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이한이 볼라디 교수 앞에서 지하 던전 들어간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도대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볼라디 교수는 교수 중에서도 예상하기 가장 까다로운 교수.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소풍이라니? 우린 지하 던전을 공략하러 나온 거잖아?”
그러나 눈치 없는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이한은 이를 꽉 악물고 중얼거렸다.
“조용히해라...”
“뭐? 잘 안 들려. 워다나즈. 소풍은 뭐고 왜 돌아가야 하는 건데?”
이한은 그냥 상대를 빠르게 기절시켰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볼라디 교수는 계단을 올라와서 학생들 앞에 선 뒤였다.
방금 말을 꺼낸 흰 호랑이 탑 학생도 볼라디 교수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무슨 일이지.”
이한은 재빠르게 대답을 뺏었다.
“지하로 다 같이 소풍을...”
“지하 던전을 공략하려고 워다나즈가 학생들을 모았습니다.”
‘죽여버릴까?’
볼라디 교수는 흰 호랑이 탑 학생의 말을 듣고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둘러보았다.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곧 지하 던전으로 내려갈 학생들이 뱀파이어 교수의 눈에 들어왔다.
이한은 볼라디 교수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리는 걸 볼 수 있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에 대한 분노가 싹 사라지고 얼음장 같은 공포가 올라왔다.
“잘했다.”
“...정말 별 거 아닌 일입니다만.”
이한은 볼라디 교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기 위해 주의 깊게 신경 쓰며 말했다.
“지속적인 훈련은 실력 향상의 필수조건이지만, 그걸 실천하는 마법사는 적다. 정진하도록.”
“중간고사에 필요한 재료 때문에 가는 겁니다. 교수님.”
“다른 던전도 있었을 텐데.”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그랬겠지.”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난 마법사는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몇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법.
지하 던전에서 필요한 재료가 있을 때 나약하고 게으른 마법사는 쉬운 곳에 들어가지만, 될성부른 전투 마법사는 일부러 어려운 곳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단련했다.
바로 워다나즈가 그런 마법사였다.
“마침 방금 던전을 관리했다.”
“......”
외진 곳에 위치한 자연발생한 던전이라면 안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든 이변이 일어나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마법학교 내에 위치한 던전들은 그러지 않았다.
당장 던전 안에 있는 몬스터들이 나와서 난동이라도 부리면 부서지는 건 교수들의 공방인 것이다.
볼라디 교수 같은 사람도 주기적으로 던전들을 확인하고 안의 상태를 점검했다.
던전 안의 마력 흐름은 어떤지, 몬스터 숫자는 어떤지, 폭주해서 위로 뛰쳐나올 낌새는 없는지 등등.
하지만 이한에게 볼라디 교수의 말은 조금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번에도 날 위해 특별하게 준비해주신 덕분에 그 난리가 나지 않았었나?’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불안감.
그런 이한의 마음도 모르고 친구들은 감사의 인사를 던졌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소문과 다르게 되게 친절하신 분이신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안 된다니까.”
“......”
* * *
“타올라라.”
허공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불꽃이 만들어졌다.
화염 원소의 장점은 낮은 서클의 간단한 마법으로도 충분한 파괴력이 있다는 점.
불사조 탑 사제가 불러온 화염에 적중당한 아귀는 순식간에 발이 느려졌다.
“타올라라!”
“불타라!”
가장 간단한 1서클 마법 <화염 생성>도 여러 학생들이 중첩시키면 그 위력은 더욱 올라갔다.
아귀는 순식간에 불타서 쓰러졌다.
“훌륭하군.”
이한의 칭찬에 사제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여럿이서 마법을 써서 고작 한 마리 잡았는데 무슨 훌륭까지.”
“너무 낭비가 심하잖아? 역시 전투는 검으로 하는 거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목검에 강화 마법을 걸 준비를 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까 볼라디 교수 앞에서 입을 놀린 것 때문에 원한이 남아 있던 이한은 차갑게 말했다.
“검 뽑아봐라. 어디 내 마법도 막아낼 수 있나 보자.”
“...워, 워다나즈. 왜 그렇게 정색을...”
“우, 우리가 사제님들한테 좀 무례하긴 했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의 표정을 보고 기겁했다.
몇 마디 으스댔다고 저렇게 워다나즈가 심하게 정색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차. 내가 무슨 짓을.’
이한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학생들과 손발이 맞아야 하는데 시작부터...
“미안하다. 내가 말이 심했군.”
“아, 아니야. 우리도 사제님들한테 말이 심했어.”
아산은 뿌듯한 표정으로 코밑을 쓱 훔쳤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진정 명예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친구인 게 자랑스러웠다.
“네가 자랑스럽다. 워다나즈.”
“??”
이한은 아산을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잠깐. 그쪽 길 말고 이쪽으로 돌아간다.”
“아귀가 나왔군. 흰 호랑이 탑에서 처리해라.”
“저쪽 벽은 조심해라. 아귀가 잘 숨어 있는 구간이다.”
“바닥 조심. 진흙이 깊다.”
다시 집중한 이한은 연속으로 지시를 내렸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따르던 학생들도 슬슬 이상함을 느꼈다.
‘...어?’
‘왜 이렇게 잘 알지?’
물론 여기 던전을 찾아낸 사람이 워다나즈인 만큼 초입부는 잘 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꽤 깊숙이 들어갔는데도 워다나즈는 던전을 완전히 꿰고 있었다.
마치 몇 번이고 왔다갔다한 것처럼.
“워다나즈 저 녀석, 이 던전을 이상할 정도로 잘 아는데.”
