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의 경악은 눈치 채지 못하고, 모라디 가문의 발파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난도... 뛰어난 재능에 걸맞은 훌륭한 이름이다.
“?”
-그 이름 기억해두지. 언젠가 만나게 될 테니.
선배는 깃펜과 종이를 들고 떠나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검은 거북이 탑 학생 한 명이 이한에게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워... 워다나즈. 이래도 되는 거 맞나?”
“원래 밤에 만난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름이나 가문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잖나.”
“......”
선배에게 배운 걸 1분도 안 되서 바로 써먹는 이한의 응용력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정도는 해야지 학년에서 손꼽히는 수석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리고 너희. 잘 생각해봐라. 방금 그 선배가 어느 가문이라고 했지?”
“모라디 가문.”
“모라디 가문 소속이면 나중에 우리를 귀찮게 할 것 같나, 귀찮게 하지 않을 것 같나?”
이한의 질문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대체로 거칠고, 시끄럽고, 앞뒤 꽉 막힌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게 모라디 가문의 지젤.
겉으로는 예의 있고 친절해보여도 살코 패거리에 소속된 학생들은 속지 않았다.
뱀들을 이끄는 건 언제나 더 지독한 뱀인 법.
“귀찮게 할 것 같다.”
“그렇지. 그걸 사전에 차단한 거다.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나중에 잘 부탁한다.”
대충 챙길 거 다 챙긴 이한은 배낭을 메고 손을 흔들며 떠났다.
그 모습을 보며 검은 거북이 탑 학생 한 명이 살코에게 말했다.
“투탄타. 네가 왜 혼자 있을 때 워다나즈랑 따로 이야기하지 말라는지 알 것 같아.”
“나도.”
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다나즈의 능력과 책임감, 친구들을 향한 우정은 존중할 가치가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워다나즈가 마음만 먹는다면 검은 거북이 탑 학생 한 명 정도는 순식간에 벗겨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았다.
나름 거칠게 살아온, 뒷골목 출신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보기에도 그랬다.
워다나즈...
무서운 녀석 같으니!
* * *
비교적 일찍 탐험이 끝난 덕분에 이한은 푸른 용의 탑 휴게실로 돌아와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주방에서 갖고 온 식료품들을 꺼내서 개인실 찬장에 분류하고...
‘꽉 차서 더 안 들어가는군. 요네르한테 부탁해야겠다.’
...비교적 유통기한이 짧은 것들 순서대로 분류하고, 장부를 작성하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친구들에게 간식을 강매... 아니, 대접해주고.
그리고 나서야 이한은 커피를 홀짝이며 자기 공부에 나설 수 있었다.
사실 이 학교에서 살다보면 잊기 쉬웠지만, 놀랍게도 학생들이 여기 입학한 건 공부를 위해서였다.
‘들어오기 전에는 다른 건 몰라도 공부는 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곱게 자란 제국의 애송이들에게 출세에 목마른 사람의 광기 어린 공부량을 보여주리라 다짐했었는데, 어쩌다보니 먹고 살기 바빠서 다른 분야에 더 특화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이한은 공부할 책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휴게실 벽난로 소파에서 침 흘리며 자는 가이난도 옆까지 공부할 책들이 쌓였다.
그걸 본 이한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나만 공부해야 할 게 좀 많은 것 같다?’
이한은 착각이 있나 싶어 다시 세어봤다.
가르시아 교수의 <기초 마법의 이해>.
기초적인 원소 마법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마법에 대해서도 쪽지시험을 본다고 예고했었다.
그렇다면 흑마법, 소환마법, 환상마법이 추가됐다.
가르시아 교수가 정말 간단하게 시험을 본다 하더라도 흑마법, 소환마법, 환상마법 교수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다음 학년에 들을 학생들을 미리 모아서 가르침을 주는 만큼, 정식으로 쪽지시험을 보진 않더라도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걸 감안한다면 각각 책 두 권씩 정도는 읽어줘야 했다.
착착착-
‘여기까진 이상하지 않군.’
이한은 책을 옆으로 밀어 넣고 다음 책을 확인했다.
<기초 연금술의 이해>.
연금술이야말로 공부 없이 감각만으로 따라가려고 하면 크게 다치는 분야였다.
이한에게 혹독한 실험으로 다져진 연금술 감각이 있다지만 이론적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요네르나 아덴아르트, 시아나 사제처럼 들어오기 전부터 연금술을 공부한 학생들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그걸 감안한다면 책 세 권 정도는...
착착착-
이한은 또 옆에 책을 쌓아 올렸다.
<기초 탈 것 훈련>.
쪽지시험은 끝났지만 번개걸음 교수의 가르침은 매주마다 있었다.
이 학교에 있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생물들에 대해 배우는 건, 꼭 탈출만이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도 중요했다.
‘한 권밖에 안 되는군.’
두껍긴 했지만 한 권 밖에 안 되다니. 이한은 안도하며 옆에 쌓아올렸다.
그 다음은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또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필수 과목인데다가 공부의 필요성이 확실한 과목들.
책의 높이가 다시 한 번 높아졌다.
대충 다 된 것 같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한은 추가 책을 꺼냈다.
볼라디 교수가 준 <기초 번개 원소 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
쪽지 시험 없다고 안 익혀놨다가는 볼라디 교수 앞에서 몸으로 직접 번개를 맞아가며 익혀야 할지도 몰랐다. 미리 공부해야 했다.
해골 교장이 (강제로) 준 검은 마도서.
저번에 알려준 <고나달테스의 날카로운 손>이 숙련될 때까지 연습해놔야 했다. 안 그러면 또 꿈 속에서 끌려갈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얻은 <기초 혈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
이건 안 읽는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이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읽어둬야 했다. 쓸만한 마법 하나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매번 느끼고 있었다.
