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말하는 책도 자신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아차렸는지 뒤늦게 변명했다.
“물론 계속 다치란 뜻은 아니었다. 그냥 자주 놀러오란 뜻이었지.”
“아. 그렇군요.”
이한은 찜찜함을 풀고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단단한 바위 조각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리폰의 담석이다.”
“오...!”
이한은 머릿속에서 읽었던 책들을 떠올려보았다.
연금술 책에서 읽었던 바에 따르면 그리폰의 담석은 분명...?
“마력 회복에 강력한 효과가 있습니까?”
“그렇지. 잘 아는구나.”
이한은 시무룩해졌다.
‘별 쓸모없군.’
이미 우레걸음 교수의 수업에서 마력 회복 포션이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겪은 뒤였다.
마력 감소 포션이면 모를까 마력 회복 효과는...
말하는 책은 이한의 반응에 당황했다.
이게 뭔지 모르는 거면 모를까, 알면서도 저런 반응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폰을 직접 기르는 게 아니라면...
“귀한 건데? 진짜 그리폰의 담석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마력이 부족했던 적이 별로 없어서...”
“앗.”
말하는 책은 그제야 이한의 반응을 이해했다.
생각해보니 신입생이 저 정도 마력이라면 마력 부족을 느낄 일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으음... 내가 아는 악마들 중에 마력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악마들이 몇 놈 있긴 한데. 위험해서 소개시켜줄 수가 없군.”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한은 슬며시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역시 해골 교장에게 소환된 악마인 만큼 그렇게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자주 놀러 와야 한다! 같이 고나달테스 이야기나 하자꾸나!”
말하는 책은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고 낱장을 펄럭이며 배웅했다.
더르규가 감탄하며 말했다.
“교장 선생님께 소환되어서 붙잡힌 악마신데도 이한 너한테는 친절하게 대해주시는군. 이한. 네 능력을 알아보신 게 분명하다.”
악마도 재능 있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
그래서 이한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분명했다.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하지만 이한이 보기에는 방금 대화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저건...
‘해골 교장 욕할 사람이 없어서겠지.’
어느 누구와 해골 교장을 욕하겠는가.
그럴 수 있는 상대는 생각보다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한은 갑자기 말하는 책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쩌다가 해골 교장하고 엮여서!
* * *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인 것처럼 이 강의 또한 매우 중요했다.
마력 계산부터 마법진 작성, 새로운 마법 개발 등 마법의 수준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직관과 감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졌다.
그런 만큼 학생들도 이 강의의 중요성을 알고 열심히 공부해야 했지만...
‘수면 마법을 걸었나?’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벌써 전멸한 상태였다. 가이난도는 코까지 작게 골면서 꾸벅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생존자는 아산이나(아산도 깃펜으로 손등을 찌르고 있었다) 아덴아르트(무표정했지만 이한은 황녀가 자기 자신한테 잠을 쫓는 마법을 거는 걸 목격했다), 요네르 정도였다.
이한은 커피를 꺼냈다.
커피를 요네르에게 건네자 요네르는 설산에서 몇 달 간 조난되었던 사람이 구조되고 받은 첫 커피처럼 소중하게 받아서 홀짝였다.
“너무 졸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탓인지 강의실 내 공기도 희박해지는 것 같았다.
도형 위에 물병을 그려서 낙서를 끝낸 요네르는 기분전환도 할 겸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이한은 더욱 더 꼿꼿한 것 같았다.
‘밤을 샜을 텐데?’
“안 졸려?”
“신성한 강의에서 잘 수는... 없어. 요네르.”
“????”
친구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자 요네르는 당황했다.
왜 그래?
‘잘 보여야 한다.’
이한은 눈을 부릅떴다.
솔직히 교수의 목소리는 강철의 의지를 갖고 있는 이한도 졸리게 만들었다.
특유의 리듬감을 가진 목소리가 마치 최면을 걸듯이 사람을 졸리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교수의 신분을 몰랐다면 상대를 정신 마법의 고수로 의심했을 정도로.
알펜 나이튼.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을 맡고 있는 교수이자, 원래는 제국 상급 행정관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다.
수많은 마법사들의 연구예산에 칼질을 시도해 각종 원한을 샀던 제국 고관!
얼마나 칼을 휘둘렀는지 아직도 마법학교의 교수들이 원한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한은 달랐다.
‘잘 보여야 한다...!’
제국 상급 행정관이라면 제국 내의 관직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자리 아닌가.
그런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인맥이 없을 리 없었다.
만약 그런 교수에게 잘 보인다면?
-워다나즈 군. 자네 같은 인재야말로 제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일세. 졸업하면 제국으로 오게! 내가 추천해주겠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공방 안에서 서로 같이 애증을 쌓아가는 사제관계보다, 깔끔하게 추천해주고 그 뒤로는 만나지 않는 이런 사제관계야말로 이한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제관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펜 나이튼 교수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그런데 정말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군.’
이한은 고민했다.
알펜 나이튼 교수는 전형적으로 ‘나는 내 길을 갈 테니 너희들은 알아서 따라와라’에 가까웠다.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따라오든 말든 자신은 자신의 할 일을 한다.
스스로는 매우 만족하고 있을 테니 더욱 더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볼라디 교수와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로 까다롭다.’
볼라디 교수는 학생들, 아니, 학생에게 관심이 없진 않았다.
오히려 관심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지.
거기에 학생들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멀리서 기다리긴 했지만...
“뭘 고민하고 있어?”
