동물학.”
“그리고 버드나무 교수님.”
“식물학.”
“모르툼 교수님에...”
“흑마법이군?”
“밀레이 교수님도.”
“소환마법. 잠깐. 잠깐.”
키르민 교수는 멈칫했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