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한이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잉걸델 교수는 혼자 뿌듯해하고 있었다.
‘참으로 잘 데리고 왔다.’
잉걸델 교수가 데리고 온 기사단, 백양목 기사단은 제국의 명성 높은 기사단 중 하나였다.
한 지역에 본부를 두고 머무르며 그 지역을 지키는 기사단이 아닌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위험을 찾아 뛰어드는 기사단.
그게 바로 백양목 기사단이었다.
기사가 하인과 노예를 거느리고 거창하게 돌아다니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백양목 기사단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들은 말 한 필과 갑옷 한 벌만 걸치고서, 홀로 제국의 드넓고 험한 땅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검술 실력만 뛰어나서는 안 됐다.
온갖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과 임기응변 등 다양한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 만큼 이 기사들은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줄 수 있으리라!
‘또래 기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보다 훨씬 좋은 선택...’
잉걸델 교수가 뿌듯해하고 있는 동안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 비켈린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잉걸델의 부탁이라 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군.’
비켈린츠는 학생들이나 어린 수련기사들을 상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비켈린츠가 배우고 익혀온 검술은 오로지 실전을 위한 검술이었지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교훈을 주기 위한 검술이 아니었다.
잉걸델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렇게 기사들을 데리고 찾아오긴 했지만...
막막한 건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검술의 길에 목숨을 건 기사들도 아니었다. 마법의 길을 같이 걸으려는 기사들이었다.
‘마법학교에 입학한 기사들이라니.’
비켈린츠가 마법사를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한 번씩 마법사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무시할 리 없었다.
다만 저 나이의 학생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검술에 전념해도 비켈린츠를 상대하기 모자랄 텐데, 마법까지 같이 배우는 학생들이 비켈린츠를 상대하려는 게 마뜩찮을 뿐이었다.
꼭 비켈린츠나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들한테 배워야 한다는 법은 없잖은가.
다른 기사단의 친절한 기사들이나 혹은 또래 수련기사들을 부르면 될 텐데...
“그래서. 뭘 하면 되오, 잉걸델 교수?”
“오기 전에 말한 것처럼 편하게 상대해주시면 됩니다. 목숨만 남겨주세요.”
“알겠소.”
비켈린츠는 한숨을 쉬고 기사들과 걸어갔다.
기사들은 각자 위치로 하나씩 흩어지더니 목검을 들고 제자리에 섰다. 학생들이 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한은 어떻게든 잉걸델 교수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이한이라도 나서야 했다.
“교수님. 저 기사들과 일대일로 싸우는 건 좀...”
“걱정할 거 없어요. 워다나즈.”
잉걸델 교수는 웃었다. 그 웃음에 이한은 살짝 안심할 뻔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안심할 때가 아니지.’
“당연히 셋이서 하나를 상대하게 될 겁니다. 저번에 뽑은 조대로 모이세요.”
“......”
역시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이한은 속으로 볼라잉걸델 교수의 욕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젤도 이한과 마찬가지로 매우 매우 싫은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르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우리 셋이 이렇게 다시 같이 모이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
“마음에도 없는 소리 관둬. 초이.”
“행운? 해골 교장을 만난 정도의 행운이긴 하겠군.”
지젤과 이한에게 동시에 구박을 받은 더르규는 시무룩해졌다. 이한은 미안해져서 사과했다.
“미안하다. 더르규. 네 잘못이 아닌데.”
“아니다. 이한.”
이한은 지젤을 쳐다보았다.
‘으음.’
생각해보니 며칠도 안 되는 사이에 모라디 가문 상대로 두 번이나 원한을 쌓은 상태였다.
해골 교장의 소환수 상대로 한 번.
모라디 가문의 선배 상대로 한 번.
그걸 생각하자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이한은 이번에는 아주 살짝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시험에서는 내가 양보하도록 하지. 모라디. 네 지시를 따르겠다.”
