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교수님께서 주신 귀중한 기회를 날려버린 못된 두 제자가 다시 뒤틀린 영역을 돌아보고 오는 동안, 이한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면 교수님. 내일 강의도 들어야 하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콜록. 그러도록 하게.”
이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것이다.
‘해결될 때까지 이 복도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군.’
“고생 많았다. 이미르그.”
“제... 제가 뭘 고생했다고요.”
“뭔가 이상한데, 아까부터 존대를 하고 있지 않나?”
* * *
화요일 아침.
눈도마뱀이 푸드덕대며 이곳저곳 길을 만들어댔다.
파헤쳐진 눈더미 사이로 생겨난 길을 따라,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목적지로 향했다.
이한도 친구들과 함께 연금술 강의를 듣기 위해 각수관으로 향했다.
“밖에서 하지 않아서 진짜 다행이다.”
이한은 요네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우레걸음 교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이런 날씨에 밖에서 강의를 했다가는 졸업하고 나서 우레걸음 교수를 찾아올 사람이 늘어날 테니까.
연금술 공방으로 사용되고 있는 탑, 각수관은 온실들이 여럿 들어서 있는 덕분에 공기부터가 따끈따끈했다.
“이런 날씨는 어떻게 보면 연금술사에게 행운이지.”
“......”
그 따끈따끈한 공기는 우레걸음 교수의 발언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머리카락에 붙은 눈을 털어내던 학생들은 우레걸음 교수를 어이없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생각해봐라. 폭설이 칠 때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렇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거다. 행운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하긴 이 사람도 마법학교의 교수였지.’
이한은 납득했다.
연금술에 관해서는 우레걸음 교수도 정상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든 우레걸음 교수의 말을 납득하려고 노력했다.
좀 어이없긴 했지만 각수관의 강의실은 따뜻하고 포근했으니까.
그러나 교수의 다음 말은 그런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자. 목록을 줄 테니까, 밖에 나가 최대한 많이 구해와라. 만들 수 있는 물약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신이 나지 않냐?”
일그러진 친구들의 얼굴에,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가 나중에 괜찮을지 진지하게 걱정이 됐다.
* * *
학생들은 교수에게 받은 두툼한 목록을 읽으며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비해 이한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구하기 쉬워 보이는 것부터 접근한다.’
그냥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맨손으로 귀환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것들로 바구니를 채우는 게 생색내기 좋았다.
다들 빈 손으로 돌아갔다가는 우레걸음 교수가 토라질 수도 있는 일이고...
“얼음질겅이, 설송화, 드워프버들.”
이한은 구할 수 있는 것들 중 그나마 쉬워 보이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정리했다.
‘이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군.’
두텁고 단단하게 쌓인 눈을 뚫고 올라오는 얼음질겅이 같은 건 비교적 구하기 쉬운 재료였다.
폭설 내릴 때 쌓인 눈을 헤치고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을 깬 뒤 물속으로 들어가야 구할 수 있는 재료와 비교하면...
‘아니. 양심이 없으신가? 이걸 어떻게 구하라고 써놓으신 거야?’
“워다나즈. 같이 가지.”
친해진 불사조 탑 사제들이 이한에게 말을 걸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앗. 플레맹 교단의 천재적인 후계자, 시아나 사제!”
“저런. 이번 연금술 중간고사 수석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아니신가요?”
시아나 사제는 저번과 달리 냉기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불사조 탑 사제들은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했다.
티질링이 자기 머리 뒤에 양쪽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누가 봐도 잔뜩 화가 났다는 뜻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억울하군.’
그저 열심히 공부했을 뿐인데 다른 친구에게 이런 오해를 받게 될 줄이야.
“하지만 시아나 사제. 차석도 잘한...”
“이한.”
요네르가 툭툭 찌르더니 작게 속삭였다.
“연금술 차석은 나야. 시아나 사제는 3등이고.”
“...!”
생각해보니 이한과 요네르는 같이 우레걸음 교수의 공방을 털었다.
