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할 말을 마친 해골 교장이 여명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지자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사라지는 척하고 투명 마법 건 다음 주변에 숨어 계시는 거 아니야?”
“근처에 숨어 있을 수도 있어! 혹시 모르니까 돌멩이 던져봐!”
‘마법학교가 제국의 인재들을 망치고 있군.’
이한은 음모론에 빠지기 시작한 친구들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안타깝군. 불사조 탑은 붙잡힌 학생들이 있어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한 명도 붙잡혀서 끌려가지 않았기에 만점이었지만 불사조 탑은 아니었다.
탈출하면서 붙잡힌 사제들이 몇 명 있어서 점수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가르침이 중요하지, 점수가 중요한 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티질링 사제는 경건한 태도로 말했다. 이한은 그 모습에 경악했다.
‘점수가 중요하지 않나?’
결국 기록으로 남는 건 점수 아닌가.
그리고 가르침도 가르침 나름이지 이런 강의에서 무슨 가르침이 중요하단 말인가.
‘리치랑 어울리지 마라’나 ‘사람 함부로 믿지 마라’, ‘밤에 잘 때 언데드 조심’처럼 부스러기 같은 가르침밖에 남지 않았다.
“으응... 그렇지. 가르침이 중요하지.”
이한의 대답이 이상하게 늦게 나오자 티질링은 의아해했다.
왜 늦게 대답하시지?
“참.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에 사제님들이 학교로 찾아오십니다.”
“!”
이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국 교단의 사제들이 학교로 찾아오면 단순히 먹고 마실 걸 나눠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골 교장의 지ㄹ... 아니, 해골 교장의 난이도 있는 가르침이 조금 줄어드는 것이다.
제국의 양심들이 학교를 개선한다!
‘이번 주말에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게다가 이한은 프리싱가 교단뿐만 아니라 들어갈 수 있는 교단은 가능한 모두 들어가기로 결심한 사람.
사제님들이 이번 주말에 찾아와주신 이상 직접 방문해서 새로운 교단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워다나즈 가문은 왜 다른 귀족 가문들 다 하는 후원을 안 해서.’
이한은 속으로 불평했다.
요네르의 가문, 메이킨 가문을 보라!
플레맹 교단에 열심히 후원해서 가문의 핏줄들이 혜택을 보지 않던가.
안 믿어도 후원 좀 하면 안 되나?
‘불평해봤자 의미 없다. 내 길은 내가 만든다.’
가문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이한은 이한의 길을 갈 뿐.
이한은 티질링 사제를 쳐다보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시선에 티질링 사제는 살짝 긴장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티질링 사제. 못 본 사이에 비쩍 말랐군.”
“......”
아닌데요?
“하루도 안 지났는데 비쩍 마를 리가 없습니...”
“푸른 용의 탑에 온 김에 뭘 좀 더 먹고 가야겠어.”
“......”
주기적으로 불러내서 ‘고기국물이 들어간 차를 냄비에 좀 담아왔는데’하면서 먹이는 이한 덕분에 티질링은 영양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못 먹어도 그렇지 사람이 만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마를 리가 없지 않은가.
“자. 가서 앉도록.”
“프리싱가 님을 모시는 사제가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는 건 죄악입니다만...”
“그렇군. 하지만 먹지 않는다면 가이난도를 같이 굶기겠다.”
“?!”
옆에서 바리케이드 치우던 가이난도는 갑자기 튄 불똥에 충격 받은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난 왜?!
“사제님...! 저는 한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픈데...!”
“......”
티질링은 얌전히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한은 해골 교장처럼 냉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제들도 자리에 앉혀야겠군.”
“하지만 탑의 사제님들은 대부분 다 검소하셔서 이런 식사를 죄악으로 여길 겁니다.”
티질링 사제는 살짝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티질링 사제... 가이난도로 협박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정말로 아닌 것 같지는 않았다. 가이난도가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식사는 정말로 검소한 편인데....”
“......”
“......”
지나가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가이난도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진짜 검소한 식사를 벌써 까먹은 건가?
“다들 이런 식사를 부담스러워할 수 있긴 하겠군.”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한이 식재료가 남아돌아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흰 호랑이 탑과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과는 관계가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퍼뜨린 근거 없는 헛소문 때문에 이한을 오해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현명하고 선량한 불사조 탑의 사제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헛소문에 속지 않고 이한을 믿어 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푸짐하게 식사 대접을 받으면 주말에 찾아올 사제들한테도 좋은 말을 전해줄 것 아닌가.
불사조 탑 학생들이 좋든 싫든 그들은 먹어야 했다. 이한의 눈동자가 냉혹한 의지로 빛났다.
“가이난도. 따라와라. 네가 설득을 도와줘야겠다.”
“??”
“......”
가이난도는 이한이 왜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티질링 사제는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 * *
이한은 식료품 창고 안에 쌓아놨던 음식들을 꺼냈다.
버터를 발라서 데운 흰 빵과 함께 찍어먹을 수 있는 벌꿀과 달콤한 나무 수액이 상 위에 올라왔다. 통째로 굽거나 소금에 절인, 아니면 연기로 훈제한 돼지고기와 소고기들도 그 옆에 놓였다. 통조림에 들어 있는 생선들도 얇게 저며진 상태로 접시에 올라갔다.
우레걸음 교수의 오두막에서 훔친, 아니 빌린 신선한 우유 항아리도 꺼냈다.
각종 과일 잼이 든 유리병에서 잼을 덜어낸 다음 차가운 우유에 넣고 휘휘 저어서 음료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마시기 힘든 귀한 단 음료였다.
“이런 게 있었어?!”