“......”
이한이 먼저 고개를 숙인 놀라운 상황이었지만 지젤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수상쩍어했다.
‘무슨 속셈이지?’
굴복시키고 충성을 바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절대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워다나즈는 후자였다.
지젤도 그걸 알았기에 이제 워다나즈를 무릎 꿇리겠다는 기대는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온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무슨 속셈이지?”
“무슨 속셈이냐니... 모라디.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 이번 시험에서 점수를 얻을 수가 없잖나. 그래서 내가 양보한 거다.”
시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이한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 진심에 지젤도 살짝 흔들렸다.
정말인가?
“하지만 워다나즈 넌 내 지시를 따른다고 말하고서 바로 듣지 않을 새... 자식이잖아.”
“그건 네 지시가 개같... 아니. 납득가지 않을 때가 있어서지.”
더르규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언제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둘이 대화를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쨌든 좋아. 지시를 따른다니. 믿지는 않겠지만, 지켜보겠어.”
“잘 부탁하지. 그래서 잉걸델 교수님. 저희 상대는 누굽니까?”
이한은 잉걸델 교수에게 물으며 두리번거렸다.
제비뽑기가 어디 있지?
잉걸델 교수는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저기 비켈린츠 님입니다.”
“...무작위로 뽑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한이 보기에 비켈린츠라고 불린 기사는 우두머리 같아 보였다.
그 말은 즉 가장 실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셋이니, 그에 걸맞은 상대를 붙여준 거죠.”
“아... 그렇군요...”
이한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잉걸델 교수는 그런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고 격려했다.
“셋이라면 충분히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예. 볼ㄹ... 잉걸델 교수님.”
* * *
비켈린츠는 어린 학생 셋이 다가오자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공격해도 좋소.”
더르규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도 되겠... 습니까?”
“쓸 수 있는 걸 쓰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운 법이오.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마법을 쓰시오. 나 또한 봐주지 않을 테니.”
‘좀 봐주셔도 되는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목검을 집어 들었다.
고작 몇 마디 대화만 나눴지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비켈린츠는 이한을 가르친 스승, 알라르롱처럼 엄격한 기사였다.
문제는 알라르롱은 이한을 봐주면서 상대했지만 비켈린츠는 그러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학생들한테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공격해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통 자기도 모든 수단을 써서 방어할 가능성이 컸다.
지젤도 그런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표정에 미묘한 불안함이 감돌았다.
“초이 가문?”
“예. 맞습니다.”
비켈린츠는 더르규의 자세만으로 더르규의 가문을 알아맞혔다.
“쌍검... 모라디 가문이군.”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켈린츠는 이한을 보고 당황했다.
자세를 보니 분명 벽암검(碧巖劍)인데...
벽암검을 사용하는 가문이 있었나?
제국 기사 알라르롱을 제외하면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어느 가문 소속이시오?”
“워다나즈 가문입니다.”
“워다나즈... 음... 으응?”
비켈린츠가 쇳덩어리 같은 얼굴근육을 움직이며 당황해하자 더르규와 지젤은 자신도 모르게 공감했다.
‘그 마음 이해가 갑니다.’
“으음... 하긴 검술을 배우는 데에 가문이 뭐 그리 중요하겠소.”
비켈린츠는 학생들 앞에서 당황했다는 게 민망했는지 말을 돌리며 끝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변하지 않았다.
...대체 왜 워다나즈 가문 출신 학생이 여기 있단 말인가?
게다가 자세를 보아하니 검술을 하루이틀 익힌 게 아닌 것 같은데...
“이한. 빈틈이 전혀 안 보이는데...”
더르규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만큼 비켈린츠가 뿜어내는 압박감은 살벌했다.
단지 가만히 서서 목검을 아래로 지그시 내리고 있기만 하는데도 이런 압박감이라니.
어느 정도로 강한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쓸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쓰라고 하시니, 쓰도록 하자고.”
