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난 속지 않는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을 바칠까 살짝 고민했던 이한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미 경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한 명 제물로 바치면 길을 조금 열어준 다음, 또 제물을 바치라고 하겠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대체 무슨 소리냐? 누가 그런 불명예스러운 짓을 한다고?
그러나 이한의 말에 미궁의 석상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는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이 학교에서 일해왔다. 나를 만든 마법사가 세운 규칙대로 말이다. 여기 미궁의 규칙은 하나다. 한 명이 징벌방에 가면 다른 한 명은 반대편으로 간다. 그것 말고 다른 규칙은 없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단 말이냐?
‘이 학교의 교장이.’
이한은 속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어쨌든 두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미궁의 석상이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과, 해골 교장은 미궁의 석상보다도 명예가 없다는 것.
“무슨 일인데 발걸음을 멈췄...”
뒤에 있던 살코가 발걸음을 옮겼다가 같은 텔레파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한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씩 짝을 지어서 한 명이라도 앞으로 보내야겠군.’
살코는 ‘어떻게 친구를 버릴 수가!’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 마법학교에서 그런 건 사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이 필요하다!
징벌방에 가는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도 납득할 게 분명했다.
“뭔데? 무슨 일인데?”
닐리아도 발걸음을 옮기고 텔레파시를 들었다.
그리고는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감히 친구를 바치라고!? 여기 워다나즈나 투탄타가 그런 제안에 응할 줄 알아?!”
“!”
“!!”
이한과 살코는 흠칫했다.
어...
어어?
“잠깐. 닐리아.”
살코는 닐리아를 말리려고 했다.
저 제안을 거절했을 경우 난이도가 얼마나 올라갈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 준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할지도...
“왜?”
“잘 생각해봐라. 지금 제안을 거절했을 때 저 석상이 어떻게 까다롭게 굴지 모른다. 우리가 그 길을 통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징벌방에 간 친구들은 나중에 나와서 다시 도전하면 된다. 워다나즈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렇지 않나?”
살코는 이한을 쳐다보았다. 닐리아도 충격 받은 표정으로 이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한은 살코를 욕했다.
‘아니 이런 눈치 없는 놈 같으니.’
닐리아 안 보는 곳에서 물어야지 닐리아 보는 곳에서 물어보면 어떻게 동의를 한단 말인가.
이한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아니. 그런 불명예스러운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봐!”
“과연...”
닐리아는 물론이고 랫포드도 감탄했다.
살코 패거리도 놀란 표정이었다.
“역시 워다나즈...”
“푸른 용의 탑 놈들의 우두머리는 괜히 하는 게 아니군.”
사악함과는 별개로 이한이 가진 우두머리로서의 품격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살코도 물러서는 상황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꼿꼿함이라니.
“보고 있겠지, 미궁의 석상! 우리는 그런 추잡한 거래에는 응하지 않는다!”
닐리아는 바로 화살을 메긴 뒤 쏘아 날렸다. 미궁의 석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명예를 실력으로 증명하라!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후회되기 시작하는데...’
* * *
복도의 변화가 끝나자 이한은 미궁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코와 같은 구역에 떨어진 것이다.
살코는 이한을 보며 물었다.
“아직도 받아들이면 안 됐다고 생각하나?”
“...물론.”
이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속으로는 후회하고 있었지만 그걸 살코한테 드러낼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 냉정한 얼굴에 살코는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네 명예는 인정할 수밖에 없군.”
“이해해준다니 고맙다.”
‘지금이라도 살코를 바칠 테니 나가게 해줄 수는 없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미궁의 석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코는 지팡이를 들더니 주문을 외웠다.
“모여라, 흙이여.”
다른 탑인 이한도 소문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로 살코는 흙 원소에 재능이 뛰어났다.
미궁의 벽 아래로 흙이 모이더니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비탈이 만들어졌다.
“훌륭하군. 살코.”
이 미궁이 얼마나 복잡하고 넓은지도 모르는데 정공법으로 빠져나가려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헉... 헉.”
그러나 정작 살코는 창백해진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흙무더기를 만드느라 마력을 전부 소모한 것이다.
“괜찮나?”
“괜... 괜찮다. 올라가서 길을 보자고.”
둘은 흙무더기를 밟고 미궁의 벽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광활한 미궁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 맞아?
“......”
“......”
두 학생은 할 말을 잃었다. 이한은 금세 냉정을 찾고 말했다.
“예상보다 조금 넓긴 하지만 마법으로 길을 만들어서 직선으로 움직이자.”
“무... 무리다. 벽 하나 넘는데도 이 정도로 마력이 드는데.”
“아니. 내가 하겠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살코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이한이 학년에서 손꼽힐 정도로 마법에 뛰어나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벽 하나 넘는데도 이 정도 마력이 소모되는데 이한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기껏해야 벽 두세개 넘으면...
“모여라, 흙이여. 모여라, 흙이여.”
이한은 주문을 점검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다른 원소를 우선적으로 훈련하느라 흙 원소는 다뤄본 적 없었지만, 다행히 살코가 지금 사용한 마법은 그리 어려운 마법이 아니었다.
1서클 <흙 생성> 정도는 즉석에서 익힐 수 있으리라.
살코는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물과 번개가 네 주속성인 줄 알았는데 흙도 익혀놨었나?”
“아니. 지금 익히는 거다.”
“?????”
뒤에서 살코가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눈치채지 못했다.
“모여라, 흙이여!”
“!”
운이 좋았다. 한 번에 주문이 성공한 것이다.
‘다른 원소 마법들로 고생을 해서 그런지 수월하군.’
