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걸 어떻게 알... 어? 진짜 정령이네? 어떻게 알았어?”
“날 보고 도망치면 보통 정령이더라고.”
“......”
“......”
순간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닐리아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꼭, 꼭 정령이 있어야 좋은 마법사가 되는 건 아니지! 그리고 워다나즈 넌 다른 친구들 많잖아!”
‘위로에 별 재능이 없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여줬다.
친구가 진심 섞인 위로를 하는데 거기다가 투덜거릴 순 없었으니까.
“워다나즈. 이리 와서 앞으로 좀 가볼래?”
“왜?”
“저기 뭔가 있는데 정령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보게.”
“......”
이한은 서운한 눈빛으로 닐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닐리아는 눈치 채지 못하고 손짓했다.
“빨리! 확인해봐야 해!”
‘이래서 사냥꾼들은.’
이한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기본적으로 폭설은 사냥하기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련한 사냥꾼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냥감을 추적할 수 있었다.
“대단하군.”
이한은 닐리아가 토끼 하나를 더 잡는 모습에 놀랐다.
“갑작스럽게 눈이 오면 짐승들도 놀라서 당황하는 법이거든.”
“과연... 방금 눈 위를 달려갈 때 뭔가 독특한 방식으로 달린 것 같은데, 다시 보여줄 수 있나?”
닐리아는 기본적으로 그림자 순찰대 출신이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만큼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그림자 순찰대와 사냥꾼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
-이 빵 정말 더럽게 맛이 없다.
-앗. 하지만 내가 예전에 산에서 혼자 조난당했을 때 먹었던 빵보다는 괜찮은 것 같은데? 그 때 내가 먹었던 빵은 정말 최악이었어. 동굴에 왔던 사냥꾼이 두고 간 빵이었는데, 곰팡이와 벌레가...
-우우욱. 닐리아...!
...물론 이런 시도가 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워다나즈가 보여주는 존경심과 관심은 닐리아를 기쁘게 만들었지만...
“워다나즈.”
“왜 그러지?”
“내가 그림자 순찰대 이야기하는 거 정말 좋아하고... 물어본 것에 대해서도 꼭 대답해줄 테니까... 이제 나중에 이야기하자!”
쉭!
닐리아는 도망치는 사슴을 정확히 쓰러뜨렸다.
지금 워다나즈가 던진 질문이 정확히 17번째였다.
‘활을 고르거나 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눈 내릴 때 사냥감을 추적하는 법은?’ ‘기척을 숨기는 방법은...’ 등등.
처음에는 닐리아도 신이 나서 설명해줬다.
친구가 궁금하다는데 설명 안 해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한도 열심히 메모해가며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하지만 닐리아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옆의 친구가 마법학교의 모든 강의를 들으려고 하는 광인이라는 걸!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17번째 질문이 찾아오자 슬슬 닐리아도 입이 마르고 목이 아팠다.
“이것만 대답해주면 안 되나?”
“아니!”
어지간하면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닐리아였지만, 이한과 함께하면서 거절 능력이 오르고 있었다.
촤아악!
“이 정도면 된 거 같군.”
“그치?”
마지막 사냥감을 해체하고서 닐리아는 쌓인 눈에다가 손을 씻었다.
이한은 주변의 눈을 불로 녹인 후 끓여서 물통에 담았다.
‘조금이라도 화염에 익숙해지는 게 좋겠지.’
닐리아는 그걸 보다가 민망한 표정으로 물을 빌렸다.
마법이 편하긴 하구나!
신입생들이 이런 날씨에 여기까지 오다니? 위험하다. 돌아가라.
“!”
이한과 닐리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였다.
내가 어디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위험하다. 돌아가라.
‘누군진 몰라도 에인로가드에서 상위 5% 안에 드는 인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군.’
학생한테 위험하니까 돌아가라고 말하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먹을 게 필요합니다.”
대체 에인로가드는 왜 어린 학생들을 굶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위험하다. 돌아가라. 이 날씨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거라 쉽게 가라앉지 않을 거다.
상대의 친절한 태도에 이한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법학교에서 저런 상대는 흔치 않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했다.
“모습을 드러내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를 보는 건 너희들에게 별로 좋지 않을 텐데.
목소리는 예의를 잃지 않고 경고했다.
“어째서입니까?”
내 향기는 신입생들한테는 너무 독해서, 취하게 만들어버릴 테니까.
‘어떤 종족이지?’
상대의 경고에서 이한은 상대의 종족이 꽤나 특이하다는 걸 짐작했다.
향기만으로 주변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 수 있는 종족이라면...?
“하지만 저는 괜찮을 겁니다.”
“워다나즈.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닐리아가 속삭였다.
상대의 진지한 경고에 괜히 걱정되었다.
보아하니 절대 약한 상대는 아닐 것 같은데...
“괜찮아. 닐리아.”
“정말로?”
“그래. 그런데 넌 좀 위험할 것 같으니까 저리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
닐리아는 매우 걱정되는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 * *
새의 날개와 다리를 가진 간다르바는 새 수인족과 헷갈리기 쉬웠지만 엄연히 다른 종족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간다르바의 몸에서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점.
간다르바는 수인족보다는 정령 쪽 핏줄에 가까운 종족이었다.
이한에게 말을 건 간다르바는 오래 전부터 이 근처 바위풀 지하동굴에 자리 잡고서 사고가 없도록 관리해온 수호자 비슷한 존재였다.
그런 만큼 이렇게 접근해오는 마법사들이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간다르바는 지하동굴 입구 위에 묵직하게 쌓인 눈을 털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강렬한 향이 이한을 휘감았다.
