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건방진 놈들.”
지젤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한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지젤을 쳐다보았다.
“건방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눈빛을 보면 보여. 못 느끼겠어?”
둔하지 않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새로 방문한 견습기사들의 시선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원래 곧 맞붙을 대련상대에게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울 필요는 없었다. 괜히 싸울 때 망설임만 생길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견습기사들의 시선은 그런 걸 감안해도 선을 넘었다.
오만한 자부심.
어디를 가던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를 놓친 적이 없던 지젤이었다.
저 시선에 담긴 감정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우리를... 무시하고 있군.”
더르규가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시하고 있지.”
“왜 너희들을 무시한다는 거지?”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이한. 잘 생각해봐라. 우린 기사 가문 출신이지만 마법을 배우려고 학교에 들어왔지. 그런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나?”
“저 놈은 검도 쓰고 마법도 쓰니까 두 배로 강하겠군?”
“......”
지젤은 이한을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고, 고맙다. 하지만 생각이 짧은 어린 기사들은 마법을 배우러 갔다고 무시하거나 시비를 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흠. 그렇군.”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가문들은 서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고 있을 테니, 그 가문의 후계자들이 서로 이렇게 자존심 다툼을 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어린 만큼 아주 사소한 것만으로도 자존심에 상처가 갈 테니...
‘정말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군. 어차피 나중에는 다 같이 일하게 될 상황인데.’
“워다나즈. 넌 분하지도 않냐?”
이한이 무표정하게 앉아있자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감히 외부에서 온 놈들이 시비를 걸다니.
“내가?”
“그래! 저 놈들이 너도 무시하고 있는 거라고!”
“난 기사 가문 출신 아니라서 상관없지 않나?”
“......”
“......”
그러게?
그제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이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도 자연스럽게 사이에 있어서 무심코...
“초이.”
견습기사 중 한 명이 더르규를 알고 있었는지 다가와서 인사했다.
더르규도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그렇다.”
“에인로가드의 소문은 많이 들었다. 혹독하게 마법을 가르친다면서. 검술을 훈련할 시간은 있었나?”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담겨져 있었지만 더르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더르규는 이한을 쳐다보았다.
“?”
‘음.’
이한을 보고 눈앞의 견습기사를 보니, 견습기사가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유치한 짓인지 느껴졌다.
이한이었다면 저런 유치한 짓을 할 시간에 상대에게 벌써 저주부터 날렸을 테니까.
“힘들었기에 오히려 검술에 집중할 수 있었지. 새삼 깨달은 거지만, 검술에만 집중할 수 있게 모든 환경을 맞춰준다고 좋은 게 아니더군.”
반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가문에서 넉넉한 시간과 푸짐한 식사, 편안한 이부자리를 제공받으며 검을 휘두른 것보다 여기 마법학교에서 실력이 더 빨리 늘었다.
가혹한 환경.
뛰어난 친구들과의 경쟁.
이런 것들이 검사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 말이 상대 견습기사의 기분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견습기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고난이 검술을 완성시키는 법이지. 하지만 네가 겪은 고난은 우리가 겪은 고난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거다. 초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검은 그럴 걸 비교해서 승패를 가려주지 않는다. 이 이상은 검으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군.”
“흥!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보여줄 생각이다.”
견습기사는 한층 더 찌푸린 얼굴로 돌아섰다.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지젤에게 물었다.
“저 견습기사들이 지내는 곳이 어디지?”
“도시에 있는 기사단 건물에서 머무르겠지.”
지젤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식사를 안 주나?”
“그럴 리가 있겠나?”
“혹시 외출이 금지되나?”
“도시에 있는 기사단 건물이라고 했잖아. 금지할 리가 없지.”
“...그런데 어떤 점에서 자기들이 더 힘들다고 하는 거지?”
이한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가울 정도로 서늘해져 있었다. 지젤도 놀랄 정도였다.
* * *
잉걸델 교수는 의욕적으로 눈빛을 빛내는 학생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직 어린 만큼 이런 상황에서 경쟁심을 불태우는 게 당연했다.
까마득한 격차가 나는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보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수련기사한테 졌을 때 훨씬 더 자존심 상하는 법.
심지어 워다나즈도 굳은 얼굴로 견습기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각오를 다진 좋은 얼굴이었다.
“교수님.”
“무슨 일입니까, 워다나즈?”
“저희는 마법학교에서 마법을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저번 대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법을 허용해주시는 게 옳다고 봅니다.”
당연히 잉걸델 교수는 이번 대련에서 마법 사용을 금지시켰다.
상대가 정식 기사도 아닌데 굳이 마법까지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검술에만 집중하는 게 맞았다.
물론 그러면 마법학교 학생들이 견습기사들에게 밀릴 수 있었지만...
잉걸델 교수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대련에서 밀린 탓에 자존심이 조금 상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마법학교 학생들이 검술에 몰두할 동력이 되어줄 테니까.
“안 됩니다. 검술 시험이니까요.”
“하지만 교수님. 검술 대련이라고 오로지 검만 휘두르지는 않잖습니까. 기회가 되면 타격 기술이나 관절 기술도 사용하는데, 저희에게 마법을 뺏으시는 건 너무 가혹합니다.”
이한의 논리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검술 대련이라고 오로지 검만 휘두르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었다.
필요하다면 빈틈을 노리고 주먹을 날릴 수 있어야 하고 상대의 다리를 걸어서 균형을 넘어뜨릴 수 있어야 했다.
이것도 넓게 보면 다 검술에 포함이 되는 것이다.
견습기사들이 밖에서 저런 종합적인 기술들도 연습하고 있는 동안 마법학교 학생들은 마법을 연습했으니, 대련에서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내가 너무 가혹했나?’