볼라디 교수를 비롯해서 여러 악당들에게 고통 받은 일들이 완전히 쓸모없지 않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흙더미가 바닥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살코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익히는데 저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긴 하군.’
이제 와서 워다나즈의 마법능력에 감탄하는 것도 새삼스러웠지만, 놀라운 건 사실이었다.
지금 익히는 녀석이 한 번에 성공하다니.
흙 원소 마법에 나름 자부심이 있는 살코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콰르르르륵!
“...?”
흙더미가 생각보다 거대하게 쌓이자 살코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어...
언제까지 생기는 거지?
드르륵!
주변의 미궁 벽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흙 생성> 마법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마법이 아니었다. 근처의 흙을 끌어오는 마법에 가까웠다.
지금 바닥 밑에서 벽들을 지탱하던 흙들을 강제로 끌어오는 바람에 미궁 벽들이 균형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살코는 경악했다.
“워다나즈! 대체 무슨...?!”
사람 몇 명은 가뿐히 묻어버릴 정도로 쌓인 흙더미가 그 무게로 벽을 넘어뜨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약해진 주변의 벽들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미궁의 벽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지며 커다란 길이 만들어졌다.
“...이걸 노리고?!”
살코는 경악을 넘어서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 이걸 노리고 길을 만들다니.
이게 어떻게 같은 학년이 할 수 있는 생각이란 말인가?
“바로 그렇다. 살코.”
“...!!”
살코가 전율하는 동안 이한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처음 쓰는 원소들은 정말 안전한 곳에서 조심히 연습해야겠다.’
건방 떨다가 흙에 깔려 죽을 뻔한 것이다.
* * *
“모여라, 흙이여!”
“모여라, 흙이여!”
“모여라, 흙이여!”
“????”
이한은 벽 여덟 개를 더 돌파했다. 물론 아까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얌전하게 흙무더기를 쌓아올리고 그걸 밟고 올라간다.
살코는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아까처럼 하는 게 더 빠르지 않나?”
“마력을 아껴야 해서.”
“아. 그렇군. 확실히 그렇겠어.”
그러는 사이 다른 곳에 흩어진 친구들도 합류했다.
“워다나즈!!”
“구하러 왔구나!”
“모여라, 흙이여!”
“워다나즈? 고맙다니까?”
“모여라, 흙이여!”
“워다나즈...!”
처음에는 구하러 온 이한과 살코의 모습에 반가워하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도 슬슬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한이 무슨 사악한 악마에게 홀린 마법사처럼 주문만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워다나즈 너 괜찮은 거 맞지?”
“말 걸지 마라. 집중에 방해되니까. 모여라, 흙이여!”
이한은 주문을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다.
뒤늦게 합류한 학생들은 당황했다.
“안... 안 쓰러지나?”
“어떻게 안 쓰러지는 거지?”
서너번 정도 연속으로 마법을 쓰는 건 ‘와 대단하다’정도였지만 수십번 연속으로 넘어가면 그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경이로울 뿐.
“투탄타. 너는 저게 안 놀라워?”
“전혀!”
여기 오기 전에 이한이 저것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흙더미로 벽들을 진동시키고 길을 만든 걸 본 투탄타였다.
저런 연속 마법 정도는 이제 놀랍지 않았다.
“!”
‘투탄타...! 저게 놀랍지 않다니!’
‘투탄타도 할 수 있다는 건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그저 감탄만 나왔다. 저 연속 마법에 놀라지 않다니!
‘나중에 흰 호랑이 탑 놈들 만나게 되면 투탄타가 저런 것도 할 수 있다고 말해야겠다.’
* * *
‘이건?’
빠르게 미궁을 직선으로 돌파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놀랍게도 흙무더기를 쌓아올리자 벽도 따라서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궁의 석상이 이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기지를 발휘해 미궁을 돌파한 것을 칭찬하겠다. 그러나 미궁의 출구를 찾지 않고 벽으로 통과하려면 당연히 제약이 있는 법이다.
‘하긴 너무 날로 먹긴 했지.’
다른 학생들은 온갖 지혜와 마법으로 방향을 찾았을 길을, 이한은 그냥 마력으로 무한흙무더기를 불러내서 돌파했으니...
-이제 이 벽만 돌파한다면 바깥이다. 어디 한 번 해볼 테면 해보도록 해라. 어린 학생들아.
미궁의 석상이 한 말을 들은 살코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살코에게는 지금 이 마지막 난관을 돌파할 방법이 있었다.
‘가문의 마법을 워다나즈한테 알려줘야 하나?’
제국의 제일가는 석공 가문인 투탄타 가문에는 내려오는 비전 마법들이 여럿 있었다.
살코 본인은 아직 수준이 되지 않아서 배우지 못했지만, 언젠가 실력을 갖추면 배우기 위해 몰래 외워놨던 마법.
그 마법을 워다나즈한테 알려준다는 게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워다나즈 혼자서 미궁을 돌파하는데 도와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던 끝에 살코는 결론을 내렸다.
“워다나즈. 내가 알려 줄 마법이 있다.”
꽝!!!!!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물의 구체가 벽을 직격했다.
회전하며 살벌한 소리를 일으킨 물의 구체는 미궁의 벽을 찢어발겼다.
미궁의 석상은 이한을 칭찬했다.
-훌륭하다. 어린 학생이여. 너는 너의 명예를 실력으로 증명하였다! 지나고도 좋다! 네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고맙다.”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러서 물을 털어냈다.
가만히 기다려주는 미궁 벽은 이제까지 이한이 상대했던 몬스터들과 비교한다면 쉬운 상대였다.
얼마든지 준비를 해서 공격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살코. 마법을 알려주겠다고?”
“...으응.”
살코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저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