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어두워진 표정으로 살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가르쳐주려고 했던 마법은 <투탄타 가문의 바위 분해>다.”
“아니. 그런 마법이 있었다면 진작 말해주지 그랬나.”
“......”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다.”
이한은 순간 이빨을 빠득 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쨌든 <투탄타 가문의 바위 분해>는 같은 분해 계열 마법 중에서도 효율적이고 뛰어난 효과로 명성이 높았다.
똑같은 결과를 만드는 마법이라 하더라도 그 구조, 과정, 주문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기 마련.
그런 만큼 똑같은 결과를 만드는 마법이라 하더라도 어떤 마법을 고르는지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의 적성이 어떻게 맞는지, 자신이 주로 어느 상황에 쓰는지 등등을 고려해서 결정 내려야 하는 것이다.
비교적 단순한 하위 서클 마법에서는 이런 고민이 필요 없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필수적으로 변했다.
-이 상황에서는 <워다나즈 가문의 물 히드라 소환>을 사용해야 한다니까!
-머저리 같으니! 네놈의 마법 실력이 나를 눈물 나게 한다! 그런 비싼 마법을 쓸 필요 없다! 평범한 <거대 물 뱀 소환>정도면 되는 것을!
-그 정도 되는 마법으로는 이 불타는 용암 사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니까!
“그렇군. 투탄타 가문의 명성은 나도 들은 적 있다. 그런 가문의 마법을 가르쳐준다니. 그래도 되나?”
“......그래.”
살코는 상당히 긴 침묵 끝에 대답했다. 이한은 상대가 가문의 마법을 가르쳐주는 것 때문에 저렇게 고민하나 싶었다.
‘하긴 가문의 마법을 가르쳐주는 게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겠지.’
가르쳐준다고 결정을 하긴 했지만 고민되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이한은 살코를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살코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자. 주문은 다음과 같다.”
살코는 <투탄타 가문의 바위 분해>의 주문과 동작, 그리고 필요한 재료(부수려는 바위의 조각 한 줌)와 자세한 과정을 말해줬다.
투탄타 가문의 엘프는 어지간한 마도서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상세하게 암기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한도 이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법을 익히는 게 쉽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뭐지?’
이한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걸 느꼈다.
마력과 별개로, 복잡한 마법을 여러 번 썼을 때 집중력이 소모되서 올라오는 두통에 가까웠다.
지금 이 <투탄타 가문의 바위 분해> 마법은 그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몇 번이고 더 시도해봤지만 두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한은 잠시 멈췄다.
“투탄타. 넌 이 마법을 익히는 데에 얼마나 걸렸나?”
“나는 아직 이 마법을 익히지 못했다.”
“...?”
이한은 순간 의아해했다.
이 자식이?
‘아니. 아니겠지 설마.’
“그렇군. 그래도 이 마법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마법은 아니지? 몇 서클 정도 되나?”
이한은 한 2서클, 아니면 정말 많이 양보해도 3서클 정도를 예상했다.
“......”
그러나 이한의 질문을 받은 살코는 갑자기 우물쭈물했다.
그러더니 대답했다.
“4... 서클이긴 한데.”
“......”
이한은 정색하고 살코를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정면에서는 못 이기니까 다른 방식으로 암살을?
* * *
살코는 정말로 이한을 암살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을 데리고 미궁을 돌파해줬는데 그런 짓을 하는 건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정말로...
‘내가 왜 그랬지?’
...워다나즈한테 4서클 마법을 전해준다는 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못 떠올렸을 뿐이었다.
살코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가문의 마법을 알려줘도 되나, 안 되나 고민하기 전에 1학년에게 이런 마법을 알려줘도 되나로 고민을 하는 게 정상인데...
“그래. 살코.”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이한은 수습하기 위해 말했다.
“아마 이 <투탄타 가문의 바위 분해> 마법은 4서클 마법 중에서도 상당히 쉬운 축에 속하는 모양이지? 그러니 나한테 가르쳐 준 거고.”
같은 서클의 마법이라고 다 난이도가 같지는 않았다.
이 마법이 4서클 마법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쉽다면 가르쳐주려고 한 것도 이해가 갔다.
“아니다. 워다나즈. <투탄타 가문의 바위 분해>는 4서클 마법 중에서 손꼽히게 어려운 마법이다. 내가 들은 말 중에는 5서클 마법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저. 투탄타.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닐리아가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투탄타도 뒤늦게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분위기는 이미 한층 더 어색해진 뒤였다.
“......”
“......”
이한과 투탄타가 서로 말없이 침묵에 빠져들자 사이에 있던 닐리아만 죽을 맛이었다.
“...4층으로 가는 계단이야! 저길 봐!”
“4층 계단이군.”
“4층 계단이다.”
“4층 계단하니까 4서클 마법이 생각나는데... 아차. 아니다.”
“...미안하다. 워다나즈.”
살코는 사과했다.
설마 투탄타 가문의 마법을 가르쳐주고 사과해야 할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투탄타. 그럴 수도 있지.”
‘거리를 좀 벌린 것 같은데?’
닐리아는 이한과 투탄타의 거리가 조금 멀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쉬이익!
“!”
4층 복도로 올라오자마자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는 유령 몬스터가 복도를 질주해서 달려왔다.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라 계단으로 피하려고 했다.
“아래로 내려...”
팍!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타오르는 듯한 흰 광선이 번쩍이며 유령 몬스터에게 꽂히더니, 순식간에 형체를 감춘 것이다.
이한은 멀리서 퍼져 나오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빨리 피해! 신입생들이야!
-이 자식이 탈출해서...! 쟤네는 왜 4층까지 올라온 거야?!
-중간고사 기간이잖아!
‘좀 더 잘 숨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마법학교의 선배들이 탈출한 유령 몬스터를 잡으러 4층까지 온 것이다.
