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흰 말은 당황했다.
지금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지 않은가.
서로 불신하던 그리폰과 인간.
그리폰의 오랜 불신을 인간의 헌신으로 치워내고, 그리폰이 드디어 이한을 주인으로 인정해주려고 하는 감동적인 분위기 아니었...?
-히힝. 히히힝.
흰 말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이한에게 머리를 부볐다. 이한은 냉정했다.
“팔찌, 허리띠 둘 다 안 풀어준다니까.”
-......
흰 말은 울컥했다.
아니라고!
-푸히힝! 푸힝!!
“역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내가 속을 줄 알았나!”
흰 말이 씩씩대자 이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흰 말은 분노해서 머리로 툭툭 이한을 밀어냈다.
아니라고!!!
“괜찮아?!”
“괜찮아. 아마 내가 자기 몸에 멋대로 손을 대서 화내는 거 같군.”
“말 말하는 게 아니야!”
요네르와 학생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한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로웨나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급류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흰 말을 업고 나오다니.
...저 정도면 마법사보다는 기사를 하는 게 나지 않나?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이한은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다른 탑 학생들은 이한의 차례에 갑자기 사고가 일어난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이한이 보기에는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번개걸음 교수의 사악하고 비틀린 계략이 문제였지.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뒤늦게 도착한 투탄타와 검은 탑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이한은 분노를 억누르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다들 조심해라. 번개걸음 교수님의 함정이 있으니.”
“...!”
투탄타와 친구들은 설명을 듣고 경악했다.
“그런 짓을 하셨다고?! 말의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데?”
“아무리 시험이라도 그렇지 너무하시는데!”
다른 교수들과 달리, 번개걸음 교수는 제국의 유명한 모험가였다.
어렸을 때 번개걸음 교수가 쓴 탐험기를 읽고 존경심을 품어왔던 학생들은 배신감에 충격을 받았다.
“돌아가서 항의하자. 아무리 시험이라 하더라도 이런 시험에는 응할 수 없어.”
“맞아. 이 말은 이제 내 친구나 마찬가지야. 친구의 목숨이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절대 그럴 순 없지.”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의 반응에 이한은 감동했다.
‘이 학교의 미래는 어쩌면 밝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그 때 하늘에서 번개걸음 교수가 천둥새를 타고 날아왔다.
부드럽게 착지한 천둥새는 이한을 보고 쉿쉿소리를 냈다. 저번에 이한한테 속은 게 분한 모양이었다.
번개걸음 교수는 닐리아와 함께 천둥새 위에서 내렸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교수님. 이번 시험은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F를 받고 말지, 친구의 목숨을 걸 수는...”
번개걸음 교수는 학생들의 반항에 화를 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안다. 강의 정령이 변덕을 부리고 있다면서? 말리려고 온 거다. 조금 기다려라.”
“......”
“......”
응?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당황했다.
번개걸음 교수의 함정이 아니었단 말인가?
“교수님께서 준비한 게 아니셨습니까?”
“뭘?”
“그... 강물이 불어나고...”
“학생을 쓸어버리려고 하고...”
“내가 그걸 왜 준비해?! 미쳤냐!”
번개걸음 교수는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다.
“말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함정을 내가 왜 준비한단 말이냐?”
“그...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먼저 생각해줘야 하지 않나?’
번개걸음 교수는 동물들을 매우 아꼈다. 어쩌면 학생보다도 아낄지 몰랐다.
그런 교수가 동물들이 다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 보낼 리 없었다.
“그보다 강의 정령이 변덕을 부리는데 왜 날 의심한 거지?”
학생들은 머쓱해졌다.
생각해보니 해골 교장 때문에 교수들을 너무 불신하게 된 것 같았다.
번개걸음 교수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 교육이 학생들의 마법 실력은 키워줘도 인성은 망가뜨리는 것 같단 말이지.’
* * *
번개걸음 교수한테 강물이 이상하다는 걸 알려준 건 닐리아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닐리아.
그런 닐리아와 계약한 물의 정령이 위화감을 눈치채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강물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닐리아는 뒤에 올 이한과 요네르가 볼 수 있도록 <그림자 순찰대>에서 사용하는 표식을 남겼다.
-위험. 접근 금지.
그리고는 번개걸음 교수한테 돌아갔다. 급한 일인 만큼 돌아갈 때는 길이 아니라 직선으로 내달렸다.
-교수님! 강의 정령이 변덕을 부리고 있어요!
-말들이 위험하겠군! 안내해라!
...그렇게 득달같이 날아온 것이다.
상황 설명을 들은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한테 살짝 미안해졌다.
‘해골 교장 때문에 괜한 사람을 의심했군.’
“아니. 그보다 그 사이에 기다리지 않고 무식하게 들어간 거냐?”
번개걸음 교수는 학생들의 옷이 젖어 있는 걸 보며 어이없어했다.
보통 강물이 멋대로 날뛰는 걸 보면 ‘위험하겠구나’하고 판단하고 피해야지 ‘아 시험이구나’하고 들어가면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학생들은 너무 억울했다.
당장 해골 교장이 저지른 만행이 아직 생생했던 것이다.
“정말 시험인 줄 알았다구요!”
“교장 선생님께서 저번에 모래사장 밑의 지하던전을 준비하고 계셨으니까 이것도 함정인 줄 알았습니다!”
“애초에 교수님께서 강을 제대로 확인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그래. 내가 미안하다.”
번개걸음 교수는 담뱃대를 든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학생들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이 마법학교가 잘못이지.
“그런데 강의 정령이 변덕을 부렸는데 어떻게 용케 물을 먹였군? 설득에 성공한 건가?”
