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보다 저번처럼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곧 시험인 만큼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방금 말한 이름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넘어가려는 학생의 모습에, 발도르오른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건 그럴 수 없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아니요, 아니요. 그 전에! 어떤 환상 마법사를 만났다고...?”
“오고닌이란 분이셨는데요. 하지만 발도르오른 님.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그게 안 중요하면 뭐가 중요해!’
발도르오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제국의 환상 마법사라면 오고닌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보석처럼 완성도 높은 걸작 환상 마법들을 만들어냈고, 써내려간 마도서는 젊은 환상 마법사들의 성서 취급을 받는(발도르오른은 저번에 오고닌의 마도서 사본을 하나 구하기 위해 전재산을 투자했었다), 바로 그 위대한 마법사 오고닌 아닌가.
오고닌이 이끄는 환상 마법사들의 집단인 몽환포영(夢幻泡影)에서 개발하고 있는 마법 중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발도르오른은 기꺼이 영혼을 팔 것이다.
‘잠깐. 동명이인 아닌가? 사칭범이거나.’
발도르오른은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신입생이 오고닌 같은 환상 마법사 상대로 무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마 동명이인이거나 사칭범이거나 착각이겠지!
“무슨 마법을 쓰셨습니까? 혹시 주문이 기억나십니까?”
발도르오른이 다급하게 재촉하듯이 물어보자 아산은 살짝 감탄했다.
“마법부터 물어보시는 거 보니 정말 대단하시다.”
“그러게 말이야. 마법에 정말 진심인가봐.”
두 신입생의 소곤거림은 무시하고 발도르오른은 이한만 쳐다보았다.
“그게... ‘다른 자의 환영이 너를 삼킬지어다!’였나? ‘너의 마음을 내가 지배하노라!’ 같은 주문도 쓰셨던 것 같습니다만.”
발도르오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말도 안 돼!’
주문만 들어도 발도르오른은 무슨 마법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저 구체적인 주문은 신입생이 가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주문이 아니었다. 고위 환상 마법 주문이 맞았다.
그것도 발도르오른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강력한...
‘대체... 대체 오고닌 님을 어떻게... 어떻게??’
발도르오른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사이 이한은 다시 한 번 부탁했다.
“발도르오른 님. 괜찮으시다면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 예... 네? 예?”
“감사합니다! 다들 기뻐해도 좋아. 된다고 하시는군.”
“예??”
고장난 사람처럼 얼이 빠져서 고개를 끄덕이던 발도르오른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신입생들이 기뻐하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 저... 저는 누구를 가르칠 능력이 안 됩니다!”
오고닌을 이긴 신입생을 대체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발도르오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자 아산이 또 감탄했다.
“겸손하시기까지...”
“교수님들하고는 뭔가 다른데?”
“그렇지? 비범한 분은 뭔가 다른가봐.”
‘돌겠네.’
발도르오른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푸른 용의 탑 신입생들은 놔주지 않았다.
결국 발도르오른은 사형대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저한테 배웠다고 절대 말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교수님들도 발도르오른 님을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어요!”
‘한 대 때리면... 안 되겠지?’
발도르오른은 속없이 떠드는 가이난도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 * *
“과연...”
“감사합니다. 덕분에 의문이 풀렸습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카페에서 초콜릿 한 잔씩 시키고서 발도르오른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발도르오른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그 성실한 모습에 학생들은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 분은 정말 잘 가르치시는구나!
“오늘 배운 걸 잊지 않겠습니다.”
“돌아가서 꼭 복습하려구요.”
“정... 정말 잘 됐네요...”
‘빨리 좀 돌아가...’
발도르오른의 목소리는 벌써 힘이 반쯤 빠져 있었다. 하도 긴장한 탓이었다.
세상에 에인로가드 신입생들 상대로 환상 마법을 가르치게 될 줄이야...
‘교수들이 나와서 나 죽이려는 거 아니겠지?’
컵을 홀짝이며 배운 것들을 정리하던 이한은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외쳤다.
“티질링 사제!”
“!”
길을 걸어가던 불사조의 탑 사제들은 카페 안에 있는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을 보고 멈칫했다.
“다들 어디 가고 있는 거지?”
“각자 신전에 가서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만...?”
다른 탑 학생들과 달리,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돈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대부분 돈을 쓸 생각이 없었던 데다가, 마을에 있는 자기 교단의 신전에 머무르면 됐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나온 김에 뭐라도 좀 마시고 가지. 자. 다들 앉아.”
이한은 불사조의 탑 사제들을 데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디저트와 음료를 연속으로 주문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사제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카페 탁자 앞에 갓 구운 치즈케이크와 핫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대접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사제 중 한 명이 매우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친구를 대접하는 건 내 기쁨이지.”
이한은 굳이 ‘교단에 가서 내 이야기 잘 해줘’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제들은 다들 착해서, 먹으면 먹은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차나 커피 같은 거잖나. 신전에서도 잠을 깨기 위해 많이들 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한의 말에 사제들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차나 커피하고 이런 귀한 디저트는 다르죠.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맞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만 이런 귀한 디저트는 차나 커피하고는 다릅니다. 자주 먹으면 사치스럽고 방만하다고 비판받을 겁니다.”
“......”
옆에서 케이크를 먹던 티질링 사제가 움찔하더니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못 본 척 무시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십니까?”