“아까 교수님이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교수님이었지? 그거 강의가 좀 이상하다던데, 여기서 강의한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농담 좀 하지 마. 어떤 미친 강의가 이런 던전에서 진행되겠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떠드는 걸 들으며 닐리아는 눈을 감았다.
워다나즈는 어지간해서는 남의 동정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워다나즈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어쩌다 저런 강의를 들어서...
좁은 통로가 끝나고 일렬로 가던 학생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광장 지형이 나왔다.
이한은 진지하게 말했다.
“자.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조심해라.”
“워다나즈. 슬슬 그만 걱정해도 된다고.”
내려오는 길에 나타나는 아귀들을 잘 상대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자신감은 상당히 높아진 상태였다.
사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탑 학생들도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 있는 얼굴이었다.
처음에 그렇게 긴장을 하고 들어온 것에 비해 수월하게 내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나찰아귀 나온다.”
“......”
“......”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다. 이제부터는 나찰아귀가 나오니, 놈의 영역을 피해서 움직일 거다.”
이한이 강제로 알게 된 볼라디 교수의 지하 던전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입구와 연결된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통로들.
여기에서는 아귀들이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서 마법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렇게 내려가다 보면 넓은 광장 형태의 지형들이 나왔다.
이런 넓은 곳에는 사실 아귀들이 거의 없었다. 어떤 미치광이가 일부러 몬스터를 모아 놓지 않는 한.
그리고 여기서 더 내려가면 나찰아귀가 나오는 구역이었다.
나찰아귀의 덩치가 있는 만큼 지형은 훨씬 넓어졌지만 그만큼 복잡해지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드넓은 바위산 골짜기.
여기가 지하 던전만 아니었다면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려가는 길 곳곳에 동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중 몇몇 동굴에는 나찰아귀가 있다. 나찰아귀는 식탐이 많은 몬스터라 사냥감의 기척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동굴 안에서 잠만 잔다. 그러니 나찰아귀가 있는 동굴은 멀리 피해간다. 그러면 상대할 일이 없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지?”
“내가 신호를 주겠다.”
“워다나즈 네 신호를 어떻게 믿지? 넌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믿기 싫으면 들어가 봐라.”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괜히 캐물었다가 이한이 정색하자 학생은 꼬리를 내렸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워다나즈가 유난히 날카로운 것 같은데.”
“위험한 곳이라 그렇겠지.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잖아.”
학생들은 설마 이한이 이 지하 던전 골짜기에서 자기 목숨 걸고 먼저 굴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 *
얼마나 더 내려왔을까.
동굴들을 최대한 피하며 내려온 학생들은 군락을 이룬 식물들을 보고 반색했다.
시아나 사제가 눈을 빛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뼈살이꽃이 맞아요!”
“찾았군.”
각 탑에서 학생들 두셋이 나와 꽃들을 조심스럽게 캐기 시작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곳곳에 서서 경계를 섰다. 나찰아귀가 있는 동굴들은 다 피했다지만 만약이란 게 있었으니까.
“잠깐. 저거 불빛 아니야?”
경계를 서던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손가락으로 비탈길 아래에 위치한 바위 뒤를 가리켰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지만 푸르스름한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빛 맞지? 아티팩트 아니야?”
더르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워다나즈가 저 동굴은 나찰아귀가 없다고 했잖아. 저긴 괜찮아.”
“그건 그렇지만 만약...”
더르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횃불을 들고 가파른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리고 바위 뒤를 확인했다. 정말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투구가 있었다.
“아티팩트야! 아티팩트라고! 더르규, 이거 봐!”
“알겠으니까 빨리 돌아와라!”
“그래. 지금 간다!”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다시 비탈길을 올라가려고 했다.
-■■■...
나찰아귀가 어느새 바위 뒤에서 나타나 학생을 노려보고 그르렁대기 전에는.
“...!”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에 학생은 근육이 뻣뻣해졌다. 손이 미끄러지고 체중이 실리면서 비탈길의 바위가 떨어져나갔다.
졸지에 길이 사라져서 나찰아귀와 같이 아래에 갇혀버린 상황.
더르규는 기겁해서 이한을 불렀다.
“이한!”
“!”
이한은 곧바로 반응했다. 더르규의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무슨...”
물어보지 않아도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 아래에 내려가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과 나찰아귀.
‘잠깐. 저 동굴에는 분명히 없었는데?’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흰 호랑이 탑 학생이 부주의하게 내려가긴 했지만 주변에 나찰아귀가 없는데 어떻게?
순간 이한의 머릿속에 볼라디 교수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 방금 던전을 관리했다.
“......”
볼라디 교수가 이한을 위해 돌아다니는 나찰아귀를 배치해서 다음에 들어왔을 때 적절한 자극을 주려고 했을 가능성은?
“버텨라! 내가 도와주러 갈 테니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이한은 그 실수를 덮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내버려두면 ‘어라? 이한이 나찰아귀 안 나온다고 했는데 왜 나온 거지?’하면서 이한의 책임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었다.
아래에 떨어진 흰 호랑이 탑 학생이 더 놀랐다.
워다나즈 놈이 ‘자업자득’이라며 버릴 줄 알았던 것이다.
더르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외쳤다.
“어떻게든 버텨라! 이한이 도와줄 거다!”
“무슨 일이야?”
“흰 호랑이 탑 놈이 아래로 떨어졌어!”
“왜?”
“몰라! 뭐 주우려고 했나봐!”
“저런 멍청한!”
이한은 친구들의 비난을 멈추게 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만해라.”
“워다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