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이한은 왜 물 덩어리를 불러와야 했나 싶었지만 조용히 들었다.
우레걸음 교수의 지시인 만큼,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보통 물 원소와 적성이 맞는 마법사는 냉기 원소와도 적성이 맞을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소에 냉기 원소를 연습하기 쉽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다.”
원소들 중에 비교적 다루기 쉬운 원소들이 있다면, 다루기 어려운 원소들도 있었다.
화염이나 물, 흙 같은 원소들이 대표적으로 다루기 쉬운 원소라면(물론 화염을 다루기 힘들어하는 마법사도 있었지만) 번개나 어둠, 냉기 같은 원소들은 다루기 힘든 원소들.
“번개는 통제가, 어둠은 구현이, 그리고 냉기는 유지가 어렵지.”
우레걸음 교수는 말과 함께 허공에 눈송이를 만들어냈다.
따뜻한 오두막 안에 생긴 눈송이가 순식간에 물방울로 변해버렸다.
“물이나 흙과 달리 냉기 원소는 마법사가 꾸준히 집중하지 않으면 그 힘을 잃어버리고 분산되기 십상이다. 계속 집중해서 마력을 불어넣어줘야 하지.”
“과연. 물 구슬 수십 개를 소환해서 공중에 띄우는 일들이 어려운 것처럼, 냉기 원소도 그만큼...”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우레걸음 교수는 말하다가 황당해했다.
냉기 원소가 난이도가 있는 원소였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라면 냉기 원소가 훨씬 더 수월하게 유지되지. 신참 마법사들이 훈련하고 감각을 익히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아차. 순간 진심으로 행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버렸군.’
순간이었지만 스스로가 살짝 두려워지는 경험이었다.
절대 행운은 아니지!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정령계가 가까워진 탓에 냉기 정령들이 곳곳에 소환되었을 테니... 정령들과 접촉하면서 이런저런 가르침이나 가호를 받을 기회도 있겠지.”
“저번에 정령계에 갔을 때 정령들이 절 피하던데, 혹시 이런 환경이 정령들의 두려움을 없애고 친근감을 올려줄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
“......”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조언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래. 몸조심하고. 아마 그리 오래가진 않을 거다.”
“하루?”
“하루보단 오래 가지.”
“이틀?”
“내가 괜히 말했다. 그냥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생각해라.”
우레걸음 교수는 집요한 제자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궤짝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둥근 유리병들 안에 갈색 액체가 찰랑거리며 가득 차있었다.
“이건 선물이다. 추위에 도움이 되겠지.”
“물약입니까?”
“아니. 브랜디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이한은 궤짝을 들고 오두막을 나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그래서 물 생성은 왜 했던 거지?’
* * *
휘이이이잉-
“불을 질러!”
“안 돼. 기름을 다 썼어!”
“굳기 전에 힘으로 밀어버려!”
“흙으로 벽을 치겠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고군분투하며 탑 앞의 눈을 치워냈다.
푸른 용의 탑은 마력이 줄지 않는 미친놈이 화염으로 길을 뚫어냈다지만 다른 탑도 그런 방법을 쓸 순 없었다.
대신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각종 기지를 발휘해 눈을 조금씩 치워나갔다.
그야말로 온갖 방법들이 동원됐다.
“이미르그, 힘으로 밀어붙여! 내가 벽을 만들겠다!”
“잠깐. 누군가 온다!”
“교수님인가?”
“그럴 리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도 느끼고 있었다.
교수가 와서 도와주진 않을 거라고!
물론 찾아온 건 이한이었다.
“워다나즈잖아!? 용케 이 눈보라를 뚫고...”
“워다나즈! 어떻게 온 거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눈보라가 거세게 치는 탓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들리질 않았다.
휘이이이이잉!
“...하러 왔다!”
“뭐?”
“...하러 왔다고!”
“도와주러 왔다고?”