그러지 못한 시아나 사제가 불리한 건 당연했다.
“미안. 요네르. 네 실력을 무시했군.”
“뭘 이런 걸 가지고. 나도 시아나 사제가 나보다 잘 볼 줄 알았는데.”
두 푸른 용의 탑 학생은 빠르게 이야기를 끝냈다. 이한은 전략을 바꿨다.
‘3등도 잘한 거라고 1등이 말하면 더 화나겠지.’
“우레걸음 교수님께서는 뛰어난 마법사지만, 아무래도 약점이 있으시군.”
“그게 무슨 약점인데, 이한?”
“공정한 시험을 볼 줄 모르신다는 약점!”
우레걸음 교수가 들었다면 억울했을 소리였지만, 이한의 말에 여러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학생들이 보기에도 물약에 필요한 재료를 교수가 치워버리는 건 선을 넘은 일이었던 것이다.
“공정하게 시험을 보셨다면 시아나 사제 같은 분이 수석을 했을 텐데, 이상하게 시험을 보니 변수가 생긴 거 아닌가.”
“그럴듯한데. 하긴 제대로 시험을 봤으면 그런 일이 생겼을 리가 없지.”
이한과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했다.
하지만 말이 대화였지 시아나 사제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실제로 이한은 볼 수 있었다.
시아나 사제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는 모습을!
“시아나 사제. 재료를 찾아야 하는데 우리끼리는 부족함이 많군. 혹시 도와줄 수 있...”
“물론 도와드려야죠.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시아나 사제는 풀어진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했다.
옆에 있던 아산이 중얼거렸다.
“어. 그럼 황녀님은 몇 등이지?”
악수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3등까지 있었다.
그러면?
요네르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황녀님은 가이난도 같은 사람이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런가?”
“......”
이한은 살짝 불안해졌다.
‘오늘 재료 수집하면서 황녀 패거리하고 마주치지 말아야겠군.’
* * *
“저기 얼음질겅이에요!”
“역시 시아나 사제!”
“역시 시아나 사제!”
이한과 요네르는 양손을 부딪쳐가며 박수쳤다. 아산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대단하긴 한데 매번 이렇게 계속 박수를 치는 이유가 있나?”
“조용히 해라.”
“!?”
이한은 아산의 입단속을 시키고 얼음질겅이를 캐낼 준비를 했다.
눈 위에 단단히 자리 잡은 풀은 캐내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파내라.”
그러나 이한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한은 1서클 마법, <구덩이 파기>을 시전했다.
작은 구덩이를 파는 흙 원소 마법이었다.
“워다나즈. 얼어서 안 될 텐데?”
그 모습에 아산이 의아해했다.
아산도 강의 시간에 같이 배운 만큼 저 마법은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저건 부드러운 흙을 상대로 통하는 마법이었지, 단단하게 얼어붙은 상황에서는 잘 통하지 않았다.
방금 푸른 용의 탑 학생 한 명이 하다가 포기했...
“파내라, 파내라, 파내라, 파내라.”
콰직!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이 부서지며 그대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이한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말 했나?”
“아, 아니. 아무것도.”
아산은 묘한 감동을 느꼈다.
그렇구나!
마법이 안 통하면 될 때까지 계속 하면 되는구나!
* * *
닐리아는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과 같이 산속을 헤맸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한이나 요네르 일행에 끼는 게 마음이 편했지만,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기 덩굴 보여? 저건 자르면 수액이 나오는데 목이 마를 때 요긴해.”
“오... 그렇구나. 대단해.”
“......”
친구들의 심심한 반응에 닐리아는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다.
이한이었다면 ‘뭐? 그게 정말이야?! 잠깐 기다려봐. 정말이군. 이거 이름이 뭐지? 주로 어느 곳에 살지? 비슷한 효능을 가진 다른 식물도 있나?’물었을 텐데...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이 나쁜 친구들은 아니었지만 사냥꾼에 별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번에 사온 잡지 봤어?”
“봤지. 이번에 블도하 선수가 타고 나온 말이 진짜 대단했지!”
