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한은 몰랐다.
저렇게 그리폰에게 애정 어린 충성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를.
‘이놈...!’
번개걸음 교수는 답답함에 쿨럭였다. 이한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담뱃대를 주워주며 말했다.
“잘못 삼키셨습니까?”
“아니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번개걸음 교수는 진정하고 다시 말했다.
“좀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어떠냐?”
“여기서 더 어떻게... 친절하게 대해줍니까?”
이한은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진심이 담겨 있는 목소리라서 번개걸음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학생들은 몰랐지만 번개걸음은 꾸준히 마구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식 같은 말들을 무쇠대가리, 아니 신입생들한테 맡겼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한은 정말로 성실하게 그리폰을 돌봐줬다. 대귀족 가문 출신 소년이 저 정도로 성실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있지만 그 전에 보여준 애정 어린 정성도 그리폰이 마음을 여는 데에 한몫했으리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그리폰을 믿지 않는 건 믿지 않는 거였다.
“제가 먹이를 주거나 빗질을 해주는 방식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믿음이나 신뢰, 그런 거 있잖나.”
-푸흥.
번개걸음의 말에 흰 말이 더 말해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한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과 의심하지 않고 전부 믿어주는 건 다릅니다. 교수님. 후자는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오늘따라 맞는 말만 하고 있었다.
동물을 길들이면서 동물의 본능을 간과하고 무조건 믿어주기만 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닌 게 맞았다.
믿고 사랑해주되 어느 정도는 의심을 하는 게 맞긴 한데...
맞긴 한데...!
-푸흐흥! 푸흐흥!
“이거 보십시오. 바로 화를 내잖습니까.”
“그래. 알아서들 해라.”
번개걸음 교수가 포기하고 돌아서자 흰 말이 째려보았다.
요네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말 이름이 뭐죠? 이름을 지어서 불러도 말을 안 듣던데요.”
마구간의 말들은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면 자기를 부른다는 걸 이해했지만, 흰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를 거부했다.
-무슨 이름을 붙여줘도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냥 성질이 더러운 것 아닌가?
-아니야. 마음에 드는 이름이 아니라서 그런 걸지도.
-그냥 성질이 더러운 것 아닌가?
-원래 이름이 따로 있는 걸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교수님한테 물어보자.
-그냥 성질이 더러운 것 같은데.
번개걸음 교수는 살짝 당황했다.
뒤로 돌아서서 다행이었다. 두 학생들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
“폰... 폰리그.”
“폰리그... 특이한 이름이네요.”
“폰리그라.”
이한은 흰 말을 쳐다보며 말했다.
“폰리그. 맞나?”
-푸히히힝!
흰 말은 싫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한은 그걸 보며 확신하듯이 말했다.
“그냥 성질이 더러운 게 맞군.”
* * *
번개걸음 교수가 강의 정령을 설득한 덕분에 뒤에 도착한 학생들은 좀 더 수월하게 물을 먹일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와서 고생한 학생들은 투덜거렸다.
“물은 저렇게 먹이는 게 아닌데.”
“저 녀석들이 물을 먹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리가 있나. 강의 정령이 화났을 때 물을 먹이는 게 진짜지.”
이한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는 번개걸음 교수에게 다가갔다. 교수가 담뱃대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왜? 워다나즈 네 점수는 만점이다. 걱정할 거 없어.”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여쭤볼 게 있어서 온 겁니다. 책을 읽다가 몬스터의 이름을 발견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라서요.”
“말해봐라.”
“샤르칸이라는 몬스터에 대해 아십니까?”
“표범의 왕이지.”
번개걸음 교수는 담뱃대를 툭툭 털어내고 말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의 전설에 따르면 바위 산맥과 표범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런지 표범들이 숭배하는 몬스터다.”
“위험한 몬스터입니까?”
바위 산맥과 표범 사이에서 태어났든 정령왕과 표범 사이에서 태어났든 이한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얼마나 위험한가?
이한의 질문에 번개걸음 교수는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면 안 위험하겠냐? 그냥 표범도 위험한데?”
“...혹시 샤르칸이라는 몬스터를 언데드로 만들어서 부리면 어떨 것 같습니까?”
“굳이 그런 위험한 짓을? 언데드 몬스터라고 생전의 야성과 흉폭함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빈틈을 보이거나 불만이 쌓이면 통제를 풀고 덤벼들 수도 있다.”
“오...”
이한은 다음에 모르툼 교수를 만났을 때 뒤에서 마법을 날릴지 검을 휘두를지 고민했다.
‘이 정도면 교장보다 심한 것 아닌가?’
교장도 저런 몬스터를 선물이라고 주지는 않았는데!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벌써 언데드 몬스터를 만들어 보고 싶은 거냐?”
번개걸음 교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교수들 사이에서 마법 실력이 뛰어나단 소문이 종종 들려오더니, 역시 재능 있는 인재는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실패할까봐 쑥스러워할 것 없다. 건방진 목표를 잡는 것도 신입생 때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진짜 아닌데.’
“하지만 언데드 몬스터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미리 잘 알아보고 쓸만한 놈을 고르는 게 좋을 거다. 작년 제국 흑마법사들이 가장 많이 죽은 이유 3위가 뭔지 알지? 그릇에 맞지 않는 몬스터를 언데드 소환수로 부리면 그런 일을 겪는 법이지.”
“......”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었다.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
* * *
번개걸음 교수는 시간이 되자 기다림을 멈추고 말했다.
“오늘 시험에서 많은 걸 배웠을 거다. 평소 게으르게 행동했던 놈들은 자신의 게으름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배웠을 거고, 평소 부지런하게 행동했던 놈들은 자신의 부지런함이 결실을 맺는 모습을 목격했겠지.”
