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네?”
“무슨 말씀이세요?”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번개걸음 교수를 쳐다보았다.
-우리 친해요!
그게 더 번개걸음 교수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봐라! 떨고 있지 않느냐!”
“어? 추워서 떠는 게 아니었나?”
“......”
물론 공포로 말을 듣게 하는 것도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긴 했다.
급한 상황이라면 친해질 시간이 없는 만큼 겁을 줘서라도 말을 듣게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러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저런 식으로 길들이면 이한이 없을 때 눈도마뱀이 무조건 도망갈 것 아닌가.
눈보라 기간에 버티라고 줬더니 하루 만에 잃어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어이없을 일이었다.
“저기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처럼 친해져라. 겁 그만주고!”
“이상하다... 친해진 줄 알았는데.”
“우리 친해진 거 아니었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질문에도 눈도마뱀은 딸꾹거리며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보다 못한 번개걸음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한을 불렀다.
“너 이리 와라.”
“이게 제 잘못은 아닙니다만...”
“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건 가끔 불합리한 법이지.”
번개걸음 교수도 이한이 딱히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았다.
마력에 예민한 눈도마뱀이 접근만 해도 지레 겁먹고 벌벌 떠는 게 이한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가끔 불합리한 법.
이렇게 된 이상 이한은 그냥 따로 떨어져 있어야 했다.
“미안하다. 다음에는 마력에 둔감한 몬스터를 데리고 오마.”
“오.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진 않은데 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긴 하겠군.”
“......”
이한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눈도마뱀 흉내를 내는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번개걸음 교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이한을 위로했다.
“그래도 저런 우스꽝스러운 꼴을 안 하니까 좀 낫지 않나?”
“교수님. 다 들립니다.”
* * *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은 친해진 눈도마뱀을 데리고 탑으로 돌아갔다.
파파파파파팍!
눈도마뱀은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뚫고 순식간에 길을 만들었다.
번개걸음 교수는 여전히 조금 미안했는지 이한을 데리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모든 몬스터와 친해질 수는 없는 법이지. 눈도마뱀은 겁이 많고 마력에 예민해서 그래. 마력 둔감하고 겁이 없는 몬스터는 이런 일이 없을 거다.”
“그런 놈이 많이 드물지 않...”
번개걸음 교수는 탁자 아래로 조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우레걸음 교수는 수염을 깨물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실 거나 갖고 와.”
“예...”
우레걸음 교수는 우유가 담긴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덥힌 다음 차를 섞었다.
이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따끈따끈한 스콘 빵을 슬쩍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눈도마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다. 눈보라가 그치면 볼 일도 없지.”
“언제쯤 끝날까요? 이번 주?”
“어...”
“음...”
두 교수는 머뭇거렸다.
이한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설마 남은 학기 내내 눈보라 뚫고 출석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학생들이 해결해야 하는 거라서 말이지.”
“...선배들이신데 그래도 잘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음...”
두 드워프 교수는 계속해서 말끝을 흐렸다.
이한은 그래도 선배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학생들의 실력은 늘어났다.
그리고 학생들이 해야 할 일의 질과 양도 늘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에 폭설 사고가 일어나면?
-눈보라가 치지만 나는 크게 불편하지 않으니까 일단 할 일부터 처리하고 알아봐야겠다.
-눈보라가 치지만 나는 그럭저럭 괜찮으니까 오늘 마법 실험부터 하고 고민해봐야겠다.
...같은 식의 미루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설마.’
두 드워프 교수의 태도에서 이한은 불길한 징조를 눈치챘다.
‘선배들이 해결을 미루나?’
원래 자기 급한 일 아니면 뒤로 미루는 게 사람의 습성.
진실을 알아차린 이한은 분노했다.
‘대체 몇 학년이 사고를 쳤길래 이렇게 무책임하게!’
“그래도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해결되지 않겠냐?”
“안 되면 어떡합니까?”
“안 되면... 네가 직접 해결하는 것밖에 없지 않겠냐?”
“직접 해결하면 담당 교수가 높게 평가하긴 하겠군.”
