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보통 마법학교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낮에는 정문으로, 저녁 이후에는 첨탑 마구간으로 들어온다.”
“과연...”
바로 메모부터 하는 이한의 모습에,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이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지 도둑 길드 출신인지 순간 헷갈릴 뻔했다.
“하지만 마법학교에 들어올 수 있는 길들은 생각보다 많다. 너도 지하로 나간 적이 있었지?”
“예. 운이 좋았습니다.”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면 현명한 거다. 신입생에게 한 번 뚫린 길을 그대로 내버려둘 정도로 고나달테스는 안일하지 않으니까.”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 교장이 미친 사람이란 건 입학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길 중 하나가 여기다.”
번개걸음 교수는 학교 뒤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의 한 점을 잡고 빠르게 길을 그려나갔다.
간단하고 거칠었지만 어떻게 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지도였다.
-바위풀 지하동굴(동굴 주인 조심)
“가끔 교수들이 몰래 빠져나갈 때 이 동굴을 쓰곤 하지. 동굴 지하가 밖으로 연결되어 있다.”
“?”
이한은 의아해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밖에서도 학교로 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아니군. 동굴 주인이 침입자를 거르는 역할을 하는 건가.’
마법학교에서 어딘가 허술해보이고 만만해보이는 곳이 있다면 그건 그걸 관리하는 존재가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
방심하고 발을 들이는 순간 죽는다!
“동굴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건 비밀이다.”
“......”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에게 애수 어린 눈빛을 보냈다.
채찍과 당근은 학생에게만 통하는 게 아니었다. 교수에게도 통했다.
조각 같은 얼굴로 서러운 눈빛을 보내자 더욱 불쌍해보였다.
게다가 이한은 교수들 사이에서 이미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해골 교장의 마음에 들어서 괴롭힘, 아니,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널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약속을 해서 멋대로 알려줄 수 없는 거다. 동굴을 통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다른 교수들도 같은 약속을 했을 거다.”
영리하고 강력한 몬스터나 정령들은 자신의 정체나 위치를 밝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저번에 살코에게 안내 받은 3층의 ‘잊혀진 짐승 동상’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군요. 주의사항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학교 뒤져서, 어떻게든 물리 방어력 관련 아티팩트 최대한 많이 들고 가는 게 좋겠다.”
“......”
메모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그냥 첨탑 마구간이나 뚫을까?’
* * *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제국의 명사(名士)들을 보니 보잘것없는 마법사로서 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됩니다.
아침.
해골 교장은 마법학교를 찾아온 손님들 앞에 둥둥 떠서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러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원하는 게 있다면 고나달테스는 얼마든지 교활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각 탑의 일학년 학생들은 토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 저런 가증스러운...”
“쉿. 조용히 해. 크게 말했다가 징벌방 가고 싶어?”
흰 호랑이 탑 학생 몇몇이 이를 갈았다.
몇몇 분들은 마법에만 몰두해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에인로가드는 단순히 마법이라는 위대한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의 심신 모두 굳건하게 성장시켜 제국의 동량으로 만들어내는 곳!
‘예산 정말 잘 타내시겠군.’
이한은 솔직히 해골 교장에게 조금 감탄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마법사들은 자기 마법에만 몰두하느라 제자를 잘 신경 쓰지 않는다는데, 저 분은 정말 다르구나! 앞으로 이상한 헛소문이 있다면 내가 직접 반박해야겠다!’라고 속았을 터.
그런 만큼 이 봄 축제는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좋은 활력소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 다른 학년 학생들은 왜...”
자. 그러면 여기 신입생들에게 제가 선물을 하나 주려고 합니다.
해골 교장은 못 들은 척 손님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신입생들은 선물을 준다는 말에 긴장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데드들 매복해있는 거 아니야?”
“선물로 언데드 습격을...”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선물이었다.
