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무례한 말이었지만 가르시아 교수는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해골 교장과 볼라디 교수 중 누가 더 친한 학생 없는가로 승부한다면 아주 치열한 승부가 될 터.
“글쎄요.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데요?”
배그렉 교수도 이번에 축제 때 뭔가 맡을 텐데, 저렇게 지나가는 걸 보니 걱정이 되는군.
“알아서 잘 하시겠죠.”
아니. 내 말을 오해하고 있소. 가르시아 교수.
해골 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배그렉 교수는 친한 학생이 없어서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을 부를 가능성이 높잖소.
“...아.”
가르시아 교수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친한 학생이라고는 이한밖에 없는 해골 교장이 그런 것처럼, 볼라디 교수도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이한 학생한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양보하시는 건 어떠세요?”
잘 못 들었소?
“교장 선생님께서 양ㅂ...”
다시 들어도 안 들리는구려. 뭐라고 하셨소?
“...그래요. 양보를 하실리가 없지요.”
배그렉 교수! 배그렉 교수!
해골 교장은 저 멀리 지나가려는 볼라디 교수를 불러왔다. 창백한 뱀파이어 마법사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오. 이해가 가시나?
“교장 선생님께서 양보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하하하... 개소리하지 마시오.
“저는 개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타협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두 마법사의 대화에 가르시아 교수는 벌써부터 두통이 올라왔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둘은 싸우지 않았다.
그러면 타협하는 게 어떻겠소? 반으로 시간을 나누면?
“좋습니다.”
“......”
맹수들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법.
교장과 볼라디 교수는 빠르게 합의를 보았다.
그 맹수들에게 물릴 초식동물만 불쌍하게 된 셈이었다.
잠깐. 저기 우레걸음 교수도 지나가는데...
“우레걸음 교수님은 친한 학생들 많으니 그냥 제외시키세요!”
가르시아 교수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아무리 그래도 삼등분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 *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정이 추가되었다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한 채 이한은 아산과 고민에 잠겼다.
알펜 교수는 ‘간단한’ 마법진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당연히 교수 기준이었고 이한과 아산에게는 별로 간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완성했을 경우, 복도 양옆에 일정한 간격으로 빛의 구체를 띄우고, 중앙에는 환상으로 만든 조각상을 보여주는 거지?”
“그런 것 같군.”
교수가 준 책을 읽은 아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워다나즈. 나이튼 교수는 100% 미친놈이야.”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입이 거칠어진 것 같군.’
하지만 아산이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신입생 둘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난이도의 마법진이었던 것이다.
이한은 그냥 빛의 구체는 이한의 마력으로 때우고 조각상은 실제 조각상을 가져다 놓으면 안 되나 싶었다.
<제국 연회용 간이 마법진 설치 제작 사양서>
말재간이 서투른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화려한 마법은 연회에서 그나마 부족한 사교 능력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다.
몇몇 어리석은 마법사들은 연회에 참석하고 인맥을 쌓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만 이는 실로 짧은 생각일지니, 귀족들에게 후원금을 받아내는 것은 마법사에게 중요한 능력이다.
여기 한 일화를 들어서 그 중요성을...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치고는 흥미진진하다.’
마법사들의 책은 간단한 내용이라도 절대 간단하게 요점만 써놓지 않았다.
자기 신변잡기 좀 쓰고, 어제 뭐 먹었는지도 좀 쓰고, 오늘 날씨 어땠는지 좀 쓰고, 다른 경쟁자 욕 좀 쓰고, 그런 다음에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알펜 교수가 준 책도 그런 편이었지만 내용은 상당히 공감이 갔다.
‘귀족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방법이라...’
마법 연구를 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제국의 학문 중 가장 비싼 학문이 바로 마법이었다.
당장 시약들 중 희귀한 건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뛰는데다가 희귀한 유물들 같은 경우에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이런 돈을 누가 댈 수 있겠는가. 바로 돈 많은 귀족들이나 부자들이었다.
이한이 연구에 진지한 뜻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돈을 뜯어내는 데에는 상당히 진지한 편이었다.
‘환상 마법으로 감탄시키고 춤... 음악... 문학... 예술... 음... 더 쉬운 방법은 없나?’
“워다나즈?”
“아. 미안하군. 집중하느라.”
이한은 정신을 차렸다.
아산이 깃펜을 끄적거리며 고민에 잠겨있었다. 사양서를 다 읽는다고 문제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도식을 작성하고 두 마리 사향쥐만큼의 마력을 흘려보내라. 그리한다면 원활하게 작동하리라. 빛 원소 속성을 가진 마력석을 배치하되 그 마력이 지나치게 높아서는 아니 된다. 주변 환경에 따라 마력의 흐름이 끊길 때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시약들을 아주 약간 집어넣어서 해결할 수 있...
온갖 비유와 자기만 아는 설명들인 만큼 다 읽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직접 해봐야했다.
교수에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세상을 저주하는 아산과 달리 이한은 묵묵히 준비를 시작했다.
이한에게 있어서 이런 불합리는 이미 숙명 같은 것이었다.
“준비하자.”
“...네가 도와줘서 정말 다행이다. 워다나즈.”
아산도 기운을 차리고 주섬주섬 준비를 시작했다.
빛 속성의 마력 전도율이 높은 광령묵(光靈墨)으로 바닥에 흰 선을 그리고, 조금씩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마력이 부족하면 선을 타고 흐르다가 멈추고, 마력이 넘치면 선 자체가 파괴되는 만큼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컥.”
아산은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옆으로 쓰러졌다. 벌벌 떨면서 아산은 외투 속에서 물약병을 꺼냈다.
우레걸음 교수 시간에 만든 하급 마력 회복 물약이었다.
