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이한이 차갑게 혀를 차며 돌변하자 견습기사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정말로 워다나즈가 그들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워다나즈... 널... 널 믿었는데! 네 명예를 존중했는데!”
“에인로가드에서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놈들이 건방 떨며 무시해놓고 무슨 존중을 지껄이나?”
이한의 시큰둥한 대꾸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래! 워다나즈!”
“말 잘 했어! 무슨 존중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한을 응원하는 기묘한 상황.
그러나 둘의 관계를 잘 모르는 견습기사들은 또 한 번 오해했다.
“비겁한 자식들...!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닌 워다나즈를 이용해서 방심시켰다 이거지?”
“???”
“아, 아니 우리가 시킨 건 아닌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갑자기 화살이 돌려지자 당황했다.
애초에 워다나즈와 그리 친하지도 않은데다가 워다나즈가 하란다고 할 놈도 아니었다.
그냥 알아서 자기가 속임수를 쓴 건데!
“워다나즈! 해명해줘! 우리가 그런 짓을 언제 시켰어!”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친구들은 절대로 그런 걸 시키지 않았다. 명예를 아는 기사 가문 출신의 친구들이 그런 짓을 하겠나? 너희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지 마라.”
물론 당연히 견습기사들은 믿지 않았다.
“어디 두고 보자고!”
“비겁한 놈들 같으니!”
“......”
“난 노력했다.”
이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을 째려봤다.
* * *
엥게 가문의 라브다는 견습기사들 중에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기사였다.
그런 만큼 다른 학생들과 견습기사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갈 때도 끝까지 남아서 이한과 맞붙게 되었다.
이제 둘의 대련은 단순한 대련이 아니었다.
마법학교에 입학한 기사들이 승리하느냐, 혹은 검의 길에 전념하고 있는 견습기사들이 승리하느냐 하는 자존심 싸움!
‘음. 생각해보니 괜히 열을 냈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이한은 시험 점수만 잘 따면 되는 거였는데 굳이 불필요하게 상대를 도발하게 되었다.
상대가 마법학교 생활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지껄이는 바람에...
라브다는 긴장한 얼굴로 검을 붙잡았다.
이한과 달리 라브다는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이한은 이미 중간고사에서 만점을 확보한 상태인 만큼 지더라도 잃을 게 없었다.
워다나즈 가문인데 검술 좀 진다고 무슨 불명예가 있겠는가. 그걸 조롱하는 놈이 있다면 그 놈이 미친놈이었다.
그러나 라브다는 이야기가 달랐다.
상대한테 지면 잃을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여기 모인 견습기사들 모두의 패배가 될 뿐더러, 자신은 마법사한테 검술로 진 사람이 되는 것이니...
“라브다. 진정해. 상대는 마법사 가문 출신이야.”
“놈이 이긴 방식 들었잖아. 속임수만 조심하면 돼. 알고 있지?”
“물론.”
라브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워다나즈. 앞으로 절대 이럴 일이 없겠지만 이번만큼은 널 응원하겠다.”
“이겨라!”
“고맙다. 너희들의 허섭스레기 같은 응원들이 의욕을 북돋는군.”
견습기사들이 끈끈하게 뭉친 것에 비해 이한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상당히 건조한 관계였다.
사실 흰 호랑이 탑 학생 중 몇 명은 아직도 ‘진짜로 워다나즈가 이기길 바라야 하나?’하며 고민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무슨 검술을 쓰지?”
이한은 뒤를 보며 물었다.
이한이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닌 만큼 상대는 이한에 대해 잘 모르고 싸우겠지만...
그건 이한이 알 바 아니었고, 이한은 상대에 대해 알고 싸울 생각이었다.
“변화가 많은 흡검(吸劍).”
지젤이 대답했다.
제국의 검술들은 모두 다 제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엥게 가문의 검술은 그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편이었다.
