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언데드 소환수에게도 반항기가 있냐 없냐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샤르칸이 반항기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샤르칸. 이리 오라니까.”
이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자 오히려 생쥐가 벌벌 떨었다.
교장 앞에서 저렇게 고집을 부리다니, 저 언데드 소환수 박살나는 거 아닐까?
그러나 이한은 샤르칸을 때려 부수는 대신 어떻게든 어르고 달랬다.
“샤르칸! 왜 이러는 거지?”
파파팍!
샤르칸은 이한의 말을 못 들은 척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한은 당혹스러웠다.
이제까지 그래도 말 잘 듣던 소환수가 이러다니...
분명 모르툼 교수가 말한 적이 있긴 했다.
언데드 소환수가 꼭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말을 안 듣는 경우가 더 많다고.
살아 있는 자와 죽어 있는 자라는 상극의 속성도 그렇고 언데드 소환수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말을 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샤르칸도 분명 강한 소환수인 만큼 이러는 게 말이 안 되진 않았다.
탁탁-
닐리아가 발톱으로 이한의 외투 앞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샤르칸한테 던지는 시늉을 했다.
“먹이로 유혹하라고?”
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난도를??”
닐리아는 당황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새 외투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민 가이난도가 충격과 배신의 표정으로 찍찍대며 닐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거 말고! 맥주사탕!’
“아. 맥주사탕을 말하는 거였군.”
이한은 닐리아의 말뜻을 뒤늦게 이해했다.
가이난도가 주머니에 들어가는 탓에 맥주사탕을 다른 주머니에 옮긴 것이다.
뒤늦게 맥주사탕을 꺼내자 샤르칸이 갑자기 쫑긋거렸다.
“...자! 물어와라!”
이한은 본능적으로 맥주사탕을 반대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샤르칸이 신나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맥주사탕을 집어삼켰다.
“이제 기분이 풀렸니?”
그러나 샤르칸은 맥주사탕만 먹고 다시 엎드렸다.
보고 있던 생쥐가 초조해졌는지 샤르칸한테 달려가서 찍찍댔다.
찍찍찍!!
대충 ‘너 이러다 진짜 뒤지는 수가 있어’에 가까운 호소였지만, 샤르칸은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한과 닐리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닐리아는 므앵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반항기라도 이한을 따르던 소환수가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환수 본인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 가이난도를 먹고 싶... 농담이다. 가이난도.”
가이난도는 서러움 담긴 찍찍을 외치며 외투 안으로 숨으려고 했다.
“그러게 과제 하라고 했을 때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야.”
‘그거랑은 상관없는 것 같은데...’
요네르는 이 폴리모프의 숲을 평소 좋지 못한 습관 교정 기회로 삼는 이한의 모습에 감탄했다.
기숙사 사감 해도 참 잘 하겠다!
“샤르칸. 샤르칸? 네가 원하는 걸 말해줘야지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표현해봐라.”
샤르칸은 못 들은 척 가만히 있다가 슬쩍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가리켰다.
완성되었다지만 뼈밖에 없어서 상당히 볼품없고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어? 몸도 필요한가?”
샤르칸이 그게 맞다는 듯이 신이 나서 꼬리뼈를 휘둘렀다. 소환수가 기분이 풀린 건 다행이었지만 이한은 더 당황스러웠다.
‘육신을 뭘로 만들어주지?’
연금술에 조예가 있는 요네르가 숲 옆에 위치한 진흙을 가리켰다.
부드러운데다가 찰기가 있어서 골렘이나 다른 소환수를 쓸 때 충분히 쓸만한 진흙이었다.
“저건 어떻지?”
샤르칸은 진흙으로 다가가더니 몸을 뒹굴었다. 그러자 뼈 위에 진흙으로 된 육신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오...!”
이한과 친구들은 그 모습에 놀라워했다.
색감이 별로긴 했지만 뼈만 돌아다닐 때보다 훨씬 더 위엄찬 모습이 완성된 것이다.
파사삿!
그러나 샤르칸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 자신의 몸을 둘러보더니 바로 진흙을 탈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한은 재빨리 물의 방패를 불러내서 막았다. 진흙 한 점이 사이로 날아와 가이난도의 얼굴에 철퍽 달라붙었다.
