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물론 이한이라고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강의했던 내용은 당연히 다 알고 있을 테니 시험은 다른 내용을 본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흔들려봤자 나만 손해다.’
이한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알려주십시오. 교수님. 뭘 하면 되겠습니까?”
“콜록. 이제까지 배워왔던 마법들과 크게 다르지 않네. 독 또한 흑마법의 한 분야를 이루고 있는 마법이지.”
가이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모르툼 교수가 말했다.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콜록. 밖에 나가면 사냥꾼도, 암살자도 쓰는 게 독인데 그걸 왜 마법으로?”
“헉!”
가이난도는 깜짝 놀랐다.
“콜록. 흑마법의 독은 평범한 독과 다르네.”
제국에는 다양한 독들이 있었다.
동, 식물에서 나오는 독부터 시작해서 세균이나 곰팡이, 곤충, 금속 등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수많은 독들.
일반인들도 이런 독들은 제법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흑마법의 독은 저런 실재하는 독이 아니었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현실을 마법사의 의지로 바꾸는 학문.
당연히 독 또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독을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하긴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되어서 개나 소나 다 쓰는 독을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죠!”
가이난도는 신이 나서 외쳤다.
“콜록.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독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
가이난도는 시무룩해졌다.
‘하긴 다른 마법도 그랬지.’
당장 기본적인 원소 마법만 해도 그 원소에 대한 마법사의 심상이 상당히 중요했다.
심상이 견고하고 구체적으로 잡혀 있지 않으면 당장 주문이고 술식 구조고 뭐고 없는 것이다.
독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만들 수 있는 가상의 독도 다양해지고 강력해지기 마련.
...인데 지금 학생들은 독에 대해 배운 적이 없잖아?
‘지독하군 진짜.’
이한의 생각을 읽었는지 모르툼 교수가 설명에 나섰다.
“콜록. 당연히 자네들은 독에 대한 경험이 많이 부족하겠지. 독을 다뤄본 적도 없을 테니.”
특수한 성장 배경이 없다면 애초에 독을 다룰 일이 별로 없었다.
“맞습니다. 교수님.”
“콜록. 그걸 그냥 무작정 익히라고 하는 것도 가혹한 일이겠지.”
“네!”
가이난도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기대감 섞인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왠지 불길해졌다.
배려도 평소에 하던 놈이 잘 하는 법.
교수가 배려를 해준다고 나섰을 때 그게 진짜 배려일 가능성은 의외로 낮았다.
“디레트.”
까마귀 수인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가이난도에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옅은 독안개가 흘러나와 가이난도의 코와 입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갔다.
“커헉?!”
이한은 바로 지팡이를 뽑아들고 숨을 멈춘 상태로 방어할 준비에 나섰다.
디레트는 ‘이 후배 뭐하는 거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콜록. 방어하지 말고 맞게.”
“예?”
“맞아야 독을 느낄 것 아닌가. 그렇게 위험한 독 아니니 괜찮아.”
직접 원소를 체험하는 것만큼 그 원소에 대한 심상을 구축하기 좋은 방법도 없었다.
중독된다는 점이 사소한 문제긴 했지만.
“......”
이한은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흑마법을 배우기로 한 내 잘못이지.’
체념한 이한을 향해 독안개가 날아들었다.
* * *
“그런데 이 독은 무슨 독입니까?” 콜록대던 가이난도도 정신을 차리자, 이한은 교수를 보며 물었다.
“콜록. 무슨 독이었더라...”
“......”
아무리 제자가 해준다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무슨 독이었지?”
“교수님. 저 말 하면 징벌방...”
“콜록. 괜찮을 거야. 신입생한테만 말 안 하면 되는 거니까. ...아마.”
“마력 감소의 독이요.”
“그래. 마력 감소의 독. 마력이 흩어지고 있는 게 느껴지나?”
모르툼 교수의 질문에 가이난도와 이한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아니오.”
“...?”
모르툼 교수는 멈칫했다. 그리고 이한을 보며 물었다.
“콜록. 마력이 좀 흩어지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나?”
“안 느껴집니다만.”
모르툼 교수는 고개를 돌려 디레트를 쳐다보았다. 디레트는 다급하게 말했다.
