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푸른 용의 탑에 도착한 이한은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말했다.
“내가 지금 아산과 같이 하는 일을 도와준다면 너희 모두에게...”
“그러지 뭐.”
“가자.”
친구들은 이한이 보상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책을 덮고 체스 말을 내려놓았다.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주말에 지루한 작업이 될 텐데 괜찮나?”
“워다나즈 너는 평소에도 그런 걸 다 하잖아.”
“......”
친구들의 따뜻한 말에 이한은 살짝 감동했다.
마법학교는 이런 학생들을 데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가이난도는 어디 있지?”
“위에서 쉬고 있는데... 워다나즈. 가이난도는 안 오지 않을까?”
친구들은 가이난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성격에 주말 작업이라니.
절대 참가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가이난도는 참가해야 한다.’
이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알펜 교수의 친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푸른 용의 탑 학생들 중에 황자까지 있다면 이한의 능력은 더 높게 평가받으리라.
“걱정 마라.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이한은 가이난도를 불러냈다.
자신의 개인실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가이난도는 의아해하며 내려왔다.
“왜? 무슨 일이야?”
“미안하게 됐다. 가이난도.”
이한은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난도는 그 말에 겁에 질렸다.
“나... 나 징벌방 가냐?”
“아니. 그건 아니고.”
“휴...”
“지금 다른 친구들하고 마법진 작업하러 갈 생각이다. 그런데 넌 참가할 수가 없게 됐어.”
“그런... 그런?”
가이난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거 아닌가?
‘아차. 티를 내면 끌려갈지도.’
가이난도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여기 이 친구들은 가이난도가 쉬는 걸 싫어하는 못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미안하다. 너도 참가시켜주고 싶었는데.”
“그, 그래.”
“그러면 잘 쉬고. 다시 한 번 미안하다. 가이난도.”
“...잠깐만. 잠깐만.”
가이난도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이한을 붙잡았다.
원래 관심이 없었는데 이한이 계속 미안해하자 괜히 관심이 생겼던 것이다.
혹시 뭔가 있나?
“이한. 그 마법진 작업에... 참가 못 시켜주는 게 왜 미안한 건데?”
“그렇게 재밌는 일에 친구를 참가시켜주지 못하는데, 당연한 거지.”
“재밌다고?”
“그래.”
“...??”
가이난도는 순간 이한이 이상해진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한은 원래 저런 친구였다.
이상할 정도로 공부를 좋아하는 친구!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있나.’
아쉽게도 가이난도는 이한을 낫게 해줄 수 없었다. 가이난도는 포기하고 이한을 보내주려고 했...
“맞아. 정말 미안해. 가이난도.”
“우리도 널 꼭 참가시켜주고 싶었는데...”
“???”
그러나 다른 친구들까지 저렇게 말하자 가이난도는 혼란에 빠졌다.
혹시 가이난도가 모르는 사이에 마법진 작업이 신입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놀이가 된 걸까?
“재밌다고? 진짜로?”
“가이난도... 아직도 모르는 거야? 마법진 작업이 얼마나 재밌는지?”
요네르가 경악한 표정으로 가이난도에게 말했다.
가이난도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당연히 알지!”
“......”
“......”
친구들은 순간 가이난도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황자는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왜 못 데리고 가는 건데?”
“황녀의 추종자들이 있다. 네가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더군.”
“무... 무슨! 이한! 그런 나쁜 놈들의 협박에 넘어가면 어떡해!”
가이난도는 얼굴도 모르는 황녀의 추종자들에게 분노했다.
물론 아덴아르트가 가이난도보다 명성이 높고 마법도 잘하고 학문에도 뛰어났으며 여러 교양에도 능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가이난도보다 나은 게 딱히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감히 가이난도를 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다니!
“그런가?”
“이한. 넌 그런 친구가 아니었잖아. 누군가 너한테 시비를 걸면 흠씬 두들겨 패주던 게 너였잖아!”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
“아니야! 이런 건 너답지 않아!”
“그런데 너 별로 관심 없지 않았나?”
“나 마법진 작업에 관심 많아! 하고 싶어!”
“그래? 알겠다. 내가 한 번 강하게 말해보도록 하지.”
이한의 말에 가이난도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마워!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신나서 달려가는 가이난도의 모습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한을 감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 * *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작업이 압도적으로 빨라지진 않았다.
마력이 고갈된 학생들은 강의실 옆으로 가서 하나둘씩 드러누웠다.
마법진의 1/3 정도가 완성되었을 때 결국 남은 건 이한 혼자밖에 없었다.
“......”
‘다들 마력 너무 적은 것 아닌가?’
하지만 투덜거린다고 친구들의 마력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이한은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어느새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제법이군.”
“??”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에 온 만큼 알펜 교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교수님이십니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
이한은 수수께끼 같은 상대의 대답에 의아해했다.
어떤 면에서는 교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아하. 알겠다.’
그러나 숙련된 학생인 이한은 바로 알아차렸다.
“교수님의 직속 제자로 일하시고 계신가보군요.”
고학년이 되어서도 마법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은 심오한 마법의 세계를 조금 더 깊게 탐험하기 위해 교수와 같이 연구하곤 했다.
교수의 직속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직속 제자들은 스승과 같이 지내면서 비전을 이어받고 마법의 세계를 탐구해나갔다.
그리고 스승이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도 가끔은 대신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거나...
이제 그러면 교수이되 교수가 아닌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아니야!”
“아니십니까?”
상대는 이한을 황당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누가 누구의 제자란 말인가.
* * *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마법학교 에인로가드는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한 뜨내기 마법사들에게는 선망의 장소.
다른 마법학교 출신 마법사들에게는 질투의 장소.
그리고 제국 관직에서 일하고 있는 마법사들에게는...
