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원수 감지의 물약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이한의 머릿속을 가장 먼저 스치고 지나간 건 역시 해골 교장이었다.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를 떠나서, 해골 교장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생존에 상당히 도움이 됐다.
‘위험한 짓을 할 때마다 물약을 마실 수 있겠지.’
“플레맹 교단이 만들어 낸 불세출의 천재, 시아나 사제. 대상은 어떻게 정할 수 있지?”
저주나 물약의 상대를 정하는 건 여러 방법이 있었다.
상대의 이름이나 얼굴을 떠올리며 주문을 외우거나, 혹은 그 상대와 관련된 물건을 찾아오거나...
물약은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완성된 물약에 대상의 머리카락 한 올을 넣으면 된답니다.”
“머리카락.”
“네. 머리카락이요.”
“......”
이한은 고뇌에 빠졌다.
‘...리치도 머리카락이 있나?’
아무리 봐도 해골 교장은 머리카락이 없었다.
생전의 머리카락을 구하면 되겠지만, 해골 교장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벌써 썩어서 가루로 변해버렸을 터.
‘해골 교장한테는 못 쓰겠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아나 사제는 흥미가 생겼는지 말을 이었다.
“만약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이 만드신다면 도와드리겠어요.”
“하지만 우리끼리 만들기는 꽤 난이도 있는 물약 아닌가?”
“하지만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은 난이도 있는 난제를 즐기시는 분이시니까요.”
“...응?”
이한은 멈칫했다.
어디서 그런 미친 소문이?
‘흰 호랑이 탑 놈들이 퍼뜨리고 다니나?’
“아닌데?”
“겸손까지... 하하.”
“정말 아닌데.”
이한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담겨나왔지만 시아나 사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워다나즈. 여기 어떻게 마무리하면 되지?”
“기다려. 같이 마무리 짓자고.”
알펜 교수의 마법진을 완성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 이한을 불렀다.
다 같이 도와준 덕분에 마법진도 점점 끝이 보이고 있었다.
‘잠깐. 비어 있잖아?’
교수가 준 책을 보며 바닥에 선을 그리던 이한은 멈칫했다.
교수가 실수를 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마법진의 한 부분이 비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복도 양옆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빛의 구체가, 중앙에는 환상으로 만든 조각상이 나와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빛의 구체 몇 개가 나오지 않아서 어색하게 보일 게 분명했다.
‘나이튼 교수한테 가서 물어봐야 하나?’
이한은 고민했다.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을 때 교수한테 물어보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걸 모른다고? 자네는 대체 내 강의에서 뭘 들었나?
-지금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건가? 정말로 어이가 없군. 당연히 이 정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라고 비워 놓은 건데.
실수였어도, 실수가 아니었어도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알펜 교수가 그렇게까지 미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마법학교의 다른 교수들도 첫인상은 다 멀쩡해보였었다.
고민 끝에 이한은 결정을 내렸다.
‘스스로 해결해야겠군.’
비블레 버두스 교수에게서 부여 마법 속성 훈련을 받아서 다행이었다.
...다행인가?
이한은 잡념을 떨쳐내고 다시 집중에 들어갔다.
“비켜봐라. <빛 부여>를 걸 테니까.”
지팡이가 휘둘러지고 주문이 시전되었다.
마법진의 빠진 부분에 이한이 건 <빛 부여> 마법이 채워졌다.
다른 학생들은 감탄했지만 황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러한 설치형 마법진은 전체의 유기적인 연결이 상당히 중요했다.
마법진의 곳곳에 배치된 마력원이 배터리 역할을 한다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마법진의 선들은 동력을 전달해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법진의 빠진 부분을 대신해서 이한이 건 부여 마법은 딱히 전체 마법진에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 마력이 전달이 안 될 텐데?
툭툭-
황녀는 이한에게 마법진의 구석을 가리켰다. 이한은 황녀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괜찮습니다.”
“...??”
