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그런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고 볼라디 교수는 말했다.
“아귀(餓鬼). 하급이군.”
희미한 불빛으로 비춰진 지하 던전의 통로 끝에서,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어둠을 온몸에 휘감고 올라온 듯한 망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귀라고 불리는 몬스터였다.
마법사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은 언데드 몬스터는 피부 위로 느껴질 정도로 날것의 살의를 드러냈다.
-■■■!
그 순간 볼라디 교수가 불러낸 마법의 불빛이 꺼졌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당황했겠지만 이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주문을 외웠다.
“빛이여.”
볼라디 교수가 언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 각오를 다진 상태였던 것이다.
이한이 즉시 불빛을 불러오자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좋은 판단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교수아귀는 없나?’
아귀는 죽은 자가 생전에 쌓은 죄악과 악행으로 인해 변이된 언데드 몬스터.
그렇다면 교수아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긴 교수아귀가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무서울 테지만...
“샘솟아라.”
이한은 방금 전 발광 주문보다 한 단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외웠다.
던전에서 목소리를 높여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빠르게 파악한 것이다.
볼라디 교수는 속으로 높은 점수를 줬다.
기민한 반응속도와 타고난 경계심.
전투마법사라면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물의 구슬이 여러 개로 나눠지더니 그 중 하나가 아귀를 향해 살벌하게 날아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귀의 턱이 박살났다. 성큼성큼 걸어오던 아귀가 비틀거렸다.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겠군.’
마법사에게 있어서 근접전은 피하는 게 좋았다. 이한은 물의 구슬로 아귀의 무릎을 노렸다.
다른 마법사였다면 이런 식의 정밀한 조준은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한은 볼라디 교수와의 수련으로 원소 마법 통제에 있어서는 이미 이골이 나있었다.
한 방 더.
물의 구슬이 움직이는 아귀의 무릎을 정확하게 쳐서 넘어뜨렸다.
볼라디 교수는 이번에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한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밖에서 온 외부인 손님 중 한 명이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다른 어설픈 행사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되었을 테니까!
* * *
이한은 하급 아귀 하나를 다가오지도 못하게 처리했다.
그런 다음 쓰러진 아귀를 확인했다. 슬프게도 아귀는 갖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 흔한 마석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이한의 행동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볼라디 교수가 입을 열었다.
“제대로 쓰러졌는지 확실히 확인하는 건 좋은 행동이다. 그러나 몬스터한테 가까이 가는 건 불필요하다. 마법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계속 움직여라.”
볼라디 교수는 이한에게서 조금 떨어진 뒤편에서 말했다.
이한은 별 생각 없이 걸으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냥 볼라디 교수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할지도 몰랐다.
애초에 볼라디 교수가 던전에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한이 물 원소 마법을 다중으로 운용해서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던전에는 다중 운용을 강제하는 함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공간이여, 인지되어라. 발이여, 땅을 주름잡아라.”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란 말이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본 다음에 날아서 건너면 됐으니까.
이한이 각종 강화 마법을 먼저 거는 걸 본 볼라디 교수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경험에서 빠르게 배우는 학생이 좋은 학생이라면, 이한은 경험으로 배우기도 전에 먼저 배우고 있었다.
어쩌면 가르치는 일의 즐거움이란 이런 걸지도 몰랐다.
‘볼라디 교수가 가만히 있으니 괜히 더 찜찜하군.’
이한은 뼛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낸 다음 집어 던졌다.
“나타나라, 뼈다귀 손이여!”
불러낸 뼈다귀 손이 저 앞으로 날아갔다.
순간 벽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에서 갑자기 아귀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은신을?!’
뼈다귀 손은 허공을 헤엄치며 아귀의 목을 조르려고 했지만 아귀의 힘이 한층 더 강했다. 순식간에 뼈다귀 손이 밀려났다.
퍽!
뼈다귀 손은 그 자체로 공격을 위한 마법이라기보다는 보조에 가까웠다.
시간만 끌어주면 충분했던 것이다.
아귀가 나타난 걸 확인한 이한은 물 구슬을 다시 날려 적을 쓰러뜨렸다.
“...은신도 할 줄 압니까?”
“아귀들의 특성은 다양하지.”
“......”
이한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철컥, 철컥-
이한이 각종 장신구들을 끼기 시작하자 볼라디 교수는 눈썹을 희미하게 올렸다.
“화염 마법.”
“예.”
“좋은 생각이다. 훌륭한 마법사는 안주하지 않지.”
물 원소에 익숙해졌다고 물 원소만 계속 사용하는 마법사는 발전하기 어려웠다.
훌륭한 마법사라면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찾아내야 했다.
‘안주하고 싶어도 안주할 틈을 안 주시잖습니까.’
이한은 속으로 생각하며 화염에 집중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물 원소와 달리, 화염 원소는 훨씬 더 집중해야 했다.
특히 조금이라도 집중을 놓쳤다가는 주변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만큼 더더욱.
이한이 화염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있을 법한 곳에는 다 쏘아보자.’
아귀라는 몬스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한에게는 방법이 몇 개 없었다.
그리고 이한이 선택한 것은 바로 물량이었다.
몬스터가 있을 법한 곳에는 전부 다 쏘아보면서 움직이겠다!
그러려면 물 원소보다는 화염 원소가 좀 더 유리했다.
화르륵!