아무리 술에 강하더라도 경험 적은 마법사는 절대 버틸 수 없...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한이라고 합니다.”
이한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간다르바는 당황했다.
당황을 추스를 시간을 주지 않고 이한은 계속 물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바위풀 동굴의 주인이라고 부르면 된다.
“!”
이번에는 이한이 놀랐다.
바위풀 동굴이면...
-바위풀 지하동굴(동굴 주인 조심)
번개걸음 교수가 알려준, 에인로가드 밖으로 나가는 길 중 하나 아닌가.
‘매우 멀쩡해 보이시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교수보다 눈앞의 간다르바가 더 친절하게 느껴졌다.
“바위풀 동굴의 주인이셨습니까?”
바위풀 동굴을 아는 건가?
순간 간다르바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이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도서관에서 이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동굴을 통과하려는 건 아니겠지?
“제가 말입니까? 동굴 밖에 무엇이 있길래?”
이한은 시치미를 뗐다.
뒤에서 듣고 있던 닐리아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니라면 됐다. 바위풀 동굴에는 관심도 가지지 말도록.
“한 가지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이들이라, 그냥 무작정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지 설명해주신다면 마법사들은 이해하고 관심도 두지 않을 겁니다.”
이한의 말에 간다르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입생의 말이 생각보다 그럴듯했다.
그럴 수도... 있긴 하겠어.
“예.”
바위풀 동굴은 매우 위험하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험합니까?”
“......”
닐리아는 뒤에서 이한을 뭐하냐는 듯이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설마 들어가려고 저러는 거 아니지?
대마법들끼리 충돌한 탓에 다른 계(界)가 중첩되고 불안정한 길이 되었지.
닐리아는 분명 이한과 같이 들었는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 소리지?’
“과연... 그렇다면 쉽게 건드릴 수도 없겠군요. 마력이 복잡하게 꼬여 있을 것이고, 다른 차원들이 겹쳐져 있는 상황이니...”
바로 그렇다.
“......”
닐리아는 배신감 섞인 눈빛을 던졌다.
‘마법사고가 심하게 난 지역인가.’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사고를 크게 치는 이들.
지금 당장 이 주변에 폭설이 내리는 것도 마법사고 때문이었다.
지하에 위치한 바위풀 동굴도 그런 마법사고가 일어난 지역이 분명했다.
대마법들끼리 충돌한 탓에 마력의 흐름이 엉망이 되고 정령계 같은 다른 차원도 섞이고...
이한은 메모를 마쳤다.
동굴의 수호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지만, 다른 교수들은 심심하면 오가는 곳.
분명 길을 지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위풀 동굴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고맙다! 너는 정말 다른 마법사들하고 다르구나. 분명 크게 성공할 거다.
간다르바는 이한의 납득에 기뻐했다.
자꾸 여길 발견한 학생들이 고개를 들이미는 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는데 정말로 다행이었다.
혹시 내가 도와줄 게 없을까? 아까 먹을 게 부족하다고 했었나?
“예. 그리고...”
?
“입을 옷도 부족합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추위라. 다들 헐벗은 채로 떨고 있습니다.”
“?”
닐리아도 의아해했다.
너 옷감 부자잖아...?
과연 그것도 그렇겠군.
“물약도 부족합니다. 추위 때문에 재료를 구할 수도 없어서...”
간다르바는 이한의 말에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다.
내가 챙겨주겠다!
* * *
“...사냥 갔던 거 아니었어??”
친구들은 이한이 끌고 온 수레에 경악했다.
아무리 사냥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잘 포장된 식료품은 물론이고 물약이나 외투를 사냥해 올 수는 없었다.
요네르는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작게 속삭였다.
“교수님의 공방을 사냥한 거야?”
“...참신한 발상이지만 아니야.”
이한은 갖고 온 물자를 친구들과 함께 정리했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이번 주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어지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긴 했지만...
‘그건 그 때 생각하자.’
이한은 다시 동굴로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상대가 친절했던 것이다.
‘주기적으로 찾아가봐야지.’
“다 준비했지?”
“출발한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와!”
외투를 단단히 껴입고 서로를 밧줄로 묶은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한의 지휘 하에 눈을 헤치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비장한 표정이었지만 이들이 향하는 곳은 마법학교의 본관이었다.
월요일 아침 강의를 들을 시간이었던 것이다.
“헉... 허억.”
“정신 차려! 쓰러지면 안 돼!”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서로를 당겨가며 간신히 본관의 정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본관 안도 추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눈보라와 강풍만 없어도 한결 살 것 같았다.
“여러분...”
가르시아 교수는 강의실 안에 앉은 학생들을 보고 매우 짠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가 이런 학교에 들어와서...
‘절반도 안 왔잖아?’
이한은 강의실에 있는 숫자를 보고 놀랐다.
이 자식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석을 하다니...
“버두스 교수님. 혹시 오늘 부여 마법 강의 주제는 냉기 대비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가르시아 교수는 옆에 서있던 비버 수인족 교수에게 부탁했다.
원래라면 부여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설명하는 시간이 되어야 했지만...
지금 반쯤 얼어붙은 학생들의 꼴을 보니 냉기 대비가 훨씬 더 중요해보였다.
“왜? 왜 그래야 해?”
“부탁드려요.”
“신입생들은 멍청해서 가르쳐줘도 못 하는데?”
“그래도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한두명 정도는 꾸준히 시도해서 성공시킬 수 있을 거예요.”
“아니야. 멍청해서 못 해.”
“하시라고요.”
가르시아 교수는 교탁 귀퉁이를 손아귀 힘으로 으깨버렸다.
버두스 교수는 바로 납득했다.
“할게! 해야겠네!”
‘가르시아 교수님 앞에서는 정말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