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있다고?”
“응.”
이한은 볼라디 교수의 강의 장소가 강의실에서 지하 던전으로 바뀌었다고 털어놓았다.
효율적인 강의를 위해서 그렇게 됐다고...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니야?”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하던 닐리아는 이한이 서글픈 눈빛을 보내자 당황스러워했다.
농담이 아니라고?
“대체 왜 강의를 지하 던전에서 하는데?”
“거기에는 긴 사정이 있지.”
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정을 지금 말한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터.
“일단 지하 던전에 들어갈 계획부터 짜보자고. 뼈살이꽃을 구해와야 하니까. 시행착오까지 감안하면 한 사람당 대여섯 송이는 있어야 할 텐데.”
“던전에서 뭐 나와? 슬라임? 스켈레톤?”
“나찰아귀 나오더라.”
“......”
닐리아는 이한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심인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아 귀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한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나찰아귀가 나올 정도면... 그냥 다른 던전을 찾는 게 맞지 않아?”
“다른 던전 찾는 것도 시간이 걸리잖아.”
“그건 그렇지만.”
보통 다른 던전 찾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고 위험한 던전에 밀고 들어가나?
‘워다나즈가 학교에 물들어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닐리아는 다른 던전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나찰아귀 나오는 던전을 밀어보겠다는 이한의 모습이 걱정됐다.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더 신중했던 것 같은데...
“다른 친구들 정신 돌아오면 같이 데리고 가야지. 그나마 교장 선생님 시험은 끝나서 다행이군.”
“부럽다. 난 다시 가서 봐야 해.”
“그래?”
이한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닐리아를 쳐다보았다.
“목표 점수가 몇 점이길래 다시 보러 가는 거지?”
“...난 낙제만 피하는 게 목적인데.”
“그래? 그러면 굳이 다시 보러 갈 필요 없지 않나?”
“워다나즈... 네가 생각하기에 지금 내 점수가 몇 점 같은데?”
닐리아의 목소리에 살짝 날카롭게 변했다.
이래서 공부 잘 하는 친구는!
* * *
이한은 닐리아의 <기초 마법 인성 교육>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기분을 달래줄 수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문제가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더르규.”
“이한.”
저 멀리서 피곤한 얼굴의 오크 친구가 보였다. 이한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술 마셨나?”
“...조금...”
“더르규. 학교에서 주는 걸 덥석덥석 좋다고 마시면 안 된다.”
“나도 안다. 반성하고 있다. 이한.”
1학년치고는 이상한 대화가 오갔지만 아무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나?”
“그다지?”
더르규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답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있어서 마법학교의 성적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기사로서 활약하기 위해 마법을 배우려고 하는 이들.
필요한 마법을 배워서 나가는 게 중요하지 그깟 성적이 중요하진 않았다.
‘무시무시한 놈들 같으니.’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공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푸른 용의 탑에 소속된 대가문 출신 학생들은 나름 가문의 명예나 이름이 신경 쓰여서 최소한의 품위를 갖추려고 하는데(가이난도는 제외하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야말로 맹수 그 자체였다.
솔직히 좀 부럽다!
학교 나와도 일할 곳이 정해져 있으니 저런 배짱을 부리는 것 아닌가.
‘그래도 저런 놈들이 밑에서 깔아주면 고마운 거지.’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가 필수는 아니지.”
“이한.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한 것 같군.”
더르규는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마법학교 학생들 중에서 가장 공부에 열심히인 것 같은데...
“핫! 하앗! 흐아아악!”
“헛! 후욱! 헙!”
앞으로 걸어가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서로 목검을 부딪혀가며 땀방울을 흘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설마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건가?”
“아... 아니. 검술 강의도 곧 시험이니까...”
더르규는 친구들을 변호했다.
물론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이 골치 아픈 시험 때문에 검술로 도피하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원래 기사 가문 출신들은 머리 아픈 일 생기면 검을 휘두르며 생각을 털어내는 법.
“하긴 그렇겠군.”
“더르규! 너도 와서 검이나 좀 휘둘러! 술에서 깨야지!”
“책 붙잡고 끙끙대다가 검 휘두르니까 속이 시원하다고!”
“......”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의 외침에 이한은 더르규를 빤히 쳐다보았다. 더르규는 황급히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모라디.”
“워다나즈.”
지젤은 이한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한도 마찬가지로 지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서로 ‘저 자식 좀 꺼졌으면 좋겠군’하고 있는 것이다.
“술을 안 마셨나?”
“얼간이들이나 마시는 거지. 그러는 워다나즈 너는 왜 안 마셨지?”
“교장 선생님이 주는 건 입에 대지 않는 편이지.”
“......”
생각보다 더 미친 이유에 지젤은 경악했다.
뭐라는 거야?
“다들 검술 훈련을 하는데 안 해도 되나?”
다른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공부하기 싫어서, 아니, 검술 시험을 대비해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젤은 혼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공부는 평소에 하는 거지.”
‘아니, 가이난도 같은 소리를?’
물론 가이난도와 모라디는 전혀 달랐다. 비교하는 게 모라디한테 실례일 정도로.
“그래도 직전에 준비하는 게 필요할 텐데.”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지젤이 할 말만 하라는 듯이 퉁명스럽게 묻자 이한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중간고사 직전인데 유난히 침착하군.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나?”
‘탁’하는 소리와 함께 지젤은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덕분에 책의 제목이 보였다. <오수 고나달테스의 마법학교를 위한 헌신>이었다.
‘모라디도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시험 준비하나보군.’
이한은 이미 2주 전에 공부를 끝낸 책이었다.
“있지.”
