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아니겠지.’
이한은 나가면서 설마 싶었다.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가장 가능성 높은 건 이번 시험을 잘 본 기특한 후배를 칭찬해주려는 것.
이한은 아마 이 이유일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교수를 쓰러뜨려서 고마워하는 건데 설마 선배가 그런 사람은 아닐 테니까...
아니겠지?
“괜찮으십니까 교수님?”
후배들이 다 나가자 디레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툼 교수는 기침을 쿨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콜록. 방심했군... 생각보다 독을 잘 만들었어.”
“너무 조심성이 없으셨습니다.”
일반인들은 마력 좀 흩어진다고 불편할 일이 적었지만 마법사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법을 시전할 때 마력 부족 증상이 찾아오면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모르툼 교수가 독에 내성이 강하더라도 원칙대로 따지면 평소 걸어놓고 있는 마법들을 다 해제하고 독을 마시는 게 맞았다.
‘1학년이 만든 독에 이런 원칙 이야기하는 게 되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콜록. 맞는 말이야. 지나치게 마법에 의존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지.”
모르툼 교수는 솔직하게 반성했다.
마법의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마법사는 마법에 의존하곤 했다.
당장 모르툼 교수만 해도 열몇개의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어놓은 상태였다.
<음에너지 탐지>, <피격 시 언데드 자동 소환>, <떠다니는 그림자 방패> 등 이런 마법들을 유지하고 있으니 가만히 있어도 마력이 계속 꾸준히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마력 부족 증상이 일어났으니 그런 개망신을...
“다른 1학년들을 시험할 때는 주의하겠네.”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콜록. 밖에 있는 다른 학생들을 확인해주겠나?”
디레트는 모르툼 교수의 부탁에 강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슬슬 다음 학생들도 들어올 때가 됐...
“?”
디레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까 그 굉장히 기특한 후배가 소환마법 시험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쟤 어디 가는 거야?’
* * *
“라파드엘.”
“워다나즈.”
흑마법 배우는 신입생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기에 서로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친한 건 아니었다.
흰 호랑이 탑+흑마법사들을 해치우기 위해 흑마법을 배우는 라파드엘 그랄.
검은 거북이 탑+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 때문에 이한을 두려워하는 이미르그.
‘헛소문이 마법학교를 망치고 있군.’
가이난도는 시험 먼저 본 사람답게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잘해봐라.”
“...뭐가 나오지?”
자존심 강한 기사 가문 출신이어도 학생은 학생이었다.
다음으로 시험 보러 들어가는데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가이난도의 입가가 찢어질 듯이 위로 올라갔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냐?!”
“아무것도 아니다! 닥쳐!”
“다시 말해봐! 공손하게!”
“닥치라고!”
“그만해라. 가이난도. 같이 흑마법을 듣는 학생인데 서로 싸워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먼저 시험을 본 입장에서 간단한 조언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이한...!”
가이난도는 ‘이딴 새끼한테 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한이 손으로 막았다.
라파드엘은 놀란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시험 주제는 저주다. 언데드 소환은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
“...고맙다. 워다나즈.”
“뭘 이런 걸 가지고.”
라파드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휙 걸어가 버렸다.
가이난도는 감탄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미르그. 시험 주제는 독이다.”
“...?!”
거인 혼혈 학생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방, 방금 저주라고 했잖아?”
“거짓말이었다.”
이한은 당당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가자. 가이난도. 소환마법 시험 보러가야 하니까.”
돌아서서 걸어가는 이한의 뒷모습을, 이미르그는 두려움 섞인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워다나즈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건 맞는 거 같아!
* * *
“다들, 저번 시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시험 주제는 <종이 새 소환>입니다.”
단안경을 쓴 노교수, 밀레이 교수의 말을 들은 이한은 순간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이 미리 말한 대로 시험을 내다니.
‘이런 걸로 감동 받으면 안 되는데 정말.’
이한은 침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한보다 먼저 온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부분 표정이 어둡거나 비통했다. 시험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꼴이 엉망이지?
“자리에 앉으십시오.”
자리에 앉자 기묘한 도형이 새겨진 마법진 스크롤들이 앞에 나타났다.
저번처럼 소환마법을 보조해주는 마법진이었다.
1학년 수준으로는 직접 소환마법을 성공시키니 힘드니, 이런 마법진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자, 그러면... 시작하십시오.”
밀레이 교수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제한 시간 안에 종이 새를 소환하라는 뜻이었다.
어느 학생이 중얼거렸다.
“그냥 접어서 날리면 안 되나?”
이한은 다른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종이 새 소환>.
사실 ‘새’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수준의 마법이었다. 굳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종 가능한 종이비행기’에 가까웠다.
마법사들이 가까운 상대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보낼 때 쓰는 마법.
‘어렵지 않겠군.’
이한은 마법진을 읽고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마법진도 죽자 사자 만들었는데, 그냥 마법진을 따라하는 것 정도면 쉬운 편이었다.
마력량만 넘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됐다.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연약한 마법진 스크롤이 파괴될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다른 교수들에 비해 훨씬 관대한 시험...
파라라라라라락!
“......”
그러나 이한은 이 시험에 의외의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바로 다른 친구들이었다.
곳곳에서 웬 이상한 종이 모양의 소환수들이 튀어나와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하는 거야, 이 머저리 같은 자식아! 너 때문에 내 주문도 실패했잖아!”