이한은 교수의 말에 폰리그를 쳐다보았다. 흰 말이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깜박이자 이한은 의심했다.
‘이 자식이 또 속임수를.’
-푸히히히히힝!
이한의 의심을 눈치 챘는지 흰 말이 화를 냈다. 역시 부지런함이 결실을 맺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면 그걸로 끝내지 말고 그 부족함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라. 동물을 길들이는 것만 그렇지 않다. 마법도 하루아침에 배워지지는 않는다.”
다들 감명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게으름 부린 놈들은 자리에 없지 않나?’
지금 교수의 말에 감명 깊은 표정 짓는 건 부지런했던 학생들이고 게을렀던 학생들은 아직 강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번개걸음도 그걸 알았는지 말했다.
“지금 이 말을 게으른 놈들한테 전해줘라. 수업 끝! 다음에 보자!”
“감사합니다!”
학생들은 말을 달래며 돌아가려고 했다.
그 때 투탄타 가문의 살코가 다가왔다.
“워다나즈.”
“투탄타.”
“당근은 말에게 잘 먹였나?”
“그래. 잘 먹였다. 고맙군.”
“우리 쪽 말들이 좋아하길래 줬는데 다행이군.”
“????”
옆에서 지나가던 로웨나가 충격과 공포의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다.”
“당근의 대가인가?”
“아니. 당근은 저번에 있었던 일에 대한 감사였다. 이번 일은 별개다. 네 능력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이한은 살짝 놀랐다.
저렇게 자존심 강한 살코가 이한한테 이렇게 부탁할 줄이야.
무슨 일이지?
‘교장의 창고라도 털려는 건가?’
“말해봐라.”
“네 요리 실력이 필요하다.”
“......”
* * *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은 제국의 여러 교단에서 찾아온 사제들이 모여 있는 탑이었다.
마법학교의 탑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가장 침착한 곳.
드워프 무하딘은 시센자 교단 소속의 사제였다.
지식과 학문의 교단, 시센자 교단은 제국의 여러 학문을 연구하고 전승하며 보존하는 교단인 만큼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는 교단.
투탄타 가문 또한 시센자 교단의 후원자였다.
“문제는 무하딘 사제님이 식사를 너무 안 하신다는 거다.”
“......”
이한은 아직도 어이가 없어서 황당해하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걸 왜 나한테?’
“그... 그렇군. 안타까운 일이야. 마법학교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겠지. 교장한테 가서 말은 해봤나?”
“아니. 식사는 문제가 아니다. 원래 적게 드시는 분이었거든. 문제는 교단에서는 다른 사제님들이 챙겨주셨는데 여기서는 그럴 사람이 없다는 거지. 탑의 다른 사제님들이 신경을 써주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이한은 ‘그래서 그걸 왜 나한테’라고 말하려고 했다.
푸른 용의 탑이면 모를까 검은 거북이 탑 출신이라면 이한보다 요리 잘 하는 학생이 없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코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고민하던 차에 워다나즈 네 요리 실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불사조의 탑에 계신 다른 사제님들한테 물어봤는데, 네 요리 실력을 칭찬하시더군.”
“사제님들이 착해서 그런 거다.”
이한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시아나 사제한테 너무 아부를 한 덕분에 역효과가 난 것이다.
대체 어떻게 칭찬을 했길래...
“시아나 사제님한테 들은 거겠지? 시아나 사제님이 착하셔서...”
“티질링 사제님한테도 물어봤고 다른 사제님들한테도 들은 소리다. 워다나즈. 지나치게 겸손하군.”
살코의 뒤에 있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암시장에서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만들었던 토마토 채소 스튜는 대단했던 것이다.
심지어 검은 거북이 탑 학생 중 한 명은 이한을 매우 분한 듯이 노려보기까지 했다.
“여기 렌지드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요리사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널 이길 수 없다고 인정했지.”
“......”
이한은 순간 상대방이 미친놈인가 싶었다.
‘전혀 정당한 대결이 아니잖아...’
그야 이한은 온갖 재료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상대는 한정된 것만 쓸 수 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법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서 요리를 해달라고?”
이한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어이없긴 했지만 못 해줄 건 없었다.
살코에게 빚을 지우게 하는 것도 그렇고, 시센자 교단의 사제한테 대접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공부 잘 하는 사람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는 것이다.
“그래.”
“그렇군. 재료는 준비했나?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 싼값에 줄 수 있는데.”
이한의 말에 살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한 재료는 이미 찾아 놨다. 같이 가지러 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 어디에 있지?”
“주방에.”
“?”
이한은 멈칫했다.
기숙사 탑에 주방이 있었나?
“어디 주방?”
“본관 지하에 있는 주방.”
“...그렇군. 난 바쁜 일이 생각나서 이만 일어서겠다.”
“잠깐, 워다나즈! 이건 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네가 없으면 안 된다! 흰 호랑이 탑에 침입한 네가 아니라면...!”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 미궁 같은 마법학교의 뒷면을 공략하려면 마법에 통달한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요리 실력이 필요하다면서 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냐? 재료를 갖고 나와라. 그러면 요리는 해주도록 하지.”
“워다나즈. 당연히 우리도 그냥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이걸 보면 네 생각도 달라질 거다.”
이한은 의아해했다.
생각이 달라질 정도의 무언가가 있나?
‘뭐지?’
“금지된 흑마법 책이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이 조심스럽게 강철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핏빛 표지를 가진 책이 살벌하게 저주를 내뿜어댔다.
“닫아!”
쾅!
학생들은 재빨리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이거라면 할 생각이 들겠지, 워다나즈?”
“...아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