“아, 교장 선생님 카드를 덱에 넣어야 하나? 살려보고 싶은데.”
“무리야. 포기해. 쓰레기 카드라니까.”
“......”
닐리아는 형언할 수 없는 깝깝함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
저 멀리서 낯익은 친구들이 비탈길에서 무언가 캐내는 게 보였다. 닐리아는 손을 흔들었다.
“?”
이한은 얼음질겅이를 바구니에 집어넣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과 같이 있는 닐리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닐리아네?”
“아니... 저건 수신호인데.”
닐리아가 <그림자 순찰대> 특유의 수신호로 이한에게 손짓했다.
-살려줘!!
“!?”
이한은 깜짝 놀랐다.
‘뭐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협박이라도 하나?’
닐리아는 친구들이 오면 이 숨막히는 분위기가 사라질 것 같아서 살려달라고 한 것이었지만, 이한에게는 그런 숨겨진 뜻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보군. 다들 지팡이 들어라.”
이한과 친구들은 지팡이를 들고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표정이 심각했기에 닐리아는 당황했다.
“?!”
당황하던 닐리아는 그제야 자기가 보낸 수신호가 다른 뜻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제라도 잘못 보냈다고 해야 하나?’
닐리아는 그럴 경우 이한이 자기한테 마법을 날릴지 안 날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친구 성격에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
-■■■■■! ■■■■■!
“몬스터다!!”
“살았다!”
“뭐라고? 닐리아?”
“아, 아니. 말이 잘못 나왔어.”
* * *
달려가던 이한과 친구들은 감탄했다.
저렇게 감쪽같이 접근하는 몬스터를 먼저 눈치채다니!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림자 순찰대의 비전이겠지.”
이한은 존경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감탄했다.
“과연... 역시 그림자 순찰대야.”
“흰눈도치를 이렇게 먼저 알아채는 건 저희 교단 사제님들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자. 일단 도와주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빠르게 대응에 나서고 있었다.
흙으로 된 벽을 둥그렇게 쌓아올려 몬스터의 기습적인 돌격을 막고, 몸을 가린 채 안에서 마법을 날렸다.
매직 미사일이 날아들자 흰눈도치가 몸을 부풀리며 불규칙한 궤도로 움직였다.
커다란 고슴도치처럼 생겼지만 한 번 제대로 부딪치면 뼈 몇 개는 가볍게 부러뜨릴 거대한 덩치를 가진 몬스터인 만큼 학생들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잖아?!”
“흰눈도치를 잡아서 어디에 쓰려는 거지?”
“그냥 도와주러 오는 거 아니야?”
“워다나즈가 그렇게 만만해보이나? 절대 이유 없이 움직일 녀석이 아니야! 흰눈도치를 잡으려는 게 분명해!”
“......”
닐리아는 속으로 이한에게 사과했다.
‘더 변호해주지 못해서 미안!’
“워다나즈! 흰눈도치를 잡으면 양보하겠다! 같이 협력해다오!”
“뭘 잡는다는 거냐? 쫓아내기나 해라!”
이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약초 캐러 왔지 몬스터를 잡으러 온 게 아니었던 것이다.
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는 게 가장 좋은데...
“어? 정말 쫓아내도 되나?”
“그래! 쫓아내라!”
“하지만...”
“쫓아내라고.”
“미, 미안하다.”
이한이 정색하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꼬리를 내렸다.
‘진짜 쫓아내도 되나 본데?’
‘그러게.’
다른 탑 학생들이 영 못 미더워보여서, 이한은 샤르칸을 불러냈다.
“샤르칸. 네가 도와줘야겠다. 놈의 발을 묶어라!”
녹색 표범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나갔다.
흰눈도치도 샤르칸의 접근을 눈치챘는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한을 발견했다.
-!
파파팍!
깜짝 놀란 흰눈도치는 바로 눈 속으로 들어가더니 반대쪽으로 멀리 달아나버렸다.
열심히 달려가던 샤르칸은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이한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