이한은 두 교수의 어이없는 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고학년들이 시험 보다가 사고 친 걸 신입생이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그래. 내가 봐도 그건 좀 심했다.”
“같이 동의하셔놓고.”
우레걸음 교수는 투덜거렸다. 번개걸음 교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말 중 틀린 건 없다. 고학년들이 게으름을 피우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지.”
“정말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진 말고. 고학년들이 무슨 사고를 쳐서 이 꼴이 난 건진 모르겠지만 쉽게 해결하기는 힘들 거다.”
우레걸음 교수는 혹시 몰라서 경고했다.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지만 이 정도 사고가 나려면 그 마법의 규모도 상당할 터.
신입생이 해결해보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절 뭘로 보시고... 제가 그런 일에 무모하게 나설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응.”
“보이는데.”
“......”
두 드워프 교수의 반응에 이한은 살짝 상처받았다.
왜 이런 오해가?
“아닙니다.”
“그래. 알겠다. 믿어줄 테니까 간식이나 좀 싸갖고 돌아가라. 참. 탑으로 돌아가도 눈도마뱀한테는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그리고 포상에 혹하지 말고. 담당 교수한테 포상 받겠다고 뛰어들 이유가 없는 일이다. 그냥 선배들이 해결하기를 기다려.”
“아. 알겠다니까요.”
이한은 투덜대며 오두막 문을 열고 나섰다.
두 드워프 교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래도 뛰어들 것 같지 않나?”
“그럴 것 같긴 합니다.”
이미 두 드워프 교수에게 이한은 마법에 인생의 절반 정도는 바친 신입생으로 보였다.
아니라고 말해도 결국 마법에 대한 탐구심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으리라!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나...’
* * *
저녁.
흑마법 추가 강의를 위해 모인 학생들은 모르툼 교수의 공방에서 열심히 깃펜을 놀렸다.
1서클 마법 <뼈다귀 손 소환>의 상위 버전인 2서클 마법 <뼈 구속구 소환>.
그리고 처음에 배웠던 1서클 마법 <하급 마비 저주>의 다른 계열인 <하급 침묵 저주>, <하급 암전 저주>, <하급 골절 저주> 등.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 계열로 가면 <산공독 생성> 말고도 여러 종류의 독이.
소환 계열로 가면 뼈뿐만이 아니라 여러 언데드 소환수들이.
사령(死靈) 계열이나 음에너지의 정수인 암흑 계열 마법은 아직 배우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옆에 있는 가이난도의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게 보였다. 라파드엘도 머리를 싸매고 끙끙댔다.
“콜록. 물론 지금 다 익히라고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가이난도의 얼굴이 밝아졌다.
“콜록. 하지만 내년에 본격적인 흑마법 공부를 하려면 이들 중 한두개는 완벽하게 익히는 게 좋을 거다. 흑마법의 세계는 넓은 만큼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가이난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콜록... 아. 이 멍청이들이 하필이면 학교를 더 춥게 만들어서...”
모르툼 교수는 콜록대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한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이 사고의 이유를 아십니까?”
“콜록. 그래. 내 제자 중 한 명이 사고에 참가했으니까.”
“!”
이한은 순간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같은 공방 선배를 너무 증오하는 표정을 보여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과연... 그런 안타까운 사고는 대체 어쩌다가 발생한 겁니까?”
“애송이들이 욕심만 많아서지.”
모르툼 교수는 콜록대며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흑마법 전공 하나, 소환마법(원소 계열 정령) 전공 하나, 고대마법 전공 하나.
-유적에서 정령 주문 하나 발견했다! 불완전하지만 이걸 잘 복원만 시키면 올해 제국 소환학계는 우리 무대가 될 거야! 고대마법 전문인 네 도움이 필요해!
-이건 올로델 학파 양식 같은데. 흑마법이 섞였어. 흑마법 전문을 부르자고.
-불렀어? 잠깐. 이 소환 주문은 불완전하잖아? 뭘 이런 걸 가지고 사람을 불러?