이 마법진을 준비한 게 누군데 당연히 이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펜 교수가 준 마법진은 일개 신입생이 고치거나 추가해서 완성시킬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 보는 동안에만 굴러가면 된다.’
애초에 마법진 목적은 이 주변을 화려하게 빛의 구체와 환상의 조각상으로 장식하는 것.
사람들 보는 동안에만 제대로 굴러가면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 유지되기 힘들지 않습니까?”
황녀의 추종자 한 명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부여 마법의 지속 시간을 늘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반영구적으로 지속되는 부여 마법이 괜히 아티팩트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이한처럼 어떠한 사전 준비도 없이 지팡이와 주문만으로 건 부여 마법이라면 몇 분을 넘기기 힘들었다.
“그래.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하루마다 새로 걸어줄 생각이니까. 그러면 꺼질 일이 없지.”
“......”
“...???”
황녀와 황녀의 추종자들은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해서 멍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아산을 불렀다.
“아산. 교수님을 불러와. 혹시라도 다른 문제가 생기기 전... 아니, 완성시킨 김에 교수님께 보여드려야겠다.”
“알겠어. 워다나즈!”
* * *
마법학교 신입생들에게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 알펜 나이튼은 친구인 켄드리 바쿠와 같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둘 다 제국의 고관 출신인 만큼 혼자 있지 않았다.
뒤에는 마법학교에 찾아온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
“발드로가드에서 오셨습니까?”
“예. 에인로가드의 뛰어난 학생들과 명성 높은 교육을 보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부끄럽습니다.”
발드로가드의 학생들을 인솔해 온 마법사는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아무리 축제를 구경하러 온 손님이라 하더라도, 다른 마법학교 사이에 경쟁심이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발드로가드에서 일하고 있는 마법사인 만큼, 학생들이 무언가 보여주길 원했던 것이다.
그 마음을 읽은 알펜과 켄드리는 괜찮다는 듯이 위로했다.
“학생의 뛰어난 재능은 억지로, 다급하게 보여주려고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오.”
“알펜의 말이 맞아.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발드로가드는 이미 훌륭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에인로가드의 몇몇 인성파탄자들과 별개로, 제국 관료들은 발드로가드를 상당히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은...
-금... 금화 이천칠백팔십 닢?? 이걸 누구 코에 갖다 붙이라는 거요? 세 배로 늘려주지 않을 거면 차라리 다 가져가시오! 아니! 진짜 가져가면 어떡하... 아이고!! 저 제국의 썩어빠진 탐관오리가 자유로운 마법의 학풍을 탄압한다!!
그에 비해 발드로가드의 마법사들은...
-제국 지원금 말입니까? 괜찮습니다. 가난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지원을 받을 필요까지는 없지요. 우리는 귀족이지 거지가 아닙니다. 명예를 더럽히지 말아주십시오.
이러니 제국 관료들이 발드로가드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켄드리 같은 사람이 발드로가드의 교육이 좀 더 건전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에인로가드는 좀...
너무 마법에만 몰두해서 마법사들의 인성을 망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에인로가드의 5학년 학생 상대로 너무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줘서 부끄럽습니다. 물론 상대가 고학년인 만큼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
알펜은 의아해했다.
5학년 학생은 축제에 안 나왔는데?
켄드리가 빠르고 낮은 목소리로 알펜에게 상황설명을 했다.
-배그렉 교수가 발드로가드 학생을 팬 건가?
-아니. 배그렉 교수 제자가.
-1학년 학생한테?!
-마법 전투는 마법 실력과 별개잖아. 따로 연습 안하면 서투를 수도 있다고.
-아무리 별개라지만 1학년 학생도 딱히 마법 전투를 연습할 기회는 없었을 텐데...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한테 괜히 상처를 주지 말자고. 마법학교들끼리 싸워봤자 제국에 좋은 일이 있겠나?
-맞는 말이군.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단속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화제를 바꾸려고 했는데 마침 저 멀리서 일학년 학생 한 명이 달려왔다.