하도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다른 학생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 사라졌다?”
“괜찮은 거 맞지?”
유령이 사라진 4층 복도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사실 이게 원래 정상적인 학교의 복도였다.
‘딱정벌레 강의실이라고 했지.’
이한은 천천히 걸어가며 복도 옆에 배치된 강의실들을 확인했다.
그리핀 강의실, 메이킨 가문 강의실(아마 저 강의실이 만들어진 해에 넉넉하게 후원해준 게 분명했다), 맥주사탕 강의실, 불타는 붉은 깃발 격구(擊毬) 팀 강의실...
그리고 딱정벌레 강의실.
“!!!”
학생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4층까지 고생하면서 올라오긴 했지만, 학생들 중 어느 누구도 바로 강의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이... 이렇게 쉽게?”
“솔직히... 쉽진 않았지.”
학생들은 경계하며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강의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언데드 소환수가 학생들을 환영했다.
-잘 오셨습니다! 다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누구십니까?”
-저는 교장 선생님을 섬기는 소환수입니다. 다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한과 친구들은 머뭇거리며 흩어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학생들 앞에 종이와 깃펜이 나타났다.
-이제 문제를 푸십시오. 다 풀면 제출하고 나가셔도 됩니다.
‘의외로 멀쩡해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군.’
이제까지 계속 비정상적인 것만 나오다가 멀쩡한 시험이 나오자 그건 그거대로 놀라웠다.
이한은 시험지를 붙잡았다.
4층까지 오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사실 시험에서 중요한 건 시험장소까지 찾아가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 푸는 능력이었다.
첫 번째 질문. 교장 선생님의 본명을 정확하게 쓰시오.
두 번째 질문. 교장 선생님이 마법 <죽은 태양의 영광>을 개발한 게 몇 년도인지 쓰시오.
세 번째 질문. 교장 선생님이 마법학교의 흑암관을 증축한 게 몇 년도인지...
“......”
* * *
닐리아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깃펜을 입에 물었다.
‘아니 내가 교장 선생님이 뭘 하셨는지 다 외워야 해? 그게 인성 교육하고 무슨 상관인데?’
속으로는 이런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어쩌겠는가. 학생인 이상 풀어야지.
“이거 조사하고 다시 오면 되는 거 아닌가?”
-다시 방문하면 문제도 달라질 겁니다.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다시 시험지를 쳐다보았다.
닐리아는 무심코 이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워다나즈는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샤샤샤샤샥!
“...?!”
닐리아는 경악했다.
이한은 쉬지 않고 깃펜을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랑 다른 시험지 받았나?!’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놀랍게도 워다나즈는 이딴 시험지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답을 작성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깃펜을 움직이는 모습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워다나즈... 나만 공부 안 한 거야?’
갑자기 위기감이 든 닐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도 닐리아와 비슷한 얼굴로 워다나즈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것까지 공부를 해놨다고? 시간이 썩어서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얼마나 한 거야?’
다른 학생들이 모두 동작을 멈추고 이한만 쳐다보자, 언데드 소환수가 입을 열었다.
-학생 여러분. 부정행위는...
“아, 아닙니다.”
“오해에요.”
학생들은 급히 시선을 피했다.
닐리아는 다시 시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까처럼 문제가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니까!’
* * *
이한은 답을 내고 일어났다.
같이 온 학생들 중 절반 정도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생각보다 늦었군. 하긴 문제가 쉬웠으니까.’
물론 먼저 나간 학생들은 문제를 푸는 걸 포기하고 다시 공부해오겠다고 결정한 학생들이었다.
이한처럼 문제를 다 풀고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한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4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와 1층 본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벌써 주변은 새카맣게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저 멀리서 음산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정시마다 시간을 알려주는 종소리는 몇 번 들었었지만 오늘 종소리는 뭔가 좀...?
학생들아. 시험 기간을 맞이한 걸 환영한다! 모두 고통스러운 한 주가 되길! 그리고 술에 취한 놈들은 빨리 일어나는 게 좋을 거다!
“......”
학교 전체에 울려퍼지는 해골 교장의 목소리에, 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을 하나 끝냈지만 여전히 지옥 같은 한 주가 될 것 같았다.
* * *
“만점이다.”
“......”
이한은 볼라디 교수의 얼굴이 반갑게 느껴지는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정말로 스톡홀름 증후군이 발병이라도 한 것일까?
‘젠장. 다른 교수들이 자꾸 미친 짓을 해서 볼라디 교수가 낫게 느껴지는군.’
기대했던 것처럼, 볼라디 교수는 복잡한 시험이나 과제를 내지 않았다.
물 원소 마법 몇 개를 시전하게 한 다음 깔끔하게 만점을 줬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이한이 중간고사 기간 이전에 개고생을 해서 마법을 완성시킨 것이었지만...
불행히 이한은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유미디후스 님이 칭찬을 많이 하더군.”
“예. 과분하게도 저를 좋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유미디후스와 볼라디 교수의 관계를 생각해봤을 때 서로 정보 교환이 안 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오고닌을 상대로 이겼다고.”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까?”
유미디후스는 분명 그 자리에 없었는데?
“키르민 쿠 교수가 말해줬다.”
“아하.”
이한은 키르민 교수를 속으로 저주했다.
기껏 친구를 도와줬더니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다니.
볼라디 교수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좋게 봐줬는데 실망이었다.
“환상 마법은 마법전투에서 까다로운 적이다. 대응하는 법을 익히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니 잘 됐군.”
“감사... 합니다?”
볼라디 교수는 칭찬인지 환상 마법의 욕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가자.”
“예? 어딜 말입니까?”
이한의 질문에, 볼라디 교수는 이한을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질문을 한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던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