학교 곳곳에 보물을 숨겨놓았으니, 다들 그걸 찾아보면서 봄을 만끽하렴.
“...정말요?”
“아무 함정도 없...?”
“그럴 리가 있겠냐?”
사소한 장난도 준비해놨으니, 보물을 찾을 때 더욱 즐거울 거란다.
“......”
신입생들은 사소한 장난이 어떤 건지 묻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았다.
해골 교장은 학생들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물들 중에는 외출권도 있다.
“!”
“외출권...?!”
발드로가드에서 온 학생 몇몇은 해골 교장의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외출권이 따로 필요한가? 왜?
“...저 자식, 결투 신청해버릴까?”
“참아. 손님이야.”
해골 교장의 속셈이야 어쨌든, 외출권 이야기는 보물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올려놓았다.
학생들은 벌써부터 움직이고 싶어서 움찔거렸다.
“가자!”
“속더라도 한 번 찾아보자고.”
“이한. 너도 갈 거지?”
“그래. 나도...”
가려던 이한의 어깨 위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볼라디 교수였다.
“......”
“가자.”
“...예.”
* * *
교수들의 행사는 하루 하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번 봄 축제 주간 동안에는 계속 진행됐다.
즉 이한도 매일 볼라디 교수의 천막에 참가해야 하는 것이다.
이한은 처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황제가 원망스러워졌다.
‘교수는 그냥 빼주시지...’
교수 시키면 그 일은 누가 하겠는가. 제자가 하게 됐다.
그 슬픔이 담겨서인지 이한의 물 구슬은 한층 더 날카로워지고 예리해졌다. 몇몇 동작은 볼라디 교수가 칭찬할 정도였다.
“컥!”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발드로가드의 다른 학생이 코피 흘리는 친구를 보고 항의했다.
그러자 먼저 와서 코피 흘리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대신 화를 냈다.
“물 구슬 피하는 게 장난 같아 보이나?!”
“우린 목숨 걸고 승부를 하고 있다! 외부인 주제에!”
‘이 자식들은 못된 것만 빨리 배우는군.’
이한은 흰 호랑이 탑 놈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밖에서 왔다고 이렇게 핍박하다니.
물론 외부인 손님을 물 구슬로 후드려 패고 있는 이한이 할 소리는 아니긴 했지만...
“괜찮으십니까?”
“으. 으응.”
“죄송합니다. 발드로가드의 명성을 워낙 많이 듣다 보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모자랄 테니 말입니다.”
“?”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말에 고개를 미세하게 갸웃거렸다.
그러나 발드로가드의 학생들은 이미 이한의 말에 화가 풀린 상태였다.
“그,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이라고? 다음에 3학년들끼리 모일 때 한 번 보자.”
“아니. 잠...”
이한이 해명하기도 전에 발드로가드의 학생들은 돌아가 버렸다.
‘1학년인데.’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돌아가자, 흰 호랑이 탑 학생이 코피를 슥 닦아내더니 다시 앞에 섰다.
“도전한다.”
“...그만하지 그러냐?”
“흥. 내가 두려운가?”
친구의 도발에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야. 워다나즈는 괜히 도발하지 마.”
“저 자식 물 구슬 더 늘릴 수 있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덤... 컥!”
이한은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낯짝에 물 구슬을 꽂아 넣었다.
마법전투의 핵심은 언제나 선공이었다.
* * *
오전 내내 물 구슬로 사람을 패고, 점심을 간단히 때운 다음 이한은 비블레 버두스 교수를 만나러 갔다.
비버 수인족인 교수는 나무껍질을 먹고 있다가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식사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시작하자.”
비블레 교수는 해골 교장이 단단히 못을 박은 것 때문인지 아주 평범하고 간단한 마법 폭죽만을 만들었다.
<화염 부여>나 <빛 부여>를 걸고 마무리.
이한도 몇 번 실수하고 나서는(실패할 때마다 주변을 태워먹긴 했다) 감을 잡았을 정도로 그리 어렵지 않은 마법이었다.