-걱정하지 마. 불완전한 부분은 대체 주문으로 완성시켰지. 봐. 안정적이지?
-하지만 고대마법 전문인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힘이 부족해. 증폭이 필요할 것 같은데. 증폭의 유물을 사용하자. 연구비 남은 게 있어.
-잠깐.
-왜? 설마 겁쟁이처럼 무모하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기왕 증폭시킬 거면 음에너지도 증폭시키자. 보니까 정령이 냉기와 암흑이 섞인 것 같은데, 음에너지가 너무 적어서 균형이 위험해보여.
-역시 흑마법 전문을 잘 불렀다니까. 아주 좋은 생각이야.
“......”
“......”
자리에 있던 신입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선배가 죽이고 싶어졌다.
심지어 이 자리에서 가장 선량한 이미르그도 눈빛이 매서워졌다.
저런 미친 인간들 때문에 그들이 지금 주말부터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교수님께서 아주 따끔하게 혼을 내주시죠!”
“콜록. 이미 그러고 있다. 빨리 고치라고 하고 있는데 영 시원찮단 말이지.”
가이난도의 말에 모르툼 교수는 투덜댔다.
그 모습에 이한은 갑자기 증오가 사그라들었다.
물론 다른 선배들은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당사자들은 지금 교수들한테 구박을 당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증오할 정도로 이한은 가혹하지 않았다.
“콜록. 그래. 신입생들은 한 번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뭘 말입니까?”
혼자 용서하고 있던 이한은 위험한 징조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실패한 소환의 현장.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모르툼 교수는 흑마법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학생들에게 흑마법의 매력을 알려주려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런 짓이 정말로 흑마법의 매력을 알려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 * *
‘이런 길이 있었군.’
모르툼 교수는 본관의 벽을 두드리고 천장을 열어젖히며 거침없이 본관 건물 안을 입체적으로 질주해나갔다.
이한은 그 길을 외우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모르툼 교수가 주문을 외우는 걸 보니 이한의 마법 실력으로 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몇 층이야 여기?”
“글, 글쎄...”
이미 신입생들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한기가...’
통로를 빠져나온 이한은 갑자기 지옥 같은 한기가 몰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밖의 눈보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한기였다.
마력 자체가 추위라는 속성을 띠고 퍼져 나오는 것 같은 한기.
그리고 언데드들의 소리가 들렸다.
-■■■■■...
-■■■■...
“헉!”
가이난도가 이한의 뒤로 숨었다. 모르툼 교수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얼어붙은 시체들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왜 본관 복도에 언데드들이 돌아다닙니까?”
“콜록. 정령을 잘못 소환해서 이 꼴이 난 거지.”
정확한 절차와 과정으로 정령을 소환하면 이럴 일이 없었다.
불완전한 주문, 그걸 대신한 자의적인 해석, 유물이나 다른 것들의 증폭 때문에 지금 이 층에 소환된 건 말이 통하는 정령보다는 폭주한 몬스터에 가까웠다.
그것도 가만히만 있어도 주변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만들어버리는 몬스터.
냉기와 암흑이 섞인 정령이 기본인 만큼, 차원이 녹아들어간 복도 공간에서 언데드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해치우면 되는 거 아닌가요?”
가이난도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이한은 감탄했다.
‘이 근처에 선배들이 있었다면 듣고 죽이려고 하겠는데.’
“콜록. 맞는 말이지.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모르툼 교수는 지팡이를 들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누가 봐도 못난 제자를 구박하려는 교수의 뒷모습이었다.
이한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며 복도의 저편을 쳐다보았다.
서리와 암흑이 섞여서 일렁이는 기묘한 광경은 솔직히 장관이었다.
‘이게 학교 전체에 폭설을 뿌리고 있지만 않으면 아름답긴 한데.’
-들어와라...
“?”
-들어와라... 힘을 원하는 자여...
이한은 복도의 저편 차원에서 누군가 텔레파시를 보내자 멈칫했다.
그리고는 외쳤다.
“교수님! 차원 안쪽에서 누가 말 겁니다!”
-...이런 겁쟁이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