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이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티질링 사제가 외출권을 찾았다?
그럴 수 있었다.
다른 탑, 하다못해 흰 호랑이 탑의 학생들이 외출권을 찾았다면?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이난도는...
‘함정이다!’
이한의 직감이 외쳤다.
이건 함정이 분명하다고!
해골 교장은 가이난도가 손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외출권을 쉽게 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지? 왜 외출권을?’
함정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외출권을 저렇게 뿌리는 이유까지는 짐작 가지 않았다.
‘더 경계할 수밖에 없나.’
“왜 그래?”
이한의 표정이 심각해진 걸 눈치챘는지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외출권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수상하지 않나?”
“과연...!”
“그런 핑계로 가이난도 손에서 외출권을 뺏자 이거지?”
“나중에 돌려준다고 하고 가져가면 어떨까?”
“......”
이미 들뜰 대로 들뜬 친구들의 모습에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혼자라도 정신 차리고 있어야겠군.’
* * *
가이난도는 흑마법을 가르치는 교수, 모르툼 교수의 천막에 앉아 있었다.
다른 교수들은 학생들 중 열정 있고 뛰어난 학생들을 골라서 일을 부탁했지만 모르툼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흑마법에 관심 있는 신입생 숫자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다.
흑마법 배우는 신입생들은 전부 다 참석해야 했다.
이미르그와 라파드엘도 가이난도 옆에 앉아서 우두커니 앞을 지켜보고 있었다.
“......”
“......”
무거운 침묵.
이한이 자리에 없자 서로 친하지 않던 흑마법 신입생들은 더더욱 대화가 없어졌다.
셋 다 탑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종족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가이난도는 옷깃을 붙잡고 펄럭였다.
이상하게 공기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음의 마력 때문 아니야 이거?’
숨막히는 분위기를 깨기 위해 가이난도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가이난도의 사교성 넘치는 인사에 다른 두 학생은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
“친한 척 말 걸지 마라. 황자. 기분 나쁘니까.”
한 명은 입을 다물고 한 명은 구박을 했는데도 가이난도는 오히려 기뻐했다.
“황자라고 했지 방금?”
“뭐... 뭐냐? 왜 좋아하는 거냐? 이 변태 같은 놈.”
천사 혼혈, 라파드엘은 질색하며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역시 흑마법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 멀쩡한 사람은 없었다.
욕을 먹어도 좋아하다니...
“다시 불러봐! 내가 누구라고?”
“저리 꺼지지 못해!?”
“저, 저기.”
거인 혼혈인 이미르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손님들을 좀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
“뭐? 흑마법에 관심 가질 기분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냐?”
‘너도 흑마법 배우고 있잖아...’
가이난도와 이미르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라파드엘은 꿋꿋했다.
“흑마법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다. 나는...”
“잘 되어가고 있나?”
모르툼 교수가 나타나자 라파드엘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래. 콜록콜록. 잘 되어가고 있나?”
“......”
셋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잘 되어가고 있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0명의 손님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잘 되어가고 있지는 않았다.
모르툼 교수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지나?”
사실 모르툼 교수는 다른 교수들에 비해 상당히 성실하게 준비해 준 편이었다.
넓은 탁자 위에 깔린 검은 천.
그리고 그 위에 배치된 마법진과 마도서, 아티팩트들.
손님이 찾아오면 그 손님에게 알맞은 흑마법 주문을 찾아 추천해주려는 모르툼 교수의 정성 어린 안배였다.
이한에게 손님 낯짝에 물구슬 날리라고 한 볼라디 교수와 비교하는 게 모욕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세상일은 꼭 정성을 기울인다고 다 잘 되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축제에 온 손님들 중에 굳이 음침한 흑마법사들을 찾아가려는 사람은 얼마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콜록. 뭐지?”
“이한은 왜 안 데리고 오셨나요?”
“......”
“......”
교수보다 이미르그와 라파드엘이 더 가이난도를 쓰레기 보듯이 쳐다보았다.
다른 탑인데도 둘의 귀에는 워다나즈의 소문이 들려올 정도였다.
-워다나즈가 알펜 교수 마법진 만들던데.
-뛰어난 놈이니까 그렇겠지.
-워다나즈가 배그렉 교수를 돕던데. 강의 듣던 모양이더라.
-대체 왜...? 이해는 안 가지만 강의를 듣는다면 돕는 건 당연하겠지. 듣는 사람도 따로 없을 테니까.
-워다나즈가 교장 선생님 심부름하던데.
-뛰어난 놈이니까.
-워다나즈가 불려가서 마법 폭죽도 만든다던데.
-뛰어난 놈이니... 아니, 잠깐만. 워다나즈 놈 너무 일 많이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안 쓰러지고 있지?
뛰어난 성적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지만 워다나즈는 좀 심했다.
다른 탑의 학생들도 걱정의 눈으로 쳐다볼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게 없었다.
그런데 같은 탑의 친구라는 놈이 그런 걱정은커녕 ‘안 불러요?’하고 교수한테 묻다니.
‘쓰레기 같은 새끼!’
라파드엘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콜록. 워다나즈는... 다른 할 일이 많아서 내버려뒀지.”
“그래도 이한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너무 바쁠 텐데...”
“이한은 괜찮을 겁니다!”
“콜록. 글쎄... 잘 모르겠군.”
보다 못한 이미르그와 라파드엘이 나섰다.
“괜, 괜찮습니다. 저희끼리 하겠습니다.”
“워다나즈 녀석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뭘 괜찮아!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이!”
둘이 가이난도를 팰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이한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나타났다.
“여기 있었나?”
“이한!!”
가이난도는 뛸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이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와줘!”
“뭘?”
“여기 흑마법...”
가이난도가 설명하기도 전에 이한을 따라 온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먼저 물었다.