이한은 지팡이를 꺼냈다.
사실 이한도 비켈린츠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검을 휘두르며 전장에서 살아온 백전노장의 기사 상대로는 어떤 방법이든 효과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점수가 나오지 않는 법.
잉걸델 교수의 입에서 ‘졌지만 잘 싸웠습니다’라는 말이라도 들으려면 최선을 다해야했다.
“발이여. 땅을 주름잡아라.”
이한은 <고나달테스의 기민한 발걸음>을 시전했다.
이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둘에게도.
<고나달테스의 기민한 발걸음>은 <감각 강화> 마법과 비슷한 계열의 마법이었지만 좀 더 효율적이고, 실용적이었으며...
‘부작용이 있긴 한데 내 일 아니니까.’
친구들이 겪을 마법 이후의 근육통은 이한이 알 바 아니었다. 일단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고맙다. 이한.”
더르규는 온몸을 감싸는 마법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지 않아도 지금 이한이 마법으로 그들을 강화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공간이여. 인지되어라.”
“?”
그러나 이한의 주문은 멈추지 않았다.
셋에게 마법을 걸고 나서도 쉬지 않고 다음 마법을 시전하는 이한의 모습에, 더르규는 당황했다.
“손이여, 적을 갈라버려라. 열이여, 공기를 일그러뜨려라...”
이한의 손에 날카로운 마력이 감돌고, 동시에 아지랑이 같은 환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슨 마법이 효과적일지 모른다면 그 답은 간단했다.
전부 다 쓰면 됐다.
이쯤 되자 더르규나 지젤뿐만 아니라 비켈린츠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더라도 기껏해봤자 한두개 정도 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말려야 하지 않나?’
비켈린츠는 잉걸델 교수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쓰다가 마력 고갈이라도 오면 어린 마법사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었다.
교수라면 말려야 할 텐데?
그러나 잉걸델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비켈린츠는 더욱 당황했다.
‘저럴 사람이 아닌데.’
“번쩍여라!”
이한은 비켈린츠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1서클 번개 마법을 시전해 비켈린츠를 노렸다. 번갯불이 비켈린츠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비켈린츠는 쳐다보지도 않고 가볍게 피했다.
“공격해!”
지젤은 더르규에게 외치며 달려 나갔다.
서로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마법을 쓴 지금이 기회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마법은 무슨 마법이길래...’
평소보다 다리가 훨씬 더 가볍게 움직여졌다. 워다나즈를 싫어하는 지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비켈린츠는 두 학생들이 조금 빨라진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발을 구르더니 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큭!”
더르규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검이라고 자부하는 더르규였지만 비켈린츠는 차원이 달랐다.
비켈린츠를 향해 찌르는 순간 기사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저항 불가능한 반격이 날아왔다.
더르규가 할 수 있는 건 뒤로 날아가 데굴데굴 구르는 것밖에 없었다.
쉭!
비켈린츠는 더르규를 완전히 제압하려다가 멈췄다. 물 구슬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는 고개를 까딱거려서 피했다. 이제까지 많이 봐왔던 물 마법들처럼 한 번 피하면 끝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물 구슬은 얼굴 옆에서 바로 빙글 돌더니 다시 비켈린츠를 노렸다.
비켈린츠는 놀라서 물 구슬을 손등으로 쳐냈다. 물 구슬에 상당한 마력이 담겨 있었는지 마력으로 강화시킨 손등에 묵직한 감각이 올라왔다.
“훌륭하오.”
비켈린츠는 진심을 담아서 칭찬했다.
여기 신입생들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들도 이런 기지(奇智)는 보여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단순한 하급 마법을 이렇게 개량해서 허를 찌르다니.
그러나 듣는 이한의 기분은 살짝 복잡했다.
‘교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는군.’
기쁘면서도 좀 슬픈 듯한...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한은 지팡이를 붙잡고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