달카드 가문의 아산이었다.
“교수님. 저번에 말씀하신 걸 완성시켰습니다.”
“고생했네. 지금 가서 확인하도록 하지.”
아산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먼저 뛰어갔다. 친구들에게 곧 손님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멀어져가는 아산의 뒷모습을 보며 알펜 교수는 멈칫했다.
“...음?”
“왜 그러지?”
“방금 완성시켰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저번에 한 번 봤었는데 진도가 상당히 많이 나갔더군.”
“다 완성시키라고 준 게 아니었는데...”
알펜 교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간단한 마법진 제작을 자네들에게 맡기고 싶네.
마법진 제작을 맡기고 싶다고 했지, 마법진을 다 완성시키라고 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신입생 수준에서 저걸 다 완성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알펜 교수도 다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최선을 다해, 가능한 부분까지 하라고 말한 거였는데...
“저런. 오해가 있었네?”
“오해가 있었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국 관료들은 자신들이 한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줬다.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됐을 거야.”
“그러게 말이야. 놀랍군. 완성시켰을 줄은 몰랐는데...”
“자세히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발드로가드의 마법사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알펜 교수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자 발드로가드의 마법사는 알펜 교수를 칭찬했다.
“교수님이 한계를 정해주지 않으신 덕분에 학생들은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쪽의 칭찬이 날 부끄럽게 만드는군!”
“하하하!”
“하하하하하!”
마법사들은 서로 웃으며 칭찬했다.
뒤늦게 도착한 발드로가드의 2학년 학생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발드로가드의 마법사는 들었던 이야기를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 되는 마법진을 그렇게 빨리?!”
“말도 안 돼요! 미완성이겠죠!”
마법진의 난이도를 떠나서 그 속도가 믿기지 않았다.
마법진을 만드는 건 도형만 슥슥 그리는 게 아니었다.
세심하게 마력량을 계산하고 직접 테스트해가며 하는 거라, 마법사들도 마력 부족으로 몇 번은 쓰러져가며 해야 하는 일인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완성이라고 하더라도 교수님에게 보여줄 정도로 완성했다는 게 대단하지 않니?”
“크윽...”
“그건... 그래요.”
예의 바른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완성이라 하더라도 보여줄 정도로 완성했다는 게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 같이 구경하러 가볼까?”
“예. 교수님.”
나이 많은 마법사들의 뒤를 쫓아가며, 발드로가드의 학생들은 소곤거렸다.
“그런데 몇 학년들이 한 거야?”
“글쎄...?”
* * *
강의실에 도착한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5학년들이야.”
“왜?”
“저기 저 사람. 5학년이랬어.”
“그렇구나.”
학생들은 이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드로가드의 3학년 학생들이 점점 세게 얻어맞을 때마다 이한에 관한 소문은 늘어나고 있었다.
“잠깐만. 저 사람은... 아덴아르트 황녀님이잖아?”
“황녀라고? 그게 왜?”
“우리보다 한 살 어린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1학년이잖아? 고학년하고 같이 만든 거구나.”
고학년 학생들이 후배들과 함께 같이 마법을 하는 건 발드로가드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선배는 후배에게서 도움을.
후배는 선배에게서 가르침을.
이것이 명문 마법학교의 교풍이었다.
‘5학년도 왔나?’
앉아서 쉬고 있던 이한은 밖에서 온 학생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5학년’이라는 단어에 의아해했다.
발드로가드에서 5학년 학생은 못 본 것 같았는데...
“워다나즈 군. 훌륭하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한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교수에게 인정받는 이 순간.
교수가 까다로울수록 그 순간은 더욱 더 영광스럽기 마련이었다.
“다 완성하라고 준 과제가 아니었는데 완성시키다니...”
“...?”
“그런데 저 부분은 별도로 완성시켰군?”
“...잠시만요. 교수님. 잠시만요.”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교수의 말을 끊었다.
방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