잉걸델 교수는 이한의 말에 살짝 반성했다.
학생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은 욕심에 너무 가혹했던 걸지도...
엘프 교수는 고개를 들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눈앞의 저 워다나즈 가문 소년에게 마법을 허용해주면 어떤 꼴이 날지 바로 예상이 갔던 것이다.
“안 됩니다.”
‘쯧.’
이한은 속으로 아쉬워했다.
‘마법만 사용하게 해주면 수월하게 이길 수 있는데.’
자만하는 게 아니라 나름 냉정한 예측이었다.
마법은 상대가 잘 모를수록 더욱 효과가 올라갔다.
견습기사들은 이한이 사용하는 마법을 전혀 모를 테니, 물 구슬로 발 묶고 저주 날린 다음에 번개 연타로 처리하면 그냥...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한은 목검을 들었다. 안 되는 방법 붙잡고 오래 끌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워다나즈? 왜 네가 나오는 거냐?”
상대 견습기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건강과 교양을 위해 검술 강의를 듣고 있다.”
“아... 그런건가.”
견습기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족들 사이에서 교양이나 흥미로 검술을 배우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검술들은 기사들의 진짜 실전 검술에 비교하면 어디까지나 체면치레, 겉핥기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거라고 생각하자 견습기사의 몸에서 힘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목검을 쥔 자세도 느슨해졌다. 전신에서 상대를 얕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에 이한은 흐뭇해했다.
‘마법학교에 입학했으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을 수준이군.’
이런 기본적인 속임수에 속다니.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시비 걸지는 않나?”
심지어 견습기사는 이한을 걱정까지 해줬다.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닌 만큼 경쟁 상대로 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다들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다. 덕분에 많이 부족하지만 따라갈 수 있군.”
“그래. 기사는 언제나 약자를 존중하고 돕는다.”
견습기사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첫날부터 삼대일로 덤벼들었지만 말이지.’
“그러면 시작할까?”
“그래.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견습기사는 목검을 잡고 섰다. 이한도 목검을 잡고 섰다.
잉걸델 교수가 깃발을 휘둘렀다.
빡!
견습기사는 순간 바위가 달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만큼 이한이 휘두른 일격의 위력이 예상을 초월했다.
‘엇’하는 사이에 손에 들린 목검이 그대로 부러져서 날아가고, 이한이 내민 목검이 자신의 목 앞에 멈춰서있었다.
“패배를 인정하겠나?”
“워다나즈의 승리!”
잉걸델 교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견습기사는 눈을 연신 깜박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 잠깐...!? 이게 무슨...?!”
그러나 이미 이한은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속임수를 쓴 이상 빠르게 튀어야지.’
“어디 갑니까 워다나즈?”
“끝난 것 아닙니까?”
“승자들하고 또 겨뤄야죠.”
잉걸델 교수는 반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한테 승리한 견습기사들이 하나둘씩 걸어오고 있었다.
이한은 순식간에 몸에 힘을 풀고 자세를 어설프게 잡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걸어오던 견습기사들은 이한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한이 비켈린츠 님을 이겼다고?
-그렇다니까.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마법을 써서 그런 거 아닌가?
‘두 번은 무리겠군.’
이한은 다음 싸움은 날로 먹을 수 없겠다고 직감했다.
* * *
“워다나즈. 하나만 물어보자.”
“뭐지?”
“정말로 비켈린츠 님을 이긴 건가?”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사실, 더르규와 모라디의 공이 더 컸지.”
“비켈린츠 님은 아니라던데?”
“......”
이한은 비켈린츠를 속으로 욕했다.
쓸데없이 정직한 기사 같으니라고.
“거기에는 숨겨진 사정이 있다.”
“무슨 사정이지?”
“그건...”
“시작!”
잉걸델 교수가 다시 깃발을 휘둘렀다. 둘은 검을 붙잡고 자세를 만들었다.
상대 견습기사는 한 번 이기고 올라온 데다가 이한이 이긴 걸 아는 만큼 아까처럼 방심해주지는 않았다.
이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비켈린츠 님은...”
“!”
견습기사는 이한이 입을 열자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그 순간 이한의 벽암검이 빛을 발했다.
무겁고 강한 중검 계열의 검술인 벽암검은 한 번 선수(先手)를 뺏기면 반격하기 쉽지 않았다. 견습기사는 묵직하게 날아오는 공격에 자세가 헝클어졌다.
팍, 팍, 팍, 팍, 팍!
다섯 번의 공격이 이어지자 견습기사는 그대로 넘어졌다. 이한은 상대의 목 앞에서 검을 멈췄다.
“워다나즈의 승리!”
이한은 아까처럼 빠르게 돌아섰다.
배신감에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견습기사와 굳이 눈을 마주칠 필요는 없었으니까.
‘후. 깔끔하게 끝냈군.’
다행히 쉽게 끝낼 수 있었다.
두 싸움 다 한 번도 유효타를 허용하지 않고 완벽하게 끝냈으니 중간고사는 당연히 만점...
“미안하다. 이한.”
“?”
“졌다...”
더르규가 사과했다.
방금 견습기사와 치열한 격전 끝에 결국 패배한 것이다.
“...모라디는? 모라디도 졌나?”
“모라디는 무승부야. 상대하고 같이 뼈가 부러졌어.”
“...설마.”
“워다나즈. 잠깐 쉬고 마지막 대결을 준비하세요.”
잉걸델 교수의 말에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젠장. 3회전까지 가야 하다니.’
더르규나 모라디가 남은 견습기사들을 이겨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남다니.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모여 있던 견습기사들이 수군거리면서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교양으로 배우고 있는 검술인데, 정말 운이 좋아서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됐군.”
“수작부리지마라 워다나즈!”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