“평소에는 해달라고 해도 안 해주니까 해달라고 하지 마라.”
‘어떻게 알았지?!’
먼저 하나 집어먹으려는 가이난도의 손등을 때리고 물러나게 한 다음 이한은 수프를 확인했다.
팔팔 끓는 진한 국물의 향기가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샤르칸.”
이한은 샤르칸에게 고깃덩이 하나를 던져줬다. 가이난도는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샤르칸이 그르렁거리며 노려보자 눈을 깔았다.
“거의 다 됐군. 다들 앉으라고 해라.”
고기를 요리하면서 나온 육즙도 이한은 알뜰하게 사용했다. 직접 재배하고 있는 야채들을 넣고 볶은 다음 밀가루를 풀어 소스를 만들었다.
‘괜찮군.’
맛을 본 이한은 스스로의 재능에 감탄했다. 고기를 요리하면서 나온 육즙을 이렇게 잘 활용하다니.
이건 분명 텃밭에서 가져온 싱싱한 야채들과 참으로 잘 어울릴...
‘...그만 생각해야지.’
이상하게 마법 실력은 그렇게 빨리 느는 것 같지 않은데 요리 실력은 점점 일취월장하는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과 준비를 돕고 있던 요네르가 옆에서 구워지고 있는 당근 컵케이크와 단호박 쿠키를 보며 의아해했다.
“이건 어디서 났어?”
“텃밭에서 가져온 걸로 만들었는데.”
“......”
“...이건 딱히 전문적이거나 어려운 요리가 아니다. 요네르. 생각보다 쉬운 요리야.”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갑자기 변명하는 이한의 모습에 요네르는 당황했다.
“알겠지?”
“응, 으응.”
뭐가 알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네르는 이한의 박력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한은 요리에 진심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았다.
...요네르가 보기에 저 정도면 매우 진심이었지만...
* * *
협박 때문에 앉긴 했지만, 밤새 싸운 어린 사제들은 따끈따끈한 식사를 먹자 감동했다.
볼이 터질 정도로 음식을 우겨넣은 학생의 모습에 이한은 뿌듯함을 느꼈다.
‘아니군. 가이난도였군.’
자세히 보니 불사조 탑 학생이 아니라 가이난도였다.
다행히 불사조 탑 학생들도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말소리 하나 없이 접시와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분주하게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주말에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한은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귀족다운 위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사제들은 그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주말에 교단 사제님이 학교에 방문한다고 하셨는데,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이 해주신 것들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군. 한다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
상대가 머뭇거리자 이한은 당황했다.
왜지?
‘설마 워다나즈 가문, 블랙리스트라도 올라갔나??’
가주가 제국 교단들에 대해 말했던 걸 보면 교단들이 워다나즈 가문을 싫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면 사제님께서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을 직접 뵙고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하실 텐데... 이미 너무 충분히 바쁘신 것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주말에는 쉬시는 게...”
“난 조금도 바쁘지 않다. 오히려 주말마다 너무 한가한 게 고민이지.”
“그, 그러신가요?”
불사조 탑의 어린 사제들은 이한의 말에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엄청나게 바빠 보이는 사람인데...
저 얼굴로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니 거짓말이나 농담 같지 않았다.
‘그런가?’
‘진짜 그러신 거겠지.’
* * *
“흑마법?”
가르시아 교수의 질문에 이한은 손을 들었다.
“소환마법?”
다음 질문에도 이한은 손을 들었다.
“환상마법?”
이한은 또 손을 들었다.
그러다가 옆쪽에 앉아 있는 불사조 탑 학생들과 눈을 마주쳤다.
“...난 조금도 바쁘지 않다. 알겠나?”
“바... 바쁘신 것 같은데요.”
“이한... 넌 바쁜 게 맞아... 좀 줄여야 해.”
불사조 탑 학생들뿐만 아니라 푸른 용의 탑 친구들도 경악한 표정이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쪽지시험을 보기 전에 학생들의 관심분야에 맞춰서 시험 볼 사람을 나눴다.
그리고 이한은 모든 분야에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었다.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에도 넌 너무 가혹하다. 워다나즈.”
“내가 보기에도 좀...”
검은 거북이 탑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까지 끼어들었다.
그러나 이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여유가 있다.”
“이한 학생은 좀... 줄여야 할 것 같은데요...”
가르시아 교수가 걸어오면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새가 가장 빨리 죽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는 천재는 그 재능에 삼켜지는 걸 주의해야 했다.
“저도 직접 경험해봐서 조언하는 거예요. 이한 학생. 모든 마법 분야를 탐구해보는 건, 재능과 포부를 가진 야심 있는 어린 마법사가 겪는 당연한 운명이지만...”
‘문장의 모든 단어가 나하고는 반대인 것 같은데.’
“정말 힘들거든요.”
“교수님께서도 이한처럼 여러 마법을 같이 배우셨나요?”
“그런 적이 있었죠.”
“그러면 이한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 그렇긴 한데요...”
가르시아 교수는 가이난도의 허를 찌르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어라?
그런가?
자신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생각해봤을 때, 학생이 그 길로 걷는 걸 말려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가르시아 교수에게 그럴 권리가 있나 싶었다.
더군다나 이한 같은 재능을 타고난 마법사라면 더더욱.
“음... 그래도 저 때는 배그렉 교수님 같은 분은 없...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르시아 교수는 학생들한테 다른 교수의 험담을 할 수 없어서 급히 멈췄다.
하지만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바로 이해했다.
“하긴 이한 학생은 나보다 나으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겠어요.”
가르시아 교수는 힘내라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어서 흔들어주고는 걸어가 버렸다.
이한은 그 모습에 갑자기 자신이 무언가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이유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