“어떻게 하면 교수의 눈에 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어.”
“...충분하지 않아??”
요네르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뭐가 충분하단 거지?”
“교수님들한테 관심을 받아서 나쁠 게 없긴 하지만, 너무 많이 받으면 네가 힘들 것 같은데...”
요네르는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친구한테 이런 조언을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었다.
교수들한테 너무 많은 관심을 받지 말라니. 그게 무슨 조언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을 보면 이런 조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진지하게 걱정된다!
“괜찮아. 요네르. 이 정도는. 그리고 알펜 나이튼 교수님은 다른 교수님들과 다르다고.”
“으응... 네가 괜찮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요네르는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왜 친구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여기까지. 이 방정식을 기억하게. 마력을 계산할 때 꼭 필요할 테니.”
그러는 사이 알펜 교수는 강의를 마쳤다.
‘여기까지’를 잠결에 들은 가이난도가 기가 막히게 고개를 들었다.
“끝났어? 끝났어??”
“그러면 지금부터 간단한 시험을 보도록 하겠네.”
“...끝났구나...”
가이난도는 다른 의미로 끝났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주변을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쓰러져 있던 학생들이 전부 정신을 차리고 절망하고 있었다.
“운이 좋군.”
“뭐가 운이 좋아?!”
이한의 중얼거림에 가이난도가 경악했다.
못 본 사이 친구가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이한은 가이난도를 무시하고 생각했다.
‘이번 쪽지시험에서 나이튼 교수의 눈에 확실히 들겠다.’
다른 건 몰라도 수학에서 여기 이 강의실에 있는 신입생들한테 밀릴 수는 없었다.
반드시 뭔가 보여주리라!
파라라락-!
붙어 있던 학생들 사이에 거리가 만들어지고, 학생들 앞에 시험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한은 옆을 가볍게 쳤다.
알펜 교수가 불러낸 투명한 막이 공간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선을 던지니 시야가 흐릿해졌다.
‘커닝도 마법 못하면 힘들겠군.’
마법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일단 마법을 목격하면 뚫을 방법부터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았다.
생각하는 이한의 귓가에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다 풀었으면 제출하고 나가도 좋네.”
‘그렇겠지.’
“다 풀지 못하면 나가지 못하네.”
“...?”
너무 자연스럽게 뒤에 덧붙여진 말이라 이한은 순간 넘길 뻔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다 못 풀면 못 나간다고?’
너무 당연한 말을 저렇게 따로 하는 거 자체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한 학생이 이한만 있는 건 아니었는지 누군가가 손을 들고 물었다.
“교수님. 빈칸을 다 채우기 전에는 나가지 못한다는 말씀이시죠?”
“맞네.”
“휴.”
학생들은 안심했다. 교수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정답으로.”
“어... 정답이 아닐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요?”
“정답으로 채울 때까지 풀어야겠지.”
알펜 교수는 무슨 하찮은 질문을 하냐는 듯이 무뚝뚝하게 학생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학생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전부 맞히기 전에는 못 나간다고??’
‘지금... 어...’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이 강의만 끝나면 남은 오후를 즐기고 저녁을 즐길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달라진 것이다.
알펜 교수가 정확히 몇 시간까지 그들을 감금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마 밤까지 가둬놓겠어?’
‘넌 아직도 이 학교를 모르냐?’
‘내일까지 가둬놓는 건 아니겠지...?’
사사삭!
이한은 미친듯이 깃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교수의 눈에 들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의실을 빠져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 * *
‘대충 다 풀었는데...’
이한은 시험지 위에 새겨진 동그라미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법이 걸린 시험지라, 정답을 맞힐 때마다 동그라미가 새겨졌다.
하지만 마지막 문제가 이한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느 날 고나달테스는 황제에게 제국 빌테론 무도회장 건설을 위해 제국 금화 3892닢을 지원받았다. 이 때 빌테론 무도회장에 사용된 마법들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이러한 마법들과 시약들이 사용되었을 때 고나달테스에게 남은 제국 금화는 몇 닢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720개가 맞다.’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마법진을 확인하고, 마법진에 드는 시약의 양을 확인하고, 제작하는데 들어가는 인건비도 확인하고...
그렇게 검산을 했는데도 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왜지?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친구들도 뒤늦게 이한을 따라잡았는지, 깃펜을 내려놓고 마지막 문제만 골똘히 노려보고 있었다.
다 같이 마지막 문제에서 막힌 것이다.
‘문제 내에서 주어진 정보로 푸는 게 아니라 원래 알고 있었던 게 있어야 했나? 다른 발상으로 푸는 문제인가?’
이한은 생각해봤다.
고나달테스는 해골 교장의 성.
만약 해골 교장이 금화를 받았다면 남겨서 황제한테 돌려줬을까?
‘그럴 것 같지 않긴 해.’
생각에 잠겨있던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답안지에 ‘0’이라고 적었다.
틀려도 페널티가 없으니 한 번 찔러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스윽-
그러나 시험지에는 동그라미가 쳐졌다. 이한은 경악했다.
‘이게 뭔...??’
알펜 교수도 이한이 다 풀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빠르군. 잘했네. 만점일세, 워다나즈 군.”
그렇게 원하던 칭찬을 받았지만 이한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교... 교수님.”
“왜 그러나?”
“마지막 문제에 대해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
알펜 교수는 엄격한 얼굴에 살짝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재밌었나보군. 시험에 지친 학생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네.”
“...오...”
이한은 상대의 눈에 들려고 했던 스스로의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