“어차피 실패했을 걸 왜 나한테 따져!”
“이 흰 호랑이 탑 놈이 진짜!”
“덤벼!”
‘소환 마법은 확실히 좀 그렇군.’
다른 마법은 실패하면 조용히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소환 마법은 아니었다.
실패하면 잘못 만들어진 소환수가(그리고 실패한 만큼 통제도 되지 않았다) 날뛰는 것이다.
이한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종이책을 물 구슬로 격추시켰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진 스크롤은 망가지면 안 됐다.
“쏘아져라!”
“타올라!”
이한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종이가 날아와서 뺨을 때려대니 뭘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난장판을 밀레이 교수는 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또한 마법사라면 해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방금 전에 시험을 본 학생들도 똑같은 난장판을 겪었다.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핵심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종이로 뺨을 맞는다고 죽진 않았다.
그렇다면 옆에서 난장판이 일어나더라도 대응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다들 멈춰라!”
“!”
푸른 용의 탑 소속, 워다나즈 가문의 학생이 외치자 밀레이 교수는 살짝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사실 밀레이 교수는 이한을 조금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재능이 뛰어난 건 인정했지만 소환마법에 있어서 오만한 성격은 화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학생이 저렇게 외치는 이유가 이해가지 않았다.
설마 자신이 외치면 학생들이 이 난장판을 멈출 거라고 믿는 것일까?
“다들 멈추라고 말했다!”
“...?”
다시 외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밀레이 교수는 단안경을 살짝 고쳐 썼다. 솔직히, 저 학생이 뭘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계속 듣지 않으면 어떡하려고 저러는 거지?
“난 분명히 경고했다. 샘솟아라!”
이한은 물 구슬들을 빠르게 복사하기 시작했다.
1학년이라고 볼 수는 없는 능숙한 원소 마법 컨트롤에 밀레이 교수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쉭!
주변을 날고 있는 종이 소환수들이 빠르게 격추되기 시작했다.
1학년 학생들이 나름 이것저것 마법을 날리고 있었지만, 드넓은 강의실을 불규칙하게 날고 있는 종이 소환수들을 맞추는 건 쉽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들이 서로 충돌하고 부딪치면서 난장판만 더 심해졌다.
그러나 이한은 달랐다.
한 번 날리면 무조건 하나씩 쓰러뜨렸다.
“멈추라고 했을 텐데?”
“닥쳐, 워다나즈! 네가 뭔데...”
열이 오른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삿대질을 했다.
그 순간 물 구슬이 학생의 명치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컥...”
이한은 주변에서 마법을 멈추지 않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퍽! 퍼퍽! 퍼퍼퍼퍽!
물 구슬을 한 대씩 얻어맞은 학생들은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었다.
이한을 중심으로 파장이 퍼지듯이 학생들이 빠르게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 난 멈췄어.”
“나, 나도.”
“지팡이 내려놔라! 드는 놈들은 각오해.”
학생들이 겁먹고 지팡이를 내리자 이한은 침착하게 마법진을 따라 마법을 시전했다.
타라락!
종이 새가 피어나더니 강의실을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밀레이 교수는 놀라지 않았다.
중간고사 시험을 한 번에 성공했지만, 그것보다 방금 봤던 광경이 훨씬 더 놀라웠던 것이다.
이렇게 난장판인 학생들을 혼자서 휘어잡고 제압하다니.
‘...정말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오만할 자격이 있군요.’
밀레이 교수는 오만하거나 거만한 제자가 있다면 단단히 경고해서 소환마법에서 다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게 본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그런 역할도 잠시 잊을 정도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저런 재능이라면 무심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마법사인 것이다.
“훌륭합니다.”
밀레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하나 지적할 부분 없는 만점이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
밀레이 교수는 이한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지 않자 이상하게 여겼다.
왜 나가지 않지?
이한은 대신 친구들 앞에 서더니 말했다.
“다시 지팡이 들어라. 그리고 내가 멈추라고 했는데 멈추지 않는 놈들. 각오해라.”
“......”
“......”
학생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지팡이를 들었다.
이번에도 똑같이 잘못 만들어진 소환수가 곳곳에서 튀어나왔지만...
이한은 바로 제압했다.
“다시.” “잠깐!” “다시.” “멈추지 마. 계속 해.” “잠깐!”
“......”
친구들을 위해 스스로 강의실의 교통정리를 하는 모습에, 밀레이 교수는 자신이 내렸던 판단에 혼란이 들었다.
...오만한 학생이 아니었나?
* * *
“고생하셨습니다. 교수님.”
디레트는 기지개를 펴며 강의실 밖으로 나섰다.
강의실을 오가는 신입생들의 표정은 벌써 반쯤 죽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디레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법학교의 고학년이라면 누구나 지을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탁-
“?”
아까 그 굉장히 기특한 후배가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에 디레트는 ‘어라?’싶었다.
시험을 보고 강의실에서 나오는 건 괜찮았다.
그런데...?
‘환상마법 강의실이잖아?’
디레트는 오늘 본 것들을 되짚어보았다.
그러니까 저 후배가 오늘 들어간 게 흑마법, 소환마법, 환상마법...
...???
디레트는 설마 싶었다. 지금 저 후배가 설마...
‘안 돼! 넌 지금 교수들한테 속고 있는 거야! 그러다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