변화가 오묘하고 기이한 건 물론이고 검을 부딪치면서 상대하다보면...
마치 늪에서 끌어당기는 것 같은 흡입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실전 경험이 많은 기사가 아니라면 이런 검술을 처음 상대할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렇군. 더르규. 저 녀석은 무슨 검술을 쓰지?”
“저 새ㄲ...”
지젤은 분노했다.
지금 본인이 말해줬는데도 저렇게 다시 묻는 이유가 뭐겠는가.
기껏 알려줬는데 감히 의심을...
“오해하지 마라. 모라디. 널 못 믿는 건 아니다. 다만 더르규는 직접 상대해봤으니 느낀 게 다를 거라고 생각했을 뿐.”
“그, 그래. 모라디. 워다나즈도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야.”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말리려고 애썼다.
더르규는 작게 물었다.
“정말인가?”
“아니.”
“......”
말리던 친구 한 명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방금 무슨 말 했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다! 자. 이한. 상대에 대해 최대한 알려주겠다!”
더르규는 허겁지겁 화제를 전환시켰다.
이러다가는 라브다와 싸우기 전에 흰 호랑이 탑 친구들과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 * *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 이한은 앞으로 나섰다.
더르규가 해준 조언은 모라디가 해준 말과 비슷했다.
-검을 부딪치면 느껴지는 일반적인 반발력 대신 상대 쪽으로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느껴진다. 이한. 아주 조금씩 균형이 무너질 텐데,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경계해야 한다.
‘검에 마력을 담아서 저렇게 활용할 수도 있군.’
견습기사들 중 가장 실력이 좋은 편인데다가 더르규까지 꺾은 만큼, 검에 마력을 담을 줄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검에 담긴 마력이, 부딪칠 때마다 상대의 검을 끌어당기는 효과를 만들고 있으리라.
말로는 단순하게 들렸지만 나름 검술을 오래 훈련한 이한은 저게 얼마나 복잡한 고도의 기술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마력으로 상대의 검을 끌어당기는 효과를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계속 연속으로 시전하면서 상대의 균형까지 무너뜨린다?
자신의 검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상대의 균형까지 파악할 수 있는 눈썰미가 필요했다.
혼란스러운 검술 대결 속에서 그런 걸 해내려면 뼈를 깎는 노력과 수련이 필요하리라.
이한은 상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올렸다. 평범한 게으름뱅이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걸로는 마법학교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망언을 용서해 줄 수 없었지만...
꽝!
‘무슨 놈의 힘이?!’
라브다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얼얼하게 통증이 올라오는 손아귀에 경악했다.
-저 자식은 속임수밖에 없어!
-걱정하지 마, 라브다! 너라면 이길 수 있어!
라브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나선 견습기사 친구들의 응원은 기분을 좀 낫게 만들어줬지만 실제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한 번 부딪치고 서로 걸음을 밟으며 자세를 바로잡자 라브다는 상대의 실력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초이 가문의 더르규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 약하지는 않다고!
‘워다나즈 가문이잖아! 마법사 가문이잖아!!’
라브다는 억울한 나머지 따지고 싶었다. 대체 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이렇게까지 검술에 진심이란 말인가.
괴팍한 마법사들의 가문이라서 그런가?
마법에 검술이 무슨 도움이 되기라도 하는 걸까? 오래된 검술에는 아직 검사들이 해독 못한 신비들이 있다고들 하니까?
꽝!
이한에게서는 아까 보여준 느슨하거나 속임수 같은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 같은 살벌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
“...혹시 워다나즈 가문인 것도 속임수가 아닐까?”
얼마나 놀랐는지 견습기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귀족 가문 출신이 보여줄 만한 검술이 아니었다.
먹고 자는 시간 제외하면 검만 휘두른 것도 아닐 텐데...
‘선수를 잡았다!’
이한은 눈빛을 빛냈다.
다행히 상대가 이한에 대해 파악이 늦은 덕분에 선수를 잡을 수 있었다.