찍찍찍!
“진흙은 별로였나 본데.”
붉은여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한이 괜찮다는 듯이 달랬다.
“그래도 방법을 찾았으니 다행이지. 딱히 손해 본 건 없어.”
가이난도는 진흙을 앞발로 털어내며 매우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손해 있어!
교장과 일행들이 숲을 안 나가자 초조해진 생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찍찍찍찍-
“따라오라고?”
생쥐는 끄덕이며 이한과 친구들을 아까 지나쳐 온 샘으로 안내했다.
한철수(寒鐵水)가 고여 있는 샘의 물이었다. 샘 슬라임을 만들어 낸 물이기도 했다.
특수한 마력이 섞여 있는 샘의 물인 만큼 저 까다로운 언데드 소환수도 만족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한도 샘의 물이 특별하단 걸 깨닫고 살짝 기대 섞인 시선을 보냈다.
‘이 정도면 될지도 모르겠군.’
첨벙!
샤르칸은 샘에 뛰어들더니 물로 자신의 몸을 만들어서 걸어 나왔다.
보통의 물보다 짙고 푸른색의 육신이 샤르칸을 좀 더 신비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이한과 친구들은 아까보다 더 감탄했다.
이 정도면 분명...
촥!
그러나 샤르칸은 냉정하게 물을 다 털어내 버렸다.
그 바람에 가이난도는 다시 물방울을 얼굴에 얻어맞았다.
찍찍찍찍찍!
‘음. 버리라고 하는 거 같군.’
이한은 쥐의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가이난도가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샤르칸. 미안하지만 난 더 이상 네 육신을 만들어 줄 방법이 없다.”
이한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샤르칸은 거기 연못에서 그러고 있어!
허세나 위협이 아니었다. 정말 말을 안 듣는데 어떡하겠는가.
이한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샤르칸이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애처롭게 바닥을 박박 긁어댔다. 그러더니 이한의 지팡이를 물려고 했다.
“안 돼. 샤르칸.”
그러나 샤르칸은 포기하지 않고 이한의 지팡이를 계속 가리켰다. 마치 원하는 게 있는 것처럼.
“...내가 만들어달라고?”
샤르칸은 신이 나서 꼬리뼈를 휘둘렀다. 뭘 원하는지는 알아냈지만 이한은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내가 그럴 능력이 없는데.’
지금 사용 가능한 원소 마법 자체가 몇 개 안 되는데다가 그 중에서 샤르칸처럼 까다로운 소환수를 만족시킬 만한 원소는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원소라면...?
“알겠다. 한 번 해보자.”
!
샤르칸은 이한이 지팡이를 들자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앉아서 쳐다보았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벼락이 사납게 공기를 태우며 날아들자 샤르칸은 기겁해서 피했다.
그리고는 매우 화난 표정으로 바닥을 미친듯이 두드려댔다.
“...이게 아니었나?”
당연히 상대가 벼락으로 된 육신을 갖고 싶어 할 줄 알았던 이한은 반응에 당황했다.
벼락이 멋지지 않나?
샤르칸은 씩씩대며 샘의 물을 가리켰다.
‘물을 만들어달란 소리였나.’
이한은 <물 생성> 마법을 준비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됐다.
저 특수한 샘의 물도 싫어하는 녀석이었는데, 이한이 불러낸 물을 만족스러워할까?
그러나 걱정과 달리 허공에 물 덩어리가 생겨나자 샤르칸은 신이 나서 그 물을 껴안았다.
물이 형태를 바꾸더니 샤르칸의 몸으로 바뀌었다.
“괜찮나?”
물빛으로 변한 샤르칸은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지팡이를 가리켰다.
“더 해달라고?”
샤르칸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한은 물을 더 불러냈다.
불러낸 물은 샤르칸의 몸으로 흘러들어갔고, 거기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찍찍찍?
보고 있던 숲의 생쥐가 당황했다.
막대한 양의 물을 압축해서 자신의 근육으로 만드는 저 언데드 소환수도 당황스러웠지만, 그걸 멈추지 않고 계속 물을 불러오는 교장도 당황스러웠다.