“그런데 가이난도, 외출권을 얻었다면서?”
“그래.”
가이난도의 표정에 우쭐함과 거만함이 피어올랐다. 친구들은 괜히 물어봤다고 후회했다.
‘묻지 말고 그냥 강제로 뺏을걸.’
“어디서 얻었지?”
“주웠는데?”
“...주웠다고?”
이한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묻자 가이난도는 억울함 담긴 목소리로 항변했다.
“진짜 주웠어! 길가는데 근처 풀숲에 상자가 있더라고. 열었는데... 봐봐! 진짜야!”
가이난도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품속에서 외출권을 꺼냈다.
이한이 설마 뺏어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다른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긴장한 얼굴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워다나즈!
-바로 지금!
‘......’
텔레파시 마법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친구들의 텔레파시가 들릴 정도였다.
이한은 외출권을 확인하고 가이난도에게 돌려줬다.
“진짜군.”
“그렇지!?”
‘정말 더 수상한데.’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한은 앞으로 외출권을 쓸 때까지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참. 이한. 도와줘.”
“뭘?”
가이난도는 주절주절 모르툼 교수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교수가 뛰어난 수제자들을 불러서 일을 맡겼는데,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했고, 그런데 사람들은 안 오고...
‘가이난도가 뭔 개소리를 했나?’
이한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미르그와 라파드엘이 가이난도를 매우 쓰레기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라파드엘이야 흑마법을 싫어하는 만큼 원래 저런 놈이었지만 이미르그는 꽤 선량한 학생이었다.
가이난도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그렇군. 알겠다. 도와주지.”
“!??”
“!!!”
둘은 깜짝 놀라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정말 도와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왜 그러지?”
“안, 안 바쁜가 해서...”
“아. 오늘 급한 일은 끝났지. 원래는 축제를 좀 둘러보려고 했는데.”
불길한 징조를 느낀 아산은 다급하게 말했다.
“워다나즈. 설마 오늘도 축제를 안 즐기려는 건 아니지? 며칠 안 남았어!”
“내일 즐겨도 괜찮겠지.”
“저... 저런...!”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가이난도를 노려보았다.
저 자식 때문에 워다나즈가!
‘모르툼 교수가 앞에 있는데 그냥 갈 수는 없겠군.’
물론 이한은 가이난도와의 우정 때문에 남아준 게 아니었다.
바로 앞에 모르툼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툼 교수야 ‘콜록 괜찮다 너는 가서 놀아라’한다 하더라도, 교수는 절대 믿을 수 없는 속좁은 존재였다.
정말 가서 놀았다가는 나중에 ‘정말 가서 놀았니? 콜록 그래 대단하구나’같은 말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흑마법을 배우게 된 이상 찍혀서 좋을 게 없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아니... 왜?”
모르툼 교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다른 교수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기에 모르툼 교수는 이한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았다.
“저도 흑마법을 배우고 있잖습니까.”
“...!”
모르툼 교수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감동했다.
심지어 라파드엘의 마음도 흔들렸다.
‘흑마법이나 배우는 놈이지만 명예는 정말 흠잡을 곳이 없...’
“이한!”
‘그에 비해 저 황자는...’
라파드엘이 자기 욕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가이난도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사람들만 오면 되는 건가?”
“그렇지?”
이한은 푸른 용의 탑 학생들한테 부탁했다.
“너희들. 줄 서라.”
“...우, 우리도?”
“쉿. 워다나즈가 서라잖아.”
이한과 같이 놀러 왔다가 졸지에 흑마법 천막에 붙잡히게 됐지만,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우정을 위해 줄을 섰다.
“아산. 다른 탑 학생들 중에 좀 친한 사람 있으면 불러와줘.”
“걱정하지 마. 워다나즈.”
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의 빚이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아산이 학생들을 데리고 왔다.
같은 탑은 물론이고 다른 탑 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워다나즈. 여기 서면 되는 거야?”
“그래.”
“워다나즈 님. 황녀님을 흑마법에 관심 가지게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대신 할 테니 황녀님은...”
“자.”
이한은 황녀의 손바닥에 사탕을 하나 쥐어줬다.
황녀는 별 말 없이 줄을 섰다. 로웨나는 경악했다.
“아니...?!”
“워다나즈. 또 데리고 왔어.”
학생들을 데리고 온 뒤 사라졌던 아산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발드로가드에서 온 손님들을 데리고 왔다.
“...?”
이한이 의아해하자 아산이 신난 목소리로 설명했다.
“네 이름을 말하니까 꼭 도와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그, 그래. 잘했다.”
아산은 또 사라졌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사제들과 제국 관료들을 몇 명 데리고 왔다.
“...어떻게 데리고 온 거냐?”
같은 학생들이나 발드로가드 손님까지는 이해가 갔다.
이한에게 신세진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제들하고 관료들은 어떻게?
‘달카드 가문의 인맥인가?’
“네 이름 말하니까 도와주고 싶다고 하시던데?”
“...???”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지?
* * *
“모르툼 교수님이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건 처음 봤어.”
“너 교수님 본 지 몇 달도 안 됐지 않나?”
“그렇긴 하지.”
이한은 가이난도와 함께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까지 정리를 돕다보니 주변은 벌써 캄캄했다.
“돌아가면 카드놀이 한 판 할래?”
“마법 해독할 건데.”
“해독 다 하고 나면 카드놀이 한 판 할래?”
“아마 다 하고 나면 새벽일 텐데.”
가이난도는 카드놀이에 환장했는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새벽에... 컥!”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날아와 가이난도를 공격했다.
이한은 처음에는 순간 외출권을 노린 강도인 줄 알았다.
“가이난도! 외출권을 뺏기지 마... 아니, 몬스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