“아니! 물물교환하려고 왔다고!”
쿵!
이한은 궤짝을 내려놓았다.
궤짝에는 두꺼운 옷감이 가득 차있었다.
하도 미친놈처럼 사들인 탓에 각종 방한용품을 만들고서도 양이 넉넉하게 남았던 것이다.
“어디서 구한 거야?!”
“다 방법이 있지. 자. 그래서... 교환하겠나?”
“여기서 이야기하다가는 얼어 죽겠다. 이쪽으로 와!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하자!”
원래 탑 앞에 암시장이 있었던 자리에는 임시로 만든 눈집들이 몇 개 있었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밖에서 눈을 치우기 위해 임시로 만든 대피소였다.
학생들은 이한이 가지고 온 옷감을 확인해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진짜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거지?’
‘워다나즈 저 자식은 어떻게 도둑 길드 출신보다 수완이 좋냐?’
“교.. 교환하고 싶다. 워다나즈.”
“그래. 나도 그러려고 온 거다.”
이한은 살짝 기대 섞인 눈빛으로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지?”
“......”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머뭇거리며 서로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누군가 입을 열었다.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희도 꾸준히 모으고 있는 걸로 아는데.”
푸른 용의 탑은 사실 이한이 독보적으로 물자를 들여와서 배를 곯지 않고 사는 거지, 내버려두면 쫄쫄 굶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에 비해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상당수가 산속에 던져놔도 자기 먹을 건 챙길 수 있었다.
푸른 용의 탑이 구매.
흰 호랑이 탑이 사냥이라면...
검은 거북이 탑은 채집, 농사, 교환, 사냥 등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는 것!
푸른 용의 탑 같은 고급품이나 사치품은 없더라도 들어오는 식량만 놓고 보면 더 많을 텐데?
“창고가 눈보라로 날아갔다...”
“......”
부피 작은 보존식품들과 양념, 향신료 등으로 대부분 휴게실 안에 보관 가능했던 이한과 달리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외부 창고를 많이 이용했다.
훈제부터 절임 등 각종 작업을 진행하는데 휴게실 안에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창고들은 이런 상황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했어야지.”
‘그걸 어떻게 대비해...’
“어쨌든 알겠다.”
이한은 다시 궤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까지 온 게 헛수고가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깐! 잠깐! 워다나즈!”
“가지 마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이한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지금 방한용품은 누구보다도 필요했던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왜 이러나?”
이한은 밖의 눈보라보다 차갑게 말했다.
“외... 외상은 안 되나? 나중에 밖에 나갔을 때 은화로...”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게 통하겠냐? 네 집안의 돈이 아무리 많아도 상대는 워다나즈 가문이라고. 그런 제안을 뭐가 아쉬워서 받아들여.”
저번에 만난, 살코 옆에 있던 검은 거북이 탑 차석의 말에 다른 친구가 타박했다.
이한은 멈칫했다.
“어느 가문 출신이지?”
“리치몬드 가문인데...”
리치몬드 가문 출신의 샤일스는 상당히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 마차 운송 사업으로 손꼽히는 부(富)를 일군 가문이었지만, 가문의 품격은 그 가문이 가진 황금이 아니라 그 가문이 쌓아 올린 역사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귀족 가문이자 마법명가인 워다나즈 가문은 샤일스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명성을 갖고 있었다.
‘아니 이 자식이.’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집안에 돈이 많으면 이마에 써놓고 다닐 것이지 왜 그걸 말하지 않아서 서로 민망한 상황을 만든단 말인가?
“아주 훌륭한 가문 출신이군.”
“지금 농담하는 거야, 워다나즈?”
“내 얼굴이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이한의 차가운 조각상 같은 얼굴은 가만히 있어도 상대를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샤일스는 살짝 당황했다.
“외상으로 내주지. 나중에 방학 때 갚으라고.”
“뭐? 정말? 그래도 괜찮나?”