“역시 그랬군.”
이한이 굳이 모라디에게 말을 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검술 강의 관련해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보여주는 수완은 상당한 편이었다.
본인들부터가 기사 가문 출신인 만큼 이런저런 소문을 들을 수 있었고 아는 정보도 많았다.
저번에도 백양목 기사단이 온다는 걸 미리 알아내지 않았던가.
모라디라면 중간고사 관련해서 미리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냥 알려줄 리는 없었다.
“뭘 원하지?”
“글쎄.”
지젤은 거만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뭘 해줄 수 있는데?”
“난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시험을 벌써 보고 왔다. 문제와 교환하는 건 어떻지?”
“!”
평소 표정 변화가 드물던 지젤의 얼굴이 흔들렸다.
물론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시험은 계속 문제가 바뀌지만...
직접 가지 않은 지젤은 거기까지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통하겠군.’
지젤은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서 워다나즈와 거래하는 건 그렇게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워낙 영리하고 교활한 놈이라 방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냥 제안을 거절해서 워다나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좋은 제안인데.’
지젤은 흰 호랑이 탑 소속이라는 걸 부끄러워하진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흰 호랑이 탑이 학업에 집중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왜 그렇게까지 머리를 써야 하지? 그건 다른 놈들이 하면 되잖아’같은 소리를 하는 곳.
그런 만큼 학업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래 하긴 우리는 기사니까!’하면서 책을 던지는 일이 잦아졌다.
멍청함을 혐오하는 지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같이 공부할 놈이 없다니!
그에 비해 워다나즈 놈은 성적이 뛰어난 푸른 용의 탑 학생 중에서도 수석으로 꼽히는 녀석.
능력만 놓고 보면 부족함이 없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태연하게 잘못된 답을 가르쳐 줄 놈이라 그렇지.
“...좋아.”
“잘 됐군. 계약 성립이다.”
이한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중에 시험지를 받아든 지젤이 분노할 수는 있겠지만 어쩔 것인가.
마법학교에서는 속는 놈이 잘못한 거였다.
“둘이 벌써 이야기를 했나?”
이야기를 마치자 더르규가 다가왔다.
“모라디. 이한한테 말해줬나? 중간고사에 대해서?”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는데?”
지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자 더르규가 당황했다.
“...그야 우리는 한 조잖아.”
“......”
“......”
이한과 지젤은 그제야 셋이 한 조라는 걸 깨달았다.
저번에 했던 것처럼 중간고사도 이 멤버로 본다는 것도.
‘...괜히 헛짓거리했군.’
가만히 있었으면 모라디가 알아서 알려줬을 텐데...
“계약은 이미 끝났어.”
“걱정 마라. 모라디. 난 약속은 지킨다.”
이한의 말에 지젤은 놀란 눈빛을 던졌다.
그리고는 살짝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뭐지?
“수상한데...”
“모라디. 이한이 그래도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다.”
“헛소리 좀 하지 마 초이. 네가 그러니까 워다나즈한테 세뇌당했다는 소문이 도는 거야.”
* * *
“...어... 꼭 이렇게 사람을 모았어야 했어?”
닐리아는 이한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도서관의 커다란 책상에 모여 앉아 있는 학생들의 구성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부터 시작해서(놀랍게도 가이난도도 있었다), 닐리아나 랫포드 같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
...거기에 불사조 탑 사제들과 흰 호랑이 탑의 지젤이나 더르규까지?
“알려달라는 사람들은 많은데 나도 내 공부를 해야 하잖아.”
‘싸움 날 것 같은데.’
닐리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한도 자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시간을 더 뺏을 수는 없었다.
“자. 여기 내가 정리한 문제들이 있다. 이걸 보고 암기하도록.”
“어... 그냥 암기해야 해? 뭔가 다른 방법 없어?”
가이난도가 순진한 질문을 던졌다. 이한은 정색하고 말했다.
“없어. 외워.”
“으... 으응.”
이게 무슨 고난이도 마법응용문제도 아니고, 단순암기시험에 가까운 만큼 가장 효율적인 건 나올 법한 문제 만들어서 외우기였다.
이한은 친구들한테 종이를 던졌다.
교장이 <하급 조종> 마법 배워서 필사 연습하라고 할 때는 ‘대체 왜 저렇게까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런 상황이 되자 확실히 편했다.
물론 감사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나저나 백양목 기사단원이 또 온다니.’
이한은 자기 공부할 책들을 펼쳐놓고 읽으면서 동시에 오늘 들은 이야기를 생각했다.
검술 강의의 중간고사를 위해 백양목 기사단이 또 오는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더 강한 사람하고 붙이진 않겠지? 진짜 1학년 상대로 그런 양심 없는 짓을 하진 않으실 거다.’
솔직히 저번에 기사들과 싸우게 한 것도 양심 없는 짓이었다. 이한은 잉걸델 교수를 믿었다.
책 하나를 다 읽은 이한은 책을 덮고 눈을 잠깐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중얼거리며 외우고 있던 가이난도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무슨 강의야?”
“시험 공부하는 게 아니라 잠시 쉴 겸 보는 거다.”
이한의 대답에 가이난도가 공감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난도도 중간고사를 대비하면서 각종 딴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도 똑같구나!’
“뭐 읽어? 이번에 나온 토베리즈 시리즈 재밌어. 주말에 내가 사온 잡지 중에 새 카드 소개...”
“음? 교장 선생님이 휘갈긴 마법주문.”
“......”
“......”
가이난도만 경악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자리에서 열심히 암기하고 있던 학생들 모두 동시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한을 경악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아. 심심풀이로...”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했다. 닐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