마력이 대체 얼마나 많길래 저런 낭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 * *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어.”
“......”
“......”
이한과 친구들은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한밤중의 탑에 돌아왔다.
가이난도는 자기 얼굴에 아직도 쥐 수염이 있는 것 같아서 손으로 비벼보고 있었다.
‘마구간 도착은 못 하고 샤르칸만 완성시켰군.’
폴리모프의 숲에서 너무 헤맨 탓에 이한은 숲을 돌파하고 나서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진척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아쉬웠다.
‘하지만 당장 내일도 시험이 있는 상황에서는 역시 무리할 순 없...’
그르릉!
“?”
샤르칸이 가이난도한테 달려들었다. 덩치 큰 푸른 빛 소환수가 달려들자 가이난도는 기겁해서 피했다.
“왜, 왜 그래?! 내가 먹을 거 갖고 놀려서 그래!? 줄게! 주면 되잖아!”
‘그 사이 놀렸나?’
샤르칸이 가이난도를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타자 휴게실에 있던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신기해했다.
“저거 그 뼈로 된 소환수야?”
“어떻게 완성시킨 거지?”
“저번보다 훨씬 보기 좋은걸. 이것도 먹어볼래?”
친구들은 가이난도를 깔고 앉은 샤르칸에게 먹을 걸 하나씩 던져주었다.
샤르칸은 신이 나서 덥석덥석 받아먹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풀... 풀어줘...”
그르르릉!
“아, 아니. 안 풀어줘도 돼.”
샤르칸이 화를 내자 가이난도가 급히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샤르칸은 가이난도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컹! 컹컹컹!
“???”
샤르칸이 밖을 보며 짖자 이한은 본능적으로 지팡이부터 붙잡았다.
휴게실 안이라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법학교에서 휴게실 안이라고 안심하고 있다가는 복면 쓴 다른 탑 학생들이 쳐들어와서 깃발을 뺏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철컥!
휴게실 정문이 열리더니 어디서 본 적 있는 스켈레톤 전사들이 불쑥 나타났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등장에 학생들은 경악했다.
“학... 학교 망했나?!”
“그럴 리가 있나! 번쩍여라!”
이한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지팡이를 휘두르자 번개가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며 날아갔다.
앞에 나타난 스켈레톤 전사가 그대로 얻어맞고 가루로 변했다.
“자고 있는 애들 깨워라! 교장 선생님이 우릴 공격하려고 한다!”
“왜... 왜?!”
“그건 나도 모르...”
이한은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설마 지금 쪽지시험 보기 전날에 공부 못하게 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놀랍게도 본능은 그게 사실일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어쨌든 다들 모여! 휴게실 문을 막아!”
“알, 알겠어!”
이한은 물 구슬을 띄운 다음 연속으로 날려서 스켈레톤 전사들을 밀어냈다.
그 사이 다른 친구들이 재빨리 소파와 의자를 갖고 휴게실 정문 앞을 막기 시작했다.
창문을 확인한 아산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언데드들이 횃불 들고 탑을 포위하고 있어!”
‘환장하겠군.’
컹! 컹컹!
이한은 샤르칸을 쓰다듬어주었다. 샤르칸이 아니었다면 지팡이를 잡기도 전에 공격을 당했을 것이다.
“샤르칸. 대기하고 있다가 들어오는 놈 있으면 쫓아내버려. 다들 바리케이드 치는 걸 도와라!”
부스스한 머리로 내려온 황녀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진흙이 바리케이드 위로 겹쳐지더니 단단하게 결속시키기 시작했다.
요네르는 만들어 놓은 물약들을 친구들에게 던져주었다. 가이난도는 간식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재빨리 치워놓았다.
쿵, 쿵, 쿵-
자고 있던 다른 친구들도 내려오고 휴게실 문 앞에 바리케이드도 일단은 완성이 되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학생들은 몸서리를 쳤다.
“대체... 이게 무슨...?”
무쇠대가리들아... 문을 열어다오...
“......”
“......”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색하고 바리케이드를 더 쌓아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