그러나 비블레 교수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점점 중얼거림이 늘어났다.
“만들기 싫다...”
“......”
“만들기 싫은데... 재미없어...”
‘다른 방식으로 압박을 주시는군.’
교수가 말이 없으면 그건 그거대로 무서웠지만, 말이 많아도 꼭 좋은 건 아니었다.
이한은 최대한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중했다.
‘실패할 때마다 여기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지팡이를 휘두르고, 주문을 외우고, 마법 폭죽을 완성시키고.
불편하고 어색한 공기 속에서 이한의 집중력은 더욱 날카롭게 갈고 닦였다.
이한의 장점 중 하나는 무한에 가까운 마력량.
그 마력량을 바탕으로 이한은 쉬지 않고 마법 폭죽을 만들어냈다.
신입생은 물론이고 부여 마법사들도 따라 하기 힘든 속도였다. 휴식이란 게 전혀 필요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 됐습니다. 교수님.”
“재미없... 어? 정말?”
비블레 교수는 중얼거리면서 마법 폭죽을 만들다가 고개를 들었다.
“예. 다 끝났습니다.”
이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비블레 교수는 눈을 끔뻑이며 쌓인 폭죽의 개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대단한데??”
다른 교수였다면 학생이 교수보다 더 많이 만들었다는 상황에 주목했을 것이다.
아무리 교수가 투덜거리면서 만들어도 그렇지, 신입생이 교수와 같이 시작해서 더 많이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비블레 교수는 이 지겨운 작업이 끝났다는 것만 생각했다.
“잘됐다!”
“예. 교수님. 그러면 저도 이만...”
“그러면 시간 남았으니까 다른 재밌는 거 만들어보자.”
“...어. 제가 부여 마법에 재능이 없어서 자신이...”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지?’
* * *
비블레 교수가 가르쳐 준 마법은 <하급 화염 저항>이었다.
두터운 로브 전체에 거는 이 마법은, 각종 화염 부여 마법을 배우는 초보 마법사들에게 필수적인 마법이었다.
화염 마법 관해서 걱정이 많은 이한인 만큼 이 마법이 상당히 쓸만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비블레 교수의 말이 이한을 불길하게 만들었다.
-이 마법을 익혀두면 앞으로 다른 부여 마법들을 연습할 때 도움이 될 거야.
-그렇습니까. 교수님. 그런데 저는 부여 마법에...
-알아. 알아. 재능이 없다고.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다른 부여 마법사들도 재능 없지만 하고 있거든.
-......
사실 교수와 같이 마법 폭죽을 만들기 시작해서 더 많이 만들고, 3서클 마법인 <하급 화염 저항>을 정해진 시간 내에 어떻게든 성공시켰다는 것 자체가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비블레 교수는 좀 다르게 평가했다.
자기보다 못하면 재능 없고, 자기보다 잘하면 재능 있는 것!
물론 이한 입장에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재능 있다고 말을 들어도 제대로 배울까 말까 고민이 되는데, 담당교수는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재밌으니까 해! 잘 될지 안 될지는 중요하지 않아!’같은 말이나 하고 있고...
‘내가 생각해도 마법 배우는 속도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냥 가르시아 교수님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군.’
이한은 이 마법학교의 참스승이자 믿을 만한 어른인 트롤 혼혈 교수를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저건 포기하자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저게 외출권이면 어쩌려고? 다른 보물 찾는다는 보장이라도 있어?”
“?”
걸어나오는 이한은 앞에 여러 탑 학생들이 모여서 떠드는 모습에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지?
“워다나즈! 도와줘!”
“워다나즈는 안 돼! 저 자식이 가져갈 거라고!”
“일단 꺼내고 생각해!”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한은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교장이 손수 만든 보물상자가 앞에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몇 미터는 가뿐이 넘는 거대한 장작더미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