이한은 상대를 잘 알았지만, 상대는 이한에 대해 잘 몰랐던 점이 승패를 가른 것이다.
‘상대가 다른 기술을 쓰기 전에 강하게 압박해서 끝낸다.’
변화 많은 검술 상대로 선수를 뺏기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이한은 한 번 뺏은 선수를 그대로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라브다도 그냥 질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온몸의 마력이 순환하며 검에 깃들더니 묵직해졌다. 라브다는 간신히 공격을 빗겨내며 힘껏 가문의 검술을 펼쳤다.
‘끌어당긴다!’
손맛이 느껴졌다. 라브다는 제대로 검술이 시전됐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
라브다는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도 그 시선에 움찔했다.
‘뭐지?’
아까까지 계속 무표정했던 상대가 저렇게 쳐다보니 신경이 쓰였다.
심리전인가?
‘그나저나 흡검은 언제 쓰는 건지 모르겠군.’
이한은 흔들리지 않고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상대가 쓰지 않는다고 거기에 휘둘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승리까지 가는 길이 있다면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따라가라!
꽝, 꽝, 꽝-
라브다의 얼굴이 점점 납빛으로 변했다. 기껏 마력을 쥐어짜서 소모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봐도 이한이 유리한 상황.
그러나 이한의 낯빛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큰일났군.’
목검의 자루부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한은 자책했다.
‘아직도 마력을 적당히 넣질 못하다니...!’
일격 일격에 무식하게 마력을 불어넣으니 목검이 이 꼴이 난 것이다.
자업자득이었다.
그런 이한의 속마음을 모르는 라브다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반격을 준비했다.
아직 라브다가 완전히 사용하기에는 좀 어려운 초식이었지만 지금 상황을 덮으려면...
“크아악!”
괴성과 함께 라브다가 검을 휘둘렀다. 아까와는 다른 기색에 이한은 경계의 시선을 던졌다.
‘무언가 다르다!’
검이 부딪히고 강렬한 흡입력이 이한의 검에 실린 마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
“컥!”
맞부딪힌 채 검을 잡고 있는 라브다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과한 마력 사용 때문이었다.
‘검을... 놓을 수가...’
원래라면 검을 놔야 했다.
그러나 부족한 실력으로 펼친 검술이 라브다의 손을 마비시키고 검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더 최악인 건 펼친 검술로 인해 검이 계속 라브다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면...’
라브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콰직!
그 순간 이한의 목검과 함께 라브다의 목검이 박살났다. 라브다는 거센 숨을 들이쉬며 뒤로 넘어졌다.
“헉... 허억...”
“......”
이한은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다 잡았는데.’
마력 조절을 못해서 다 잡은 상대와 무승부라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무승부라도 감사히 여기자.’
이한은 그렇게 생각을 바꿨다.
마지막에 기지를 발휘해서 상대의 검을 같이 부러뜨리지 않았다면 이한의 검이 먼저 부러졌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워... 워다나즈.”
“?”
“고맙다.”
“???”
“나를... 나를 위해서 네 검을 스스로 부러뜨리다니.”
“?????”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아까부터 자기 가문의 검술은 펼치지도 않더니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아닌가?’
이한은 상대가 더르규와 싸우면서 너무 힘을 써서 부상을 입었나 싶었다.
그 정도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라브다! 괜찮나?!”
“걱정하지 마! 넌 정말 잘 싸웠다! 운이 없어서 무승부로 끝났지만...”
“괜찮다. 그리고 이 대결은... 내가 졌다.”
“?!?”
라브다는 충격 받은 견습기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줬다.
설명이 끝나자 견습기사들은 깜짝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짝, 짝짝, 짝짝짝-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한 명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눈치를 보다가 박수를 쳤다.
잉걸델 교수도, 비켈린츠도 박수를 쳤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졸업하면 진짜 기사놈들하고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