“워... 워다나즈. 내가 쓰러지면... 나 대신 나이튼 교수에게 원수를 갚아줘...”
“쉬고 있어라.”
이한은 아산을 옆에 눕혀놓고 혼자 테스트에 나섰다.
마력이 많다는 건 꼭 단점만 있지는 않았다.
이런 단순반복작업 때 다른 마법사들이 마력 부족으로 강제 휴식을 취해도 이한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 외로운 기분이 들지? 이상하군.’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고, 이한은 마력을 반복해서 투입하며 조금씩 마법진을 완성해나갔다.
달칵-
“?”
이한과 아산은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교수님이십니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황녀 아덴아르트였다.
긴 은발을 갖고 있는 황실의 핏줄은 추종자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강의실 안의 상황을 보고 놀라워했다.
“워다나즈 님!”
“반갑다.”
“주말에 뭘 하고 계시는... 아앗!”
추종자 중 한 명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하고 계시는 거였군요. 감탄했습니다.”
“......”
“...아니야! 눈이 없나!”
아산이 발끈했다.
물론 이한이 푸른 용의 탑 학생들 중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누가 좋아서 이걸 하고 있겠는가.
“교수님이 시켜서 하는 거다!”
“교수님께서요? 어째서?”
“친구분이 오시는데...”
아산의 설명에 황녀의 추종자들은 주의 깊게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감탄했다.
“대단하십니다!”
“...으음. 대단한 게 맞긴 한데.”
아산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대꾸하진 못했다.
사실 대단한 게 맞긴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황금 같은 주말에 이러고 있으면 대단이고 뭐고 간에 나이튼 교수 낯짝에 매직 미사일을 날리고 싶어지는 법이다.
“앗. 워다나즈. 좋은 방법이 생각났는데, 혹시 들어주겠나?”
“말해봐라.”
“저기 저 황녀님하고 친구들을 동원하는 거야.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어? 내 생각에 96% 확률로 도움이 될 거다.”
“오... 하지만 안 된다.”
이한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아산은 당황했다.
“어째서?”
“그야...”
이한이 이 주말에 학교를 탈출할 방법을 찾는 대신 아산을 돕는 이유는 간단했다.
교수와 교수 친구의 눈에 들기 위해서 아닌가.
하지만 황녀가 같이 참가한다면...
-아니, 저 분은? 황녀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역시 명성에 걸맞은 능력을 갖고 계시는군요. 아직 신입생인데 이런 정교한 마법진을 완성시키시다니!
...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수많은 황족들 중 아덴아르트는 상당히 명성이 드높은 편이었으니 제국 관료들이 모를 리 없었다.
‘미안하군. 내 출세를 위해서 황녀는 이 귀찮고 지겨운 작업에 참가할 수 없다.’
“...교수님께서 우리 둘에게 맡긴 일이니까.”
“크윽. 그렇군.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아산은 이한의 뜻을 존중했다.
주말을 버리고 돕기 위해 온 친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누구의 말을 듣겠는가.
그러나 일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저. 워다나즈 님.”
“?”
“황녀님께서 돕고 싶다고 하시는데, 같이 도와드려도 될까요?”
“......”
이한은 당황했다.
아니 이걸 왜 돕고 싶어 하지?
‘이게 재밌어 보이나?’
가이난도 같은 황족이었다면 마법진만 봐도 심부름하기 싫어서 도망쳤을 텐데 이걸 하고 싶어서 접근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산이 나서줬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건 우리 둘에게 맡기신 일이니까.”
“달카드 님. 워다나즈 님의 생각은 다르실 수도 있잖습니까.”
“워다나즈의 뜻도 나하고 비슷할 거다.”
황녀는 아산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별로 좋은 뜻은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눈으로 욕하던 황녀는 추종자에게 속삭였다. 말을 다 들은 추종자가 다가왔다.
“워다나즈 님.”
“왜 그러지?”
“그... 황녀님께서 간식을 드릴 테니 작업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셨습니다.”
“그, 그런!”
아산이 더 놀랐다.
간식을 주겠다니!
상상도 못한 각오였다.
“워다나즈. 저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
‘얘가 아직 마력 회복이 덜 됐나?’
비장하게 말하는 아산을 보며 이한은 어이없어했다.
마력 부족으로 인해 지능이 살짝 내려간 것 같았다.
‘으음.’
이한은 고민에 잠겼다.
‘여기서 거절하면 황녀가 원한을 품겠지.’
원래 신분 높게 태어날수록 속이 좁기 마련이었다. 가이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이난도와 달리 황녀는 주변 사람들이 많았다.
이한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꼬이게 만들 수 있는...
‘비겁한 황족들 같으니.’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지나가던 알펜 교수가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다른 친구들이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한은 말하면서 살짝 기대했다.
꼬장꼬장한 알펜 교수 성격에 이런 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던 것이다.
쫓아내주십시오!
“훌륭하네.”
알펜 교수는 이한을 보며 엄격한 표정을 풀고 살짝 미소지었다.
“예?”
“다른 친구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다니. 좋은 친구들을 가졌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능력일세. 이렇게 된 이상 다른 학생들을 지휘해서 한 번 만들어보게. 여럿을 지휘하는 것도 능력이니 말이야.”
알펜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가버렸다. 아산은 이한을 보며 말했다.
“저렇게 말하시는 거 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워다나즈. 괜찮겠지? 참가시켜도?”
“아산.”
“??”
“기숙사 가서 쉬고 있는 놈들을 더 데리고 와야겠다.”
“그... 그렇게까지??”
아산은 놀랐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정말 철두철미하다. 나도 배워야겠어.’
‘저렇게 말하신 이상 숫자를 늘려서 더 높은 평가를 받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