“밧줄로 묶어서 들어갔는데요.”
“......”
번개걸음 교수는 황당해했다.
물론 정령이 화났을 때 꼭 설득만이 답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밧줄로 묶어서 힘으로 극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보통 학생들은 강의 들으러 올 때 밧줄을 안 갖고 오니까 그렇지!
“네가 갖고 왔지?”
“왜 저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목당한 이한은 당당하게 항변했다. 하도 당당한 얼굴이라 번개걸음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다.
“아. 워다나즈 네가 갖고 온 게 아니었나? 미안하다.”
“제가 갖고 오긴 했습니다.”
“......”
번개걸음 교수는 담뱃대를 던지려다가 참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닐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내가 위험하다고 접근 금지 표식 남겼는데 왜 들어갔어?”
“......”
“......”
요네르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이한도 창백해진 건 똑같았지만 얼굴 덕분에 티가 나지 않았다.
‘젠장. 앞으로는 표식 확인하면서 걸어야지.’
닐리아가 가르쳐줬고 이한도 열심히 배웠지만 그걸 길 걸어가면서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한은 앞으로 어딜 가든 표식을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설... 설마 못 본 건 아니지?”
“아니. 봤지. 그런데 다른 놈들이 자꾸 가자고 고집을 부리더라고.”
이한은 바로 책임을 돌렸다. 마침 로웨나가 황녀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흰 호랑이 탑 출신답게 완강해서 고집을 꺾을 수가 없더라고.”
“정말 그랬지.”
둘의 말에 닐리아는 분개했다.
역시 언제나 귀족이나 기사들이 문제였다.
산맥에 있을 때도 관광차 놀러온 자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얼마나 짜증났던가.
현장에서 일하는 사냥꾼들의 안전수칙을 무시하다니!
“아주 오만한 사람이잖아? 황녀님도 실망이네!”
“원래 기사들이 그렇지. 닐리아 네가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이미 우리가 따끔하게 말했으니까.”
이한은 완벽하게 뒷일을 차단했다. 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흰 말이 다시 다가와서 이한의 소매를 물고 잡아당겼다.
“친해졌네?”
“친해진 거 아니야. 놈의 속임수지.”
-푸흐흥! 푸흥! 푸흐흥!
“봐봐. 성질내잖아. 속으면 안 된다.”
“...?”
닐리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흰 말을 쳐다보았다.
나름 산맥에서 동물들과 친해져봤던 닐리아였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흰 말은 이한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저건 ‘날 좀 봐주세요’에 가까운 행동 같은데?
닐리아는 소심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친해진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강의 정령을 진정시키고 온 번개걸음 교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흰 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주인으로 인정했다고!?’
놀랍게도 지금 그리폰, 아니, 흰 말은 이한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폰이 어떤 생물이던가.
독수리의 날개와 사자의 발톱을 가진 만큼 자존심도 그 두 놈을 합친 것만큼이나 드센 놈이었다.
원래라면 자격이 없고 사악한 사람에게는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았다.
몇 년은 더 친해져도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지 말지 확신할 수 없는 놈인데 워다나즈를 주인으로 섬기다니.
번개걸음 교수는 믿기지가 않아서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확인해봤다.
“뭔... 뭔 일이 있었던 거냐?”
“예?”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의 질문에 경계부터 했다.
“교수님. 전 밧줄 안 훔쳤습니다.”
물론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훔쳤을 수도 있지만!
“...심문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그냥 대답이나 해라! 내가 무슨 고나달테스인줄 아는 거냐!”
번개걸음 교수는 살짝 울컥했다.
누굴 교장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저 흰 말과 친해져서 물어보는 거다. 원래라면 이렇게 친해지기 힘든 난폭한 놈이니까.”
“아하.”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저 놈이 속임수를 쓰는 겁니다. 아주 영악한 놈이거든요.”
“......”
‘니가 교수냐?’
번개걸음 교수는 참고 다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정말로 별 일 없었습니다. 별 일이 있었으면 말을 했겠죠.”
이한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번개걸음 교수는 한 걸음 물러서게 됐다.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근면하고 성실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요네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속삭였다.
“물에서 구해줬잖아.”
“아. 그거... 강의 정령이 변덕을 피운 탓에 말이 넘어졌는데, 부축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한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번개걸음 교수는 그런가보다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강의 정령 때문에 말이 넘어졌는데 어떻게 부축하고 데리고 나온 거냐? 시간이 없었을 텐데? 설마 중급 이상의 염동력 마법을 벌써 배웠을 리는 없을 테고...?”
“네. 그래서 업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물의 방패를 옆에 시전해서 시간을 조금 벌었고요.”
“......”
번개걸음 교수는 담뱃대를 검지와 중지로 꽉 쥐어야했다.
자신이 한 일이 어떤 일인지도 모르는, 눈앞의 뛰어난 제자에게 던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게 별 일이지 그러면 뭐가 별 일이냐!’
이제야 이해가 갔다.
자기도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구해준 모습.
그 용기와 명예에 그리폰, 아니, 흰 말이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황당함이 가시자 번개걸음 교수는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많은 오만한 마법사들이 박학한 지식이나 뛰어난 마법이 동물들을 길들일 수 있는 열쇠라고 착각하곤 했다.
그러나 번개걸음 교수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재능은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었다.
자신보다 상대를 더 아끼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열쇠였다.
단순하지만 중요한 원칙을 제자가 보여주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푸히힝.
“안 풀어준다니까. 저리 가라.”
-푸히히힝! 푸히히힝!
“성질 내지 마라. 그런다고 풀어주진 않을 테니.”
“......”
번개걸음 교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담뱃대를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