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쫓아가!”
“뭐?!”
“워다나즈한테 질 수는 없잖아! 승마에서까지 질 생각이야?!”
“하지만...”
학생 중 한 명이 머뭇거렸다.
지금 저렇게 폭주하듯이 달려 나갔다가는 뒷감당이 불가능했다.
말은 살아있는 생물.
저렇게 달렸다가는 금세 지칠 텐데...
“에잇! 간다!”
“나도!”
그러나 결국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둘 채찍을 들고 말들을 몰기 시작했다.
어느 탑 학생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말에 관해서는 자존심이 대단했다.
귀족 가문 출신이든, 기사 가문 출신이든, 상인 길드 출신이든 어디 가서 말 못 탄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워다나즈가 저렇게 달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워다나즈가 설마 아무 생각도 없이 저렇게 폭주하겠어?’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이한을 믿었다.
설마 이한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저렇게 폭주했을까?
아마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그 방법을 따라하면...
선두그룹에 있던 학생들이 미친듯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닐리아도 친구들이 나가는 걸 보고 초조해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놀랍게도 요네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요네르? 왜 그래? 괜찮아?”
요네르는 매우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밤색 털 말 위에 앉아있었다. 닐리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자!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금세 따라잡아! 내가 다른 놈들 올가미 걸어서 떨어뜨릴 수도 있고!”
태연히 규칙을 어기려는 닐리아였지만 요네르는 지적하지 않았다.
더 당황스러운 걸 방금 봤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
요네르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 말로 변신한 그리폰이 이한의 명령을 무시하고 폭주하듯이 달려 나갔다고!
* * *
‘내가 몬스터를 믿은 대가를 치르는 건가?’
이한의 불신을 느꼈는지 그리폰이 사납게 콧김을 내뿜었다. 이한은 달랬다.
“오해다. 자. 속도를 늦춰봐라. 네가 지칠까봐 그래.”
물론 이한은 그리폰이 속도를 늦추는 순간 내려가서 한 대 때릴 생각이었다.
그리폰이 그런 흑심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다른 부분이 그리폰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나는 지치지 않는다!
-푸히히힝!
그리폰은 더욱 더 달렸다. 몇 년 동안 달리지 못해서 달린 것에 한이 맺힌 말 같았다.
‘앞으로는 변신한 몬스터를 절대 믿지 말아야겠군.’
이한은 그리폰을 단단히 붙잡았다. 워낙 빠르게 달려서 이한도 이제 방심할 수가 없었다.
재수 없으면 주인도 떨어뜨린다!
까악!
사납게 생긴, 학과 닭을 섞은 것 같은 새 몬스터가 옆의 나무에서 덮치듯이 내려왔다.
‘나찰조!’
상당히 공격적인 새 몬스터의 등장에 이한은 긴장했다.
그러나 그리폰은 콧김을 한 번 내뿜더니 더 가속했다.
쾅!
나찰조는 날아오면서 따라오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리폰이 거리를 벌리자 따라오던 나찰조는 헉헉대더니 포기한 듯이 날아가 버렸다.
“......”
나타난 몬스터는 나찰조 하나가 아니었다.
길가에 있던 바위가 갑자기 일으키더니 위협적으로 돌을 휘둘렀다.
그리폰은 무시하고 내달렸다.
갑자기 강물에 설치되어 있는 다리가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리폰은 무시하고 뛰어넘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폰은 무시하고 돌파해버렸다.
“...너 마음대로 해라.”
이한은 포기했다.
이쯤 되자 어디까지 하나 궁금해질 정도였다.
* * *
푸른 용의 탑 3학년, 페르세는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친구가 물었다.
“왜 그래, 페르세?”
“우리 공격수들이 하나같이 다 너무 느려.”
“걱정하지 마. 적응하고 나면 말들도 속도가 빨라질 거야. 말들도 살이 붙을 시간을 줘야지.”
“말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기수도 문제라고.”