“황금을 대체 얼마나 뜯어가는 건지 모르겠군.”
“제국의 동량을 키우는 곳 아닙니까.”
“나도 마법사다! 아무리 뛰어나도 그렇지 아직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그렇게 많은 황금이 들어갈 리가 없잖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사들의 자기 연구를 위한 황금이겠지!”
제국 상급 회계관, 켄드리 바쿠는 호위들에게 불평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친구인 알펜 나이튼 교수한테 초대를 받아 마법학교로 가고 있었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마법학교에 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켄드리는 자기 눈으로 직접 마법학교를 한 번 볼 생각이었다.
마침 마법학교가 봄 축제 기간인 만큼, 손님이 찾아와서 둘러보기 좋을 때였다.
“약속했던 것보다 며칠은 일찍 도착하셨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래. 그리고 일부러 그런 거다.”
켄드리가 도착하는 날짜를 속인 건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정해진 날짜에 도착하면 능구렁이 같은 마법사들이 책잡힐 만한 일들을 싹 다 숨겨놓지 않겠는가.
정해진 것보다 미리 도착하는 게 좋았다. 친구긴 했지만 알펜은 거짓말이나 속임수에 서툴렀다. 켄드리가 부탁을 해봤자 들킬 가능성이 높았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은 마법에 대한 굶주림을 키우기 위해 신입생 때부터 혹독하게 단련시킨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켄드리를 따라 들어온 호위가 푸른 용의 탑 학생 한 명을 보며 말했다.
간식까지 들고 다니는 걸 보면 소문이 아무래도 좀 과장된 것 같았다.
“이번 주에 사제들이 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얼굴을 보니 제법 괜찮게 먹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옷도 그렇고요.”
“흐음... 그렇군. 일리가 있어.”
켄드리는 호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사제들이 왔다고 해서 빠진 살이 바로 찌지는 않았다. 게다가 학생이 입고 있는 옷도 제법 괜찮은 옷이었다.
‘들은 것보다 학생들이 훨씬 더 괜찮게 지내는 것 같군. 과장된 소문이었나?’
켄드리는 이래서 금화가 더 들었나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걸 감안해도 너무 많은 양이었다.
“들어가도록 하지.”
“예.”
켄드리는 기숙사 탑 주변을 돌고 본관 강의실도 둘러보았다.
신기하게도 주말인데 강의실에 나와서 마법을 연습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호위는 감탄했다.
“역시 에인로가드입니다. 학생들이 다들 열정적입니다. 이런 시간까지 남아서 연습할 줄이야.”
“그런데 왜 저렇게 누워 있는 겁니까?”
“마력 부족 때문이겠지.”
켄드리는 신입생들이 왜 강의실 안에 널브러져있는지 잘 알았다.
마력 훈련이 덜 된 풋내기 마법사들은 마력 부족을 자주 겪었다. 아마 마법진을 만들다가 실수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학생 한 명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마법진을 그리면서 마력을 완벽하게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진의 어떤 부분에 어느 정도 마력이 들어갈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무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분명 저 학생은 몇 달 동안 저 마법진을 준비하면서 설계도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꿈에도 나올 정도로 탐구했으리라.
켄드리는 옛날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제법이군.”
* * *
“아. 교수님의 친구셨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한은 상대가 누군지 듣자 매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펜 교수의 친구여서는 아니었고, 상대가 제국의 고위 관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지?’
“이야기를 들었다고?”
“예. 지금 이 마법진도 손님에게 보여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만.”
“알펜답군. 괜히 고생시켜서 미안하게 됐다.”
켄드리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미안해했다.
“이 정도면 학기 시작하자마자 준비했겠는데.”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만.”
“어느 정도 걸렸지?”
켄드리는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마법진의 난이도와 지금까지 완성된 정도, 그리고 아까 이한이 진행하는 속도를 봤을 때 학기 시작하자마자 준비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한은 잠깐 고민했다.
‘하루 걸렸다고 성의 없어 보이진 않겠지.’
“오늘 시작했습니다만.”
“......”
켄드리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지팡이를 순간 놓쳤다.
“오늘?”
“예.”
“혹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가?”
“맞습니다.”
이한은 대답하면서 속으로 알펜 교수한테 감사해했다.
강의 시간에 졸지 않고 집중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저렇게 친구한테 이한의 이름을 말해주다니.
이한은 너무 서두르지도, 너무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최대한 겸손하게 가능성 넘치는 마법사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알펜이 칭찬을 너무 과하게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그럴 이유가 있었군.”
하루 만에 이 정도로 완성시키다니.
마법진을 미리 공부했다고 쳐도 천재적인 재능이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인 만큼 더더욱.
‘알펜이 뛰어나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어.’
“하긴, 마법학교가 이런 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있는 거지. 제국의 관직은 둔재도 할 수 있지만, 마법의 연구는 천재만이 가능한 일이니까.”
“저는 제국 관료도 연구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데 별난 소리를 하네. 고맙다. 네가 관직에 오면 잘 어울릴 텐데 말이지.”
이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농담이야. 너 같은 천재는 연구를 해야지.”
“...저 관직도 잘 할 수 있습니다만.”
“물론 그렇지. 하지만 재능 낭비잖아.”
“...별로 재능 없습니다. 저 마법진도 작동될 때까지 마력 계속 투입해서 만들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
“될 때까지 계속 마력 넣어서 확인해가며 만들고 있다고...”
켄드리는 그 말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했다.
마법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저런 식의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없었다.
저렇게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는 건 마법진을 본 지 얼마 안 됐다는 것.
그런데도 저 정도나 완성했다니.
어마어마한 마력을 타고난 것뿐만 아니라 마법진에 대한 감각이 천부적으로 뛰어난 게 분명했다.
“정말 천재적이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