이한 주변에서 작은 화염들이 솟아올랐다. 물 구슬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화염이 가진 속성을 생각해봤을 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 정도면 적응한 것 같군.”
“방금 시작했을 뿐입니다만?”
“던전을 통과해서 내려와라. 기다리고 있겠다.”
말과 함께 볼라디 교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
혼자 남은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욕하려다가 말았다.
목소리는 들릴지도 몰랐으니까.
* * *
팍!
사라진 볼라디 교수를 욕한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한은 입을 다물고 아귀들을 처리했다.
‘대충 어떤 식인지 알 것 같군.’
여기 볼라디 교수의 던전에 있는 아귀들은 은신을 즐겨 사용했다.
어두컴컴한 던전의 지형을 이용해 벽에 바짝 붙어있는 놈은 익숙해지니 찾기 쉬웠다.
천장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거나 아니면 고여 있는 웅덩이 속에 웅크리고 있는 놈쯤 되면 아무리 이한이라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이런 공포도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방을 향해 불꽃들이 날아갔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불꽃이라 파괴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마치 폭죽처럼 사방에 튀어나가는 불꽃이 닿기라도 하면 아귀는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것이다.
-■■■■!
튀어나오면 그 때는 바로 물 구슬을 날려서 쓰러뜨렸다.
대부분의 아귀는 불꽃으로 먼저 끌어낼 수 있었고, 그러고도 잡지 못한 놈이 있다면 다가왔을 때 공간 감지로 잡아낼 수 있었다.
정말 재수가 없어서 기습을 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빡!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러 골목에 있던 아귀를 후려쳤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물 구슬보다 더 파괴력이 있는 것 같았다.
“...!”
좁은 동굴 통로를 걸어가던 이한은 저 멀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멈칫했다.
통로 끝에 꽤 넓은 공간이 있었다. 어두컴컴해서 다 보이진 않았지만 광장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라면 이런 좁은 길을 계속해서 걸은 만큼 기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진짜 이렇게 불길할 수가 없군.’
이한은 온몸의 직감이 경고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통로 지나서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귀들이 신나서 환영을 해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안 갈 수는 없었다. 이한은 추가로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가르시아 교수는 밝은 표정으로 외부에서 온 노마법사를 안내했다.
축제 기간에 반가운 손님이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
유미디후스.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물 원소 마법의 달인으로, 유미디후스가 개발한 몇몇 마법들은 제국 마법사들이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가르시아 교수도 학창 시절에 유미디후스의 마법을 배운 적 있는 만큼 이런 노마법사의 방문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이 늙은 마법사를 그렇게 높게 평가할 필요는 없는데...”
인자한 할머니처럼 생긴 유미디후스가 소싯적에는 온갖 화려한 업적을 세운 전투마법사라는 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는 다시 한 번 존경심을 담은 눈빛으로 유미디후스를 쳐다보았다.
“마법학교는 언제 봐도 참 아름다운 곳이야.”
“풍경이 좋은 곳이죠.”
“학생들도 좋은 곳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교수들은...”
“다들 훌륭한 분이시죠.”
“그건 아니지.”
유미디후스가 고개를 저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 그런가요?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성의 문제인데... 하긴 고나달테스가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고나달테스가 모든 문제의 근원일지도 모르겠어.”
“......”
가르시아 교수는 위대한 노마법사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과, 교수로서 교장을 욕하면 안 된다는 마음이 충돌하는 걸 느꼈다.
참아야 해!
“재미있는 제자는 있고?”
“네.”
“좋은 제자를 키우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지. 나는 다른 일들은 그럭저럭 잘 해냈지만 제자를 잘 키워내진 못했어.”
유미디후스의 겸손 어린 말에 가르시아 교수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제자분들이 다들 대단하신데...”
“다들 모자랄 뿐이지. 그러고 보니 볼라디 배그렉이 여기 있나?”
“예.”
“한 번 만나고 가야겠군. 안내해주겠니?”
“물론이죠.”
가르시아 교수는 유미디후스를 안내하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 <기초 마법학대>, 아니,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시간 아니었나?
‘유미디후스 님이 강의 보고 화내주셨으면 좋겠다.’
가르시아 교수는 지하로 내려가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
“다른 곳에서 강의를 진행 중이군.”
유미디후스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바닥에 남아 있는 발걸음들이 선명하게 녹색으로 빛나며 흔적을 드러냈다.
“아하. 날씨가 좋으니 안뜰에서...”
“?”
유미디후스는 가르시아 교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볼라디가 날씨 좀 좋다고 안뜰해서 수업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닌가요?”
“던전에 갔겠지.”
“예?”
“던전 말이야. 던전. 학생의 성취가 어느 정도 도달하면 실전으로 갈고 닦는 게 빠르니까. 3학년을 가르치고 있나?”
“......”
“3학년을 가르치고 있냐니까? 4학년인가?”
충격적인 말에 정신을 살짝 놓고 있던 가르시아 교수는 유미디후스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네? 그게... 배그렉 교수님은 3학년이나 4학년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데요.”
“5학년? 5학년이면 교내보다는 교외가 좋을 텐데.”
“......”
가르시아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불안함과 초조함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왜 그러는 거지?”
“배그렉 교수님이 신입생을 던전에 데리고 간 것 같아요!”
“신입생을?”
“네!”
“능력이 대단한가본데...”
“능력이고 뭐고 그건 아니죠!”
가르시아 교수는 존경하는 노마법사에게 벌컥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