“물론. 리치몬드 가문이라면 믿을 수 있지.”
“워다나즈...”
샤일스는 감동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이한이 은화를 탐내서 저럴 리는 없었고, 샤일스의 기분을 배려해주는 게 분명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보여주는 이런 훈훈한 존중이라니.
이게 대귀족만이 가진 품격인가?
“정말 고맙...”
“사인이나 해라.”
“아, 응.”
이한은 궤짝을 넘겼다.
식량은 구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비싸게 팔아넘기자 마음이 포근해졌다.
“워다나즈 왔어?”
눈집 밖에서 닐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 설득 좀 도와줘!”
“닐리아... 무리라니까. 위험해.”
“아 진짜 안 위험하다고!”
“?”
닐리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들어왔다.
추위 대비를 위해 여러 동물들의 가죽을 두르고, 신발 밑에는 덩굴과 나뭇가지를 사용해 만든 설피(雪皮)를 단 닐리아는 그야말로 전문가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무슨 설득을 말하는 거지?”
“지금 사냥하러 가려는데 다들 말리잖아.”
“닐리아... 아무리 그래도 지금 날씨에 사냥 가는 건...”
“좋은 생각이군. 가자.”
“그렇지? 거봐! 워다나즈는 동의하잖아!”
“......”
친구들은 경악의 시선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말려야지 뭐하냐!?
* * *
“가만히 있는다고 식량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데.”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워다나즈. 하여간 사냥꾼 아닌 녀석들은 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안다니까! 그런데 워다나즈. 불 좀 옆으로 치워줄래?”
“아. 미안.”
닐리아는 뜨거움을 느끼고 거리를 벌렸다. 이한이 주변 곳곳에 띄운 화염의 화력이 너무 셌던 것이다.
푹푹 쌓인 눈 위를 가볍게 밟고 움직이는 닐리아의 모습에 이한은 감탄했다.
괜히 <그림자 순찰대> 출신이 아니었다.
“그림자 순찰대에서 이 정도 눈보라는 별것도 아니겠지?”
“아니. 별것 맞는데. 이렇게 심한 일은 드물지.”
“과연. 그런데도 이렇게 길을 뚫다니 대단하군. 다른 그림자 순찰대원도 없는 열악한 상황인데.”
이한은 감탄했다.
닐리아는 숙련된 사냥꾼이자 레인저답게 제대로 된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폭설이 내린 산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고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게 변해버렸다.
그러나 닐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길을 찾고 만들어냈다.
과연 대단한 기술...
“아니. 훨씬 편한 상황이지.”
닐리아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주변에 화염 둥둥 띄워서 시야 밝히고 몸 덥히며 걷고 있었는데 무슨 열악한 상황이란 말인가.
다른 사냥꾼들이 들었다면 ‘와 사냥 쉽게 하네’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나저나 난 워다나즈 네가 말릴 줄 알았는데.”
“아. 물론 나도 눈이 좀 잦아든 다음에 가고 싶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
“?”
“내일부터 강의 들어야 하잖나. 주말에 모아놔야 해.”
“......”
닐리아는 움찔했다.
사실 중간고사도 다 봤겠다, 폭설도 내리겠다 그걸 핑계 삼아서 강의 한두번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의... 이런 긴급상황이면 한 번 정도는 빠져도 되지 않나?”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는 거야 닐리아?”
“......”
닐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안 보이게 입을 삐죽거렸다.
이래서 수석은!
순간 닐리아의 긴 귀가 쫑긋거렸다.
“뭔가 있다. 정령 아니면 몬스터 같은데...”
“구분할 수 있나?”
“쉽지 않네.”
눈보라로 인해 시야도 짧아진데다가 이렇게 자연의 마력이 폭주하는 상황에서는 정령과 몬스터의 구분도 쉽지 않았다.
팟!
“어? 왜 도망쳐?!”
“...정령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