“독에는 이상 없습니다.”
“콜록. 다시 확인해보게.”
“...정말로 이상이 없습니다만...”
디레트는 이한에게 다가오더니 다시 한 번 마력 감소의 독을 흩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시도할 때마다 선배의 표정은 초조, 당혹, 곤란으로 물들었다.
보다 못한 이한이 입을 열었다.
“마력이 흩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후배.”
디레트는 해골 교장의 경고도 잊고 입을 열었다.
“분명히 독 제대로 완성됐고, 작용도 제대로 됐는데... 왜지?”
“콜록. 마력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닌가?”
“마력이 많다니요?”
“여기 워다나즈 군은 타고난 마력이 많아서 독이 작용되어도 유의미한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있어.”
“...그걸 왜 미리 말씀 안 해주셨... 아닙니다. 지금 다시 만들겠습니다.”
디레트는 한숨 한 번 쉬고 지팡이를 휘둘러서 새로 독을 만들어냈다.
독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이한이 봐도, 아까보다 몇 배로 더 지독한 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마력부터가...
“자.”
“?”
디레트가 안개로 뿌리지 않고 유리로 된 막대 모양의 병 안에 독을 담아서 내밀자 이한은 당황했다.
“마셔. 후배.”
“......”
이한은 군말하지 않고 마셨다. 상대가 이미 충분히 불쌍했던 것이다.
“콜록. 효과가 있는 것 같나?”
“교수님. 그냥 마법에 도전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게.”
디레트는 가이난도와 함께 걸어가는 이한을 보며 속으로 경악했다.
대체 이번 신입생은...?!
* * *
“후후. 이한.”
가이난도는 실실 웃으면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매우 자신감 섞인 웃음이었다.
이한은 습관적으로 뒤통수를 한 대 때리려다가 멈칫했다.
보는 눈이 많았던 것이다.
“뭐지?”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게.”
가이난도가 신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둘의 흑마법 재능은 비슷했다(어디까지나 가이난도 생각에).
그런데 이번에 이한은 체질 때문에 독을 느끼지 못했고 가이난도는 몸으로 느꼈다.
그렇다면?
독 마법에 한해서는 가이난도가 진도가 빠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우 논리적이었다.
“그... 그래. 고맙다.”
이한은 독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저걸 또 좋다고 신나하는 가이난도의 모습에 약간 압도됐다.
저렇게 긍정적인 것도 일종의 장점...
‘...일 수 있겠지?’
“맺혀라, 흩어지는 마력의 독이여!”
가이난도는 지팡이를 뻗으며 집중했다.
시험 목표는 가장 기초적인 마력 감소의 독을 만들어내는 것.
모르툼 교수도 아주 조금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만큼 학생에게 어려운 수준의 독이나 응용을 요구하지 않았다.
물방울 형태의 마력 감소 독이면 충분했다.
치익-
“!”
가이난도는 지팡이 끝에 맺힌 불투명한 녹색 액체가 부츠 위에 떨어지자 깜짝 놀랐다.
부츠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으아어으아악?!!”
“재주 좋군.”
이한은 놀랐다.
가이난도가 흑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말은 모르툼 교수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마법에 아예 실패하면 모를까 일단 처음 시도에 독 비슷한 걸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공이었다.
물론 부츠에 구멍 난 가이난도 입장에서는 전혀 성공처럼 느껴지지 않겠지만.
“크흑... 나 흑마법 싫어...”
“쉿. 교수님 듣는다.”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집중했다.
가이난도의 말대로 직접 몸으로 겪지 못한 만큼 더욱 더 집중해야 했다.
‘이제까지 배운 요령대로 상상하는 거다.’
수많은 마법에서 했던 것처럼 마력을 통제하고,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강렬하고 체계적인 심상을 그린다.
이한은 자신의 마력이 한 방울로 압축되는 것을 상상했다. 동시에 그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키려 애썼다.
다른 사람의 마력과 닿는 순간 그 마력을 소멸시키는 성질로.
이한은 자신이 전생에서 읽고 봐왔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거기서 마력 감소의 독과 비슷한 존재들을 떠올렸다.
