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팍!
조언에도 불구하고 가이난도는 풀썩 쓰러졌다. 몬스터한테 공격당해 기절한 모양이었다.
‘전혀 눈치를 못 챘다.’
아무리 주변이 어두웠다지만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동안 눈치를 채지 못할 줄이야.
상대에게 기척을 숨기는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빛이여!”
이한은 빛의 구체를 주변에 띄움과 동시에 스스로의 모습을 투명화시켰다.
“열이여, 공기를 일그러뜨려라!”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한이 투명해진 자리를 환상이 대신 차지했다.
“샤르칸. 적이 다가오면 공격해라!”
크르릉대는 소리와 함께 샤르칸이 뛰쳐나왔다. 샤르칸은 어둠 속을 향해 살벌하게 짖어댔다.
‘저쪽인가!’
이한은 바로 빛의 구체를 하나 더 띄웠다. 캄캄한 어둠이 빠르게 밀려났다.
그러자 상대의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마치 그림자를 찰흙처럼 뭉쳐서 만든 것 같은 몬스터였다.
그림자 몬스터는 빛이 밀려오자 화들짝 놀라서 더 거리를 벌렸다. 어둠 속으로 스며들자 순식간에 윤곽이 사라지고 모습이 감춰졌다.
‘일반적인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이한은 그림자 몬스터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보통 살아 있는 몬스터들과 달리 저 그림자 몬스터는 전혀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인공적으로 소환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는 마법학교.
저런 놈을 소환할 사람은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일단은 제압부터!’
“타올라라!”
어둠을 뚫고 불꽃이 점화되었다. 상대의 속성을 알아차린 이한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압하기로 했다.
빛을 두려워하는 놈이라면 마찬가지로 화염도 두려워하리라.
화르륵!
불꽃이 허공에서 피어오르자 그림자 몬스터는 비웃듯이 손쉽게 거리를 벌렸다.
갑작스레 빛을 마주했을 때의 당황은 사라지고 이미 침착을 되찾은 뒤였다.
빛이며 화염이며 불러와봤자 지금은 한밤이었다.
숨을 만한 어둠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 몬스터는 이한을 너무 얕봤다.
“타올라라.”
-?
“타올라라, 타올라라, 타올라라, 타올라라...”
-!
그림자 몬스터는 처음 거리를 벌렸을 때 약올리듯이 주변을 맴돌지 말고 바로 도망을 쳤어야 했다.
이한이 순식간에 수십 개가 넘는 화염을 주변에 불러낸 것이다.
화르르르르륵!
빠르게 완성된 화망(火網).
그림자 몬스터는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도 전에 곳곳에서 타오르는 화염들에게 포위당했다.
몬스터가 회피 능력이나 은신 능력 같은 걸 쓸 틈도 주지 않는, 압도적인 마력으로 인한 물량공세!
졸지에 조금 남은 어둠 속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그림자 몬스터는 눈치만 보며 숨을 죽였다.
샤르칸이 나오라는 듯이 크르릉댔다.
“잡았군.”
그림자 몬스터는 감히 어둠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대신 주변의 불꽃이 꺼지길 기다렸다.
이한의 나이가 어린 만큼, 시간이 지나면 과하게 불러온 화염들이 독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화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이한이 냉정하게 말했다.
“나오지 않으면 어둠째로 태워버리겠다. 셋. 둘. 하나...”
화염 마법을 능숙하게 다룰 자신이 없어서 불을 사방에 켜놓고 기다리고 있는 거였지, 그림자 몬스터가 두려워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한의 목소리에 담긴 경고를 느낀 그림자 몬스터는 제대로 기가 죽어서 기어 나왔다.
탁탁탁탁탁-
“?”
멀리서 걸음소리가 들렸다.
이한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던졌다. 어디서 몇 번 본 얼굴이 밤의 어둠 속에서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마법학교의 창고지기였다.
* * *
-이번 축제를 위해 내가 준비해 놓은 몬스터들이다. 어떻지?
-숫자가 많습니다.
-...재미없기는. 어쨌든 이 몬스터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
해골 교장은 엄숙한 목소리로 창고지기에게 말했다.
이번 축제를 위해 소환해놓은 이 몬스터들은 단순히 한두번 쓰고 말 놈들이 아니었다.
해골 교장이 세워놓은 완벽한 계획을 빛나게 만들 아름다운 체스말이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창고지기가 혼자서 관리하기에는 해골 교장이 소환해 놓은 몬스터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몬스터들이 얌전한 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움직이지 마십시오.
쿵! 쿵!
해골 교장에게 외출권을 가진 학생들을 추적해서 습격하란 명령을 받은 몬스터들은 금세라도 우리를 뛰쳐나오려고 발버둥쳤다.
창고지기는 최선을 다해서 관리했지만 결국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몇 개의 우리가 부서지고 안에 있는 몬스터들이 탈출해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창고지기는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주변에 있는 놈들을 붙잡아서 다시 가두고 도망친 놈들의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
창고지기는 멀리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에 멈칫했다.
시각을 잃은 대신 강력한 마력 탐지 능력을 얻게 된 창고지기였지만, 그런 능력으로도 완전히 파악히 불가능한 거대한 마력이었다.
원래라면 ‘교장 선생님이십니까’라고 물었겠지만, 창고지기는 해골 교장한테 단단히 한 소리를 들은 뒤였다.
“교장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학생이십니까?”
이한은 빠르게 고민했다.
여기서 해골 교장이라고 하면...
‘몰래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 없겠지.’
“학생입니다.”
“그렇습니까.”