페르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러 선수들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격구에서 속도는 단순히 말의 체력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기수의 배짱과 실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스틱을 들고 달려오는 적들이 있어도 죽을 각오로 말을 몰아버리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속도가...
다그닥다그닥다그닥다그닥!!!
“......”
“......”
너무나 빨리 달려 나가는 말 때문에 날아온 바람이 둘의 모자를 날려버렸다.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이 황급히 비켜설 정도였다.
“방, 방금 뭐였지? 학생 맞지? 학생이었지?”
“신입생... 신입생 같은데? 신입생들 시험...”
“바로 저거야! 바로 저거라고!”
페르세는 눈빛을 빛내며 외쳤다.
몬스터가 앞에 있든 말든 미친놈처럼 몰아대는 저 배짱.
저게 바로 공격수가 가져야 할 정신이었다.
“쟤는 신입생이잖아 페르세...”
“내년이 있어! 내년에 부르면 되지!”
“쟤가 격구 클럽에 관심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
“?”
“저런 실력을 갖고 있는데 격구에 관심이 없을 리가 없잖아!”
* * *
폰리그는 드디어 멈췄다.
-푸흐흐흐흐흐흐흥!!
“속이 시원하냐?”
폰리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땀을 탈탈 털어내더니 냇가로 고개를 기울여 목을 축였다.
‘정말 멀리 왔군.’
이한은 주변을 확인했다.
마법학교 부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멀리 올 줄이야.
산맥 아래를 따라 미친듯이 내달린 것이다.
그런 이한의 눈앞에 펼쳐진 건 사막이었다.
“...?”
웬 사막이 학교 부지 안에 있어?
-푸히힝.
물을 다 마신 폰리그가 가자고 말했다.
“폰리그.”
-푸흥?
“만약에 제한시간 내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난 네게 실망할 거다.”
-......
신나게 원 없이 달린 폰리그는 이한의 말에 담긴 서늘함에 정신이 들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물론 두리번거려봤자 폰리그라고 이 주변을 알 리 없었다. 폰리그가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시간 내에 돌아갈 수 있겠지?
“가자. 폰리그.”
폰리그는 전력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 왔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이한은 단단히 몸을 고정시킨 채로 앞을 노려보았다.
“...?”
길가에 널브러져서 뻗어 있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뭐지?’
처음에는 몬스터한테 당한 줄 알았는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멀쩡해보였다.
그냥 지쳐서 나가떨어진 게 분명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이한이야 폰리그가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폭주해서 끌려왔다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순전히 자기들이 욕심을 부려서 달렸다가 탈진한 게 분명했다.
이한은 안타깝다는 듯이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일이 교훈이 됐겠지.’
* * *
“...만점이다.”
“감사합니다.”
“...대체 왜?”
번개걸음 교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1등이 만점을 받는다.
이건 당연했다. 번개걸음 교수도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 1등이 다른 학생들보다 세 배는 먼 거리를 갔다가 돌아오는 건(그것도 준비해놨던 장애물들을 다 흩뜨릴 정도로 질주하면서) 좀 이야기가 달랐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달린 거야?
“네 뒤를 따라가다가 탈진한 학생들이 다섯이고 낙마한 학생이 셋이다. 먼저 질주해서 몬스터들을 다 쫓아낸 건 그나마 행운이었겠군. 적당히 돌아왔어도 됐는데... 그렇게 신기록을 세우고 싶었던 거냐?”
번개걸음 교수가 보기에 이한은 그렇게 뽐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신기록을?
승마술에는 자존심이 강해서 전설을 남기고 싶었던 건가?
물론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교수님께서 이런 말을 주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리폰을 떠넘긴 게 누군데 ‘왜 그렇게 신기록을 세웠니’라니.
뻔뻔해도 이런 뻔뻔함이 없었다.
교수라서 이렇게 뻔뻔한 건가?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의 생각처럼 뻔뻔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리폰은 그렇게 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억지로 말로 변신한 상태인데. 네가 명령을 하지 않았으면 뛰지 않았겠지.”