이런 지식과 상상력은 다른 마법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이한만의 강점이었다.
지팡이 끝에 마력이 집중되고 이한의 의지와 주문, 동작이 합쳐지면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맺혀라, 산공(散功)의 독이여!”
“!”
지켜보고 있던 디레트는 깜짝 놀랐다.
아까 그 신입생이 단 한 번의 시도로 독 제작 마법을 성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이 아니다!’
심지어 길고 상세한 주문도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압축시켰다.
저건 마나 감응력, 마나 통제력, 심상 구현력 등 단순히 독 저항력뿐만 아니라 타고난 흑마법의 재능이 어마어마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옆에 있는 금발 친구도 흑마법에 뛰어난 걸 보니...
‘이번 신입생들 진짜 대단하네.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데 정말 왜 이상하게 목소리가 익숙하지?
* * *
“헉, 헉헉. 다 됐습니다.”
가이난도는 진땀을 흘리며 앞을 가리켰다. 독 몇 방울이 유리 위에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먼저 끝낸 이한은 앉아서 기다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 했나?”
“어! 시간차이 별로 안 났지? 그렇지?!”
“콜록. 많이 났는데... 어쨌든 잘 했네. 성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말과 함께 모르툼 교수는 가이난도의 독을 삼켰다.
“!”
“교수님!!! 아무리 배가 고프셔도 그걸 드시면 안 되죠!”
“......”
“......”
이한과 디레트와 모르툼 교수 모두 가이난도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아, 아닌가?”
“독을 확인하려고 한 거야...”
모르툼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며 입가를 닦았다.
뛰어난 흑마법사는 흑마법에 대한 저항력도 자연스럽게 강해지기 마련.
모르툼 교수 정도 되면 천독불침 정도는 됐다.
“콜록. 괜찮군. 잘 만들었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교수는 서슴없이 이한이 만든 독을 삼켰다.
“으흠.”
“괜찮습니까?”
“으흐음.”
“?”
이한은 당황했다.
가이난도와 반응이 조금 달랐던 것이다.
‘실패했나?’
“이, 이한.”
“?”
“내 거 가져가!”
가이난도도 이한이 실패한 줄 알고 자기 독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옆에 있던 디레트가 가이난도를 수상하게 쳐다보았다.
‘좀 멍청한 놈인가?’
선배가 앞에 있는데 저런 대화를 하다니 멍청한 건지 농담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디레트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스승이 좀 이상했던 것이다.
“교수님. 왜 그러시는...”
“크.. 크헉. 허어억.”
쿵!
버티지 못한 모르툼 교수가 무릎을 꿇었다.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디레트는 바로 알아차렸다.
‘마력 부족 증상!’
모르툼 교수 정도 되는 마법사가 마력 부족으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줄이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신입생이 만든 독 때문에??!’
오늘 충분히 많이 놀란 디레트였지만, 가장 크게 놀랐다.
신입생이 독으로 모르툼 교수를 쓰러뜨리다니!
“죽... 죽었어! 이한! 증, 증거랑 증인을 없애야 해!!”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아직 안 죽으셨잖나!”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정색하고 화를 냈다. 솔직히 이한도 초조했던 것이다.
디레트는 재빨리 마력 회복 포션과 해독 포션을 꺼내 모르툼 교수에 입에 들이부었다.
모르툼 교수는 간신히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콜록. 훌륭하네. 만점이야.”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한은 사과했다.
사실 이한 잘못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런 상황에서는 사과부터 해야 했다.
“콜록. 괜찮아. 괜찮아. 시험하다보면 자주 있는 일이야. 오히려 훌륭한 재능을 찾아서 내가 더 기쁘군.”
“아. 그렇습니까?”
모르툼 교수의 말에 이한은 살짝 안심했다.
독 마법은 원래 이런 건가?
“......”
보고 있던 디레트는 할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콜록... 자. 그러면 다음 시험을 보러 가게.”
모르툼 교수는 빨리 신입생들을 내보내고 싶어 했다.
아직 마력이 덜 회복되어서 몸이 힘들었던 것이다.
“예.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한과 가이난도는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
돌아서려는 이한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까마귀 수인 선배가 살짝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