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아산과 가이난도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이 분은 발도르오른 님이신데 환상 마법의 달인...”
“아닙니다! 아닙니다!!”
“겸손하고 지적인 분이셔.”
“아니라고요...!”
“저희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자리에 모인 학생들의 기대 서린 시선에 발도르오른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대체 왜 오늘 외출을 해서...’
1시간 후.
“감사합니다!”
“환상 마법을 배우면서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진짜 어디 가서 저한테 배웠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진짜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발도르오른 님. 발도르오른 님의 뜻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사제들이 질문을 마치는 동안 정리를 끝낸 이한이 입을 열었다.
“발도르오른 님. 그러고 보니 오늘 어디 가시던 길이었습니까?”
“저녁에 먹을 걸 좀 사고, 공방에서 쓸 만한 아티팩트를 사려고 가게에...”
별생각 없이 말하던 발도르오른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1학년 학생들이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저희도 방문해도 될까요?”
“......”
‘그냥 집에 간다고 할 걸...’
발도르오른은 정말 울고 싶어졌다.
* * *
“...없다.”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가장 상황 파악이 늦었다.
정말로 가문의 저택이 단 하나도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충격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진짜 미친 거 아닌가?!”
“이렇게까지 기사를 모욕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이냐! 졸업하고 두고 보자! 정말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앞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손에 커다란 막대사탕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실로 호화로운 부의 상징이었다.
“아니...?!”
“쯧쯧. 돈을 못 구했나보군.”
살코 패거리 중 하나인 방드르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드높은 가문의 명성... 빛나는 명예... 이런 게 다 어디에 쓸모가 있겠어. 돈이 없다면 말이야. 하하하!”
“이 자식이?!”
“참아. 마을이야.”
나서려는 흰 호랑이 탑 학생을 친구들이 말렸다.
앙라고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물었다.
“돈을 어디서 구했지? 설마 훔치기라도 한 건가?”
“뭐? 훔쳐? 하여간 흰 호랑이 탑 놈들은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을 못하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훔쳤냐는 의심부터 하다니.
“우리는 정당하고 떳떳한 거래로 돈을 구했다.”
“거래로?! 어떻게!?”
“그걸 왜 말해줘? 말해준다고 하더라도 너희는 할 수 없을 걸?”
방드르는 뿌듯함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도 암시장을 운영하고 버려진 아티팩트들을 찾아오는 데에 뛰어났다.
방드르는 그 아티팩트들을 갖고 나와서 돈과 교환했다. 망가지고 불완전한 아티팩트라 하더라도 밖에서는 충분한 돈이 됐다.
“이... 이익.”
“넘어가지 마. 쓸데없는 도발이니까.”
지젤은 더 말해봤자 상대만 기분 좋게 해준다는 걸 깨달았다. 저런 도발에 응해줄 필요가 없었다.
언젠가는 갚아줄 때가 오리라.
“가문의 이름을 걸고 돈을 빌려볼까?”
“앙라고. 참아. 그건 거지나 하는 짓이야...!”
그러는 사이 발도르오른을 둘러싼 신입생들이 길 반대쪽에서 나타났다.
“!”
“푸른 용의 탑하고... 불사조 탑 사제님들인가?”
방드르는 나타난 신입생 무리들을 보고 잘 됐다 싶었다.
아무리 워다나즈가 학년 수석이라 하더라도 방드르와 친구들처럼 돈을 구하지는 못했으리라.
이건 대귀족 출신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워다나즈! 혹시 돈 필요해?! 너라면 빌려줄 수 있어!”
“아니. 괜찮다. 넉넉하거든.”
“...?!”
방드르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이한 말고 다른 학생들도 손에 막대사탕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것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보다 두 배는 컸다.
가이난도는 방드르의 손에 든 사탕을 쳐다보더니 자기 손에 든 사탕을 다시 쳐다보고 씩 웃었다. 방드르는 매우 기분이 나빠졌다.
“대체 어떻게...?”
“넌 어디서 구했지?”
이한의 질문에 방드르는 살짝 주눅이 들어서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 저번에 주운 아티팩트들을 교환했는데.”
“어느 가게에서 교환했는데?”
“<유르상의 춤추는 쥐> 가게에서...”
“저런. 손해 봤군. 다음부터는 거기서 교환하지 마. 들어보니 거기는 아티팩트를 조금 싸게 구입하는 곳이거든. 거기보다 다른 곳이 좋은데...”
방드르는 이한의 말에 홀린 듯 끌려들어갔다.
워다나즈의 목소리는 마치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구른 길드원 같은 노련함이 있었다.
“...알겠지?”
“알, 알겠다. 고맙다. ...그런데 넌 이걸 어떻게 아는 거냐?”
“나도 아티팩트를 교환하려고 이것저것 알아봤거든.”
“......”
‘졌다!’
이한이 학년 수석으로 칭찬받을 때도, 다른 학생들이 따라하지 못하는 마법을 보여줄 때도 이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었다.
방드르는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졌어...!’
“그런데 이 분은 누구야?”
이한의 친구들이 먼저 대답했다.
“최고의 환상 마법사.”
“환상 마법의 달인.”
“그리고 우리한테 아티팩트 가게를 안내해준다고 하셨어.”
‘그런 적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