책을 다 쌓아올린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책으로 인해 가이난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으음.”
‘이상하군.’
분명 필요한 책들만 정리했는데 왜 이렇게 많은 거지?
* * *
휴게실에서 졸다가 개인실 침대로 들어가 아침까지 푹 자고 나온 가이난도는 이한이 휴게실에 깨어있는 걸 보고 신기해했다.
“너 진짜 일찍 일어난다?”
“안 잤는데.”
“......”
가이난도는 조용히 마시멜로를 꼬챙이에 끼워서 모닥불에 가져가서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구웠다.
그런 다음 단단한 빵 사이에 끼워서 야금야금 먹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가이난도. 네가 지나치게 태평한 거다.”
달카드 가문의 아산도 피곤한 표정으로 걸어 내려왔다.
쪽지시험 주간인 만큼 개인실에서 밤을 새서 공부를 했던 것이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을 완벽하게 마스터하기 위해 얼마나 공부했던가.
아마 워다나즈도 저 과목 때문에 밤을 샜으리라.
“워다나즈. 이해한다. 이렇게 했는데도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의 한 80% 정도만 이해한 것 같거든.”
“그 정도면 잘 한 거지. 난 아직도 공부해야 할 부분들이 많은데.”
옆에서 듣고 있던 가이난도는 마시멜로를 먹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의 이야기에 뭔가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아산은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책만 들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저 과목만 공부한 게 맞았다.
그에 비해 이한은...
‘어제 책이 거의 산더미 아니었나?’
분명히 올라가기 전에 책이 무슨 산더미마냥 쌓여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책은 한 권이 전부였다.
가이난도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원래 있던 책들은 어디 갔어?”
“다 공부한 책들은 개인실에 놨지. 거추장스러우니까.”
“......”
가이난도는 들고 있던 마시멜로를 떨어뜨렸다.
“미... 미친 거 아니야?!”
“왜 그래, 가이난도?”
“이한이 어제 밤을 새서 공부를 했다잖아!”
“...그건 다들 하는 거야. 이 자식아.”
뒤늦게 차례대로 나온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가이난도를 구박했다.
지금 공부 하나 한 것 갖고 이렇게 호들갑을 떤단 말인가?
다들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니... 야... 이...”
가이난도는 억울해서 부들부들 떨었다.
휴게실에 쌓여 있던 책들을 보지도 못한 놈들이...!
“진짜 엄청나게 많았다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빵이나 마저 먹어.”
“크흡.”
가이난도는 남은 빵을 우물거리며 삼켰다. 빵은 맛있었다.
“근데 아산. 너 왜 어제 휴게실이 아니라 개인실에서 공부했냐? 휴게실이 낫지 않아?”
“네가 자꾸 시끄럽게 잠꼬대를 해서.”
“...미안...”
그러는 사이 이한은 <기초 번개 원소 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을 한 번 더 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오늘 하루를 시작하려면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워다나즈. 오늘 무슨 강의 들어?”
“기초 검술.”
“저... 저런.”
친구들은 이한의 말에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쪽지시험 주간이라 힘들 텐데, 기초 검술 같은 강의를 듣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힘들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은데.”
이한은 친구들의 걱정에 의아해했다.
솔직히 지금 공부하는 과목들과 달리 그냥 가서 몸으로 때우면 되는 <기초 검술> 강의는 오히려 편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워다나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쪽지시험 핑계로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덤비는 건 아니겠지?”
“다음에 흰 호랑이 탑 놈들 보면 워다나즈 건드리지 말라고 똑똑히 경고하자.”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우정으로 뭉쳐 단단히 결심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듣는다면 분노를 터뜨릴 결심이었다.
* * *
“무슨 일이지? 분위기가 이상한데.”
원래 검술 강의 때와 다르게 분위기가 들떠있고 어수선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더르규에게 물었다.
더르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쪽지시험을 위해서 외부에서 인원이 온다는군. 이한.”
“!”
이한은 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설렘 반 걱정 반 섞인 얼굴로 떠들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외부에서 인원이 온다니.
아마 같은 기사 가문 출신의 또래들일 터.
모두 다 기사 가문 출신인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입장으로서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상대하면서 부끄러운 검술을 보여주거나 실수라도 한다면...
“다들 긴장될 거다. 사실, 나도 긴장이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마음이 편하군.”
이한은 당당하게 말했다.
마법사 가문 출신이라 검술 강의에서 무슨 망신을 당하든 ‘저 가문 출신 누구는 왜 이렇게 검술에 서투르지?’같은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마법사 가문이니까!
“......”
더르규는 이한의 말에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이한 너 정도면 밖에서 온 손님을 상대해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다.”
“그런가? 너무 섣불리 단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싸우다가 마법을 써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나?”
“......”
“농담이다.”
“그, 그렇지?”
더르규는 창백해진 낯빛을 되돌렸다. 이한이 진심으로 저런 소리를 한 줄 알고 식겁했던 것이다.
“주목.”
탁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잉걸델 교수가 나타났다.
“자. 다들 만나서 반갑고... 길게 말할 것 없이, 이번 주는 간단한 시험으로 학생들이 얼마나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주간이죠. 그래서 밖에서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잉걸델 교수의 말과 함께 뒤에서 중무장한 기사들이 나타났다.
“...또래라면서?”
이한은 더르규에게 물었다.
기사들의 얼굴을 보니 여기 있는 학생들보다 한 십년은 더 전장에서 구른 것 같았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또래일지도...”
“여기 오신 기사님들은 모두 다 기사단에서 활동 중이신 뛰어난 기사님들입니다.”
“......”
학생들은 경악했다.
이한은 생각했다.
‘잉걸델 교수님이 볼라디 교수하고 하는 짓이 은근히 비슷한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