다행히 창고지기는 ‘저번에 날 속였겠다!’같은 식으로 이한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이한이 불꽃들로 빙 둘러싼 그림자 몬스터를 쳐다보았다.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한은 창고지기가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주변에 불을 피워서 붙잡으신 겁니까?”
“예.”
“놈이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사방에 피웠습니다.”
샤르칸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르릉댔다.
창고지기는 이한의 말에 놀라워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림자괴물이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피운 셈이 됐다.
저 많은 화염을 저렇게?
아무리 화염 원소 마법에 특화된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입생이 보여주기 힘든 모습이었다.
“좋은 마법사가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몬스터를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혹시 교장 선생님의 눈을 피해 탈출한 놈입니까?”
이한은 창고지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빨랐다.
몬스터, 창고지기, 가져가려는 것에서 바로 해골 교장을 떠올린 것이다.
창고지기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살짝 당황했다.
신입생이 저렇게 잘 알다니.
혹시?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한은 완곡하게 대답했다.
물론 해골 교장이 말해준 건 아니었지만, 해골 교장이 하는 짓을 보고 의심을 한 것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해골 교장이 말해준 거였다.
순진무구한 창고지기는 신입생이 벌써부터 이렇게 교활한 혓바닥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맞습니다. 탈출한 놈 중 하나입니다.”
“탈출한 놈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
이한은 속으로 욕했다.
‘이놈의 학교는 관리할 자신이 없으면 뭔가 소환하는 걸 금지해야 한다니까.’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한의 말에 창고지기는 놀라워했다.
신입생이 저런 기특한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다른 신입생이라면 도움을 거절했을지도 몰랐지만, 눈앞의 소년이 방금 그림자괴물을 제압한 걸 보면 도울 능력은 충분했다.
게다가 사실상 교장 선생님의 제자 아닌가.
일을 같이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는 없으리라.
“그래주시겠습니까?”
“예. 이 마법학교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을 돕는 건 제 영광입니다.”
“정말 좋은 마법사가 되실 겁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쉽군.’
해골 교장 같은 사람을 상대하다가 창고지기를 상대하니 너무 쉬울 지경이었다.
해골 교장의 끊임없는 계략과 수작이 이한을 이렇게 단련시킨 것이다.
‘분명히 해골 교장의 계획이 있다.’
도와주면서 캐낸다.
이한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 잡지 않으면 이 마법학교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잠깐. 가이난도 좀 깨우고 가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이한은 물 덩어리를 불러내서 가이난도를 얼굴 위에 끼얹었다.
“우쿨럭컥!”
“가이난도! 괜찮냐!”
“괜... 켁, 켁켁. 내, 내 외출권! 내 외출권은?”
“멀쩡해. 오늘은 탑에 들어가서 나오지 마라.”
가이난도는 쓸데없이 캐묻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이한이 진지하게 말하자 가이난도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근데 돌아오면 카드놀이 한 판 할래?”
“......”
* * *
이한은 창고지기와 같이 움직이면서 그림자괴물 세 마리를 더 잡았다.
음(陰)과 그림자의 마력으로 구성된 암흑세계에서 소환된 그림자괴물은 교활하고 비열한 흑마법사들이 좋아하는 소환수였다.
은신, 추적, 기습 등등에 특화된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해골 교장답군.’
이한은 창고지기에게 계속 정보를 캐내며 그림자괴물의 약점을 확인했다.
이미 상대했던 것처럼 빛과 열을 심하게 두려워하는 놈이 맞았다.
‘앞으로 계속 보게 될지도 모르니 확실히 알아둬야지.’
“그래서... 이놈들이 소환될 때, 외출권을 가진 학생들을 추적하도록 명령받은 거군요.”
“그렇습니다.”
“......”
‘다시 들어도 어이가 없군.’
이한은 상대한테서 캐낸 정보를 다시 확인하고 새삼 어이없어했다.
뭐 이딴...
해골 교장이 외출권을 너무 쉽게 준다 했었는데 역시 흉계가 숨어 있었다.
축제가 끝나고, 학생들이 토요일 아침에 밖으로 나가려고 신나서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 때를 노려 기습!
‘미리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
이한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몰랐다면 어떻게 당했을지...
‘잠깐만.’
안심하던 이한은 무언가 불길한 감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해골 교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렇게 몬스터를 열심히 소환해서 준비시켜놨는데, 주말에 나가려는 학생들을 기습해서 외출권을 뺏는 것에만 쓸까?
...돌아오는 학생들을 기습할 때도 쓰지 않을까?
이한은 최대한 태연하게, 들키지 않도록 창고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참. 학생들이 돌아올 때 몬스터들은 어디에서 대기하고 있습니까?”
이한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해서 창고지기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정문 앞에 있는 언덕 근처에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늦으면... 징벌방에 보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 중간고사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주말에 돌아와서 갇히면 중간고사 공부를 제대로 못 하니... 더욱 좋고 말입니다.”
“역시. 교장 선생님의 제자다우십니다. 좋은 마법사가 되실 겁니다.”
“......”
이한은 순간 가면을 벗어던지고 창고지기에게 주먹을 날릴 뻔했다.
* * *
“왜 그렇게 울상이냐?”
우레걸음은 아침부터 연금술 천막 앞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이한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한은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니까 작작 들었어야지. 자. 여기 기분 좋아지는 포션이다.”
우레걸음은 황금빛 거품이 올라오는 보리 포션을 잔에 가득 따라서 내밀었다.
주변 사람들은 벌써 다 보리 포션을 마지고 행복해진 상태였다.
“교수님.”
“왜?”
“누가 매복하고 있는 곳을 뚫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거냐?”
우레걸음 교수는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