“...?!”
이한은 교수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뛰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었는데?’
설마 이한이 능력 증명할 기회를 너무 안 줘서 그렇게 되어버린 건가?
“제가 녀석을 너무 무시했나봅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서...”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들었다.
그리폰이 고작 그런 이유로 저렇게 열심히 뛴다는 게 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입니다.”
“그래. 일단은 믿어주마. 고생했고, 들어가서 푹 쉬어라. 다른 시험도 봐야 할 텐데 그렇게 달리느라 고생이 많았다.”
“저보다는 폰리그가 고생이 많았죠.”
이한은 그렇게 말하고 출발선으로 돌아와 귀환하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꼴이 엉망이 된 학생들이 하나둘씩 귀환하면서 이한을 경외감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봤지?”
“봤지.”
“저 자식은... 제국 최고의 기수가 될지도 몰라...!”
“......”
이한은 그냥 쉬러가야겠다고 결심했다.
* * *
몇몇 학생들은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마법학교는 학생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뼈살이꽃을 구해 와야 해. 걸리는 시간을 고민하면 오늘도 아슬아슬하니까.”
“내 허벅지가 불타는 것 같은데.”
“골반에 금이 간 것 같아...”
저녁이 되기 전에 지하 1층에 모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지팡이를 짚고 골골댔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런 걸 보고 비웃었다.
“말 타는 것 가지고 그런 소리를 하다니 어지간히 단련이 부족 크윽...”
“워다나즈 놈... 대체 왜 그렇게 미친 것처럼 말을...”
이한은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했다.
“자. 다들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은 연금술 듣는 사람들끼리 힘을 합칠 때다. 재료를 최대한 빠르게 확보하지 않으면 전원 다 낙제할지도 몰라.”
마법학교의 끔찍한 스케줄은 다른 탑 학생들도 서로 협력하게 만들었다.
이한은 학생들을 모아서 빠르게 던전을 돌파한 다음 재료를 챙겨서 나올 생각이었다.
괜히 혼자 재료 챙기겠다고 들어갔다가 실패하거나 다친다면 이한만 손해였다.
“자. 다들 받아라.”
이한이 휴게실에서 갖고 온 바구니를 건네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의아해했다.
“던전 공략에 필요한 마법 물약인가?”
“아니. 저녁 간식.”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바구니 위를 덮은 천을 걷었다. 샌드위치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어... 어?”
“뭐야. 생각 없나?”
“워다나즈. 배 안 고픈 놈들한테는 주지 마.”
아산의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허겁지겁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잘 먹을게!”
“그래. 준비됐으면 슬슬 들어가자.”
이한은 학생들을 줄 세웠다. 던전의 지형 탓에 다 같이 모여서 진형을 짜는 건 무리였다.
어느 정도는 각자 탑끼리 모여서 손발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나하나 명령하는 것보다 자기들끼리 움직이는 게 더 빠르겠지.’
황녀는 무슨 샌드위치인지 궁금한 나머지 확인하려고 바구니의 천을 걷었다.
이한은 황녀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나중에 먹어야지.”
가이난도가 그런 것처럼 황족들은 식탐이 많았다. 이한은 경고하고 돌아섰다.
“...?!”
황녀는 당혹과 억울함과 슬픔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한은 학생들을 줄 세우고 점검하느라 바빠서 돌아보지 못했다.
“문제 생기면 알아서 진형 갖추고 대응해야 해. 위험하다 싶으면 신호 보낸 뒤 스스로 판단하고.”
“걱정하지 마라. 워다나즈. 우린 기사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바구니를 품에 소중하게 껴안고 말했다. 참으로 기사다웠다.
탁-
지하 1층에서 그렇게 마지막 점검을 하는 사이, 던전으로 가는 지하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왔다.
볼라디 교수였다.
“...지하 1층에서 소풍하는 것도 즐겁지 않나 다들? 슬슬 돌아갈까?”
“무슨 미친 소리야 워다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