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얼마나 지났을까.
뒤에서 날아온 공격에 쓰러졌던 첨탑지기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일어났다.
침입자 공격 아티팩트가 깨어났는데 신입생을 두고 쓰러지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실수였다.
첨탑지기는 제발 늦지 않았기를 빌며 지팡이를 붙잡고 일어섰다.
“...?!”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첨탑지기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창고 안은 반파 상태였다.
어찌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널브러져있던 잡동사니들은 전부 다 박살이 나서 뒹굴고 있었다.
첨탑지기는 교장의 창고 안에 있는 아이템들이 박살난 것에 절망하거나 기겁하지는 않았다.
사실, 여기 아이템들은 교장이나 귀하게 여기는 거지 첨탑지기는 별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자기 물건도 아니었다.
첨탑지기는 그보다 신입생이 침입자 공격 아티팩트와 이 정도로 팽팽하게 싸웠다는 것에 놀랐다.
아티팩트가 덤벼드는 걸 보면 절대로 저학년이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으윽.”
이한은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앞에는 그슬리고 얼어붙은 아티팩트들이 떨어져 있었다.
냉기를 퍼붓고 퍼붓고 퍼부어서 간신히 봉인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온몸이 쑤셨다.
‘볼라디 교수의 가르침이 맞았을 줄이야.’
이한은 몸의 피곤함보다 볼라디 교수의 말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싫었다.
마법사는 어느 순간에라도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아티팩트한테 꿰뚫려 바람구멍 몇 개는 생겼을 터.
“잘했다. 샤르칸.”
샤르칸은 그릉거리며 기분좋아했다.
이 강력한 언데드 소환수가 없었다면 아티팩트를 붙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한이 각종 마법을 난사하며 아티팩트를 힘으로 타격하는 동안 샤르칸은 온몸을 던져 아티팩트의 움직임을 짓눌렀다.
샤르칸이 아니었다면 진작 몇 군데는 찔렸으리라.
‘그나저나... 아티팩트들은 다 이렇게 단단한가?’
무생물 형태의 적이 이렇게 위협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번개를 꽂고 화염을 작렬시키고 마력을 폭발시키고 저주를 퍼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섬뜩함.
상대의 급소만 노리며 달려오는 아티팩트는 공포 그 자체였다.
방 전체가 얼어붙을 정도로 냉기를 퍼붓고 퍼부어 간신히 발을 묶은 것이다.
‘앞으로 아티팩트 형태의 적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친다.’
첨탑지기가 정신을 차렸는지 이한에게 다가왔다. 이한은 그제야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박살난 창고를 보니 갑자기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공포가 밀려왔다.
해골 교장이 과연 이 광경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설마 전부 다 내 탓으로 하는 건 아니겠지.’
이한은 첨탑지기가 발을 빼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양심이 있다면 자기가 쓰러진 탓에 이렇게 됐는데 책임을 피하지는 않겠지만...
원래 이 마법학교가 양심은 정문에 두고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슥-
그러나 첨탑지기는 이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한 것이다.
“...!”
* * *
‘왜 안 오지?’
즐거운 마음으로 ‘추운 겨울의 글로브’를 기다리고 있던 해골 교장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눈치챘나?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어떤 천재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마법을 미리 볼 수는 없지.’
해골 교장은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추운 겨울의 글로브>는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을 위한 깜짝선물이었다.
이한이 갖고 들어오는 순간 글로브 안에 갇혀 있던 날씨가 강의실에 풀려나고, 학생들은 강의실 안에서 맞이하는 눈보라에 해맑게 기뻐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안 오지?
쉭!
창밖에서 언데드 맹금류가 날아왔다. 발목에 첨탑지기가 보낸 편지가 묶여 있었다.
그 모습에 해골 교장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지금 당장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대체?’
해골 교장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워다나즈 놈이 도중에 눈치채고 도망쳤나?
아니면 첨탑지기를 쓰러뜨리고 창고를 약탈하려고 했나?
그럴듯한 가설들이 떠올랐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쯧.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자습하고 있도록 해라.
“!”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없는 동안, ‘나는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마법을 멋대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를 일만번 써놓고 있도록.
학생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골 교장은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첨탑 쪽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 * *
......
해골 교장은 자신의 텅 빈 눈구멍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사실 진짜 눈물은 아니었다. 리치는 눈물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해골 교장은 뜨거운 눈물이 자신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이건 너무하잖나.
해골 교장의 목소리가 슬픔으로 떨리자 이한의 공포는 몇 배로 뛰었다.
차라리 화를 내면 모를까 저런 모습이라니.
툭툭-
첨탑지기는 그런 해골 교장을 건드리더니 종이를 내밀었다.
저 신입생이 아티팩트를 제압했으니 포상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해골 교장은 저런 눈치 없는 놈을 하수인으로 데리고 온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
어떻게 된 게 옆에 있는 신입생보다 눈치가 없단 말인가!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응?
하지만 원칙적으로...
원칙이고 뭐고 내 가슴이 찢어지고 있네! 잠깐. 어떤 아티팩트가 이 난동을 피운 거지?
성질을 내던 해골 교장은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보아하니 창고에 웬 아티팩트 하나가 잘못 깨어나서 이 난리를 피운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해골 교장은 여기 창고에 그런 걸 둔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뒀으면 신입생을 보내거나 첨탑지기를 들여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지?
저번에 부탁받았던, <원수 살해의 마검>과 <거인 포박의 쇠사슬>이 완성되어서 두고 감.
-비블레 버두스
난장판 사이에서 쪽지를 찾은 해골 교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번에 큰 마음 먹고 재산 쪼개서 버두스 교수한테 제작 의뢰를 맡긴 아티팩트.
...그 아티팩트를 완성시킨 교수가 창고에 두고 간 것이다.
깜짝 선물로!
‘...아니. 아니지.’
버두스 교수는 깜짝 선물을 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귀찮아서 가까운 창고에 두고 간 게 분명했다.
죽여버리겠다! 비블레!
해골 교장은 분노로 포효했다.
그 뿜어내는 마력의 압박으로 인해 첨탑지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교장 선생님. 여기 첨탑지기께서 힘들어하시는 것 같...”
이한은 두려웠지만 첨탑지기를 위해 입을 열었다.
해골 교장은 정신이 들었는지 마력 방출을 멈췄다.
...아니 지금 신입생한테 걱정을 받는 건가?!
첨탑지기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상황 파악이 모두 끝난 해골 교장은 혀를 차고 허탈하게 천장을 쳐다보았다.
딱히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 아닌, 불운과 불행으로 인한 사고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니지. 비블레의 잘못이지.’
해골 교장은 정신을 차렸다.
하도 정신적 타격이 커서 그냥 넘어갈 뻔했던 것이다.
‘죽여버리겠...’
툭툭-
?
다시 첨탑지기가 건드리며 부르자 해골 교장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신입생이 아티팩트를 제압했으니 포상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하도록 하지.
해골 교장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첨탑지기의 말이 맞았다.
해골 교장이 버두스 교수한테 의뢰해서 만든 마검과 쇠사슬은 보통 아이템이 아니었다.
그걸 신입생이 제압했다는 건, 해골 교장도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지금 해골 교장은 너무 마음이 아프고 허탈해서, 누군가에게 놀라거나 칭찬해 줄 여유가 없었다.
나중에 해주마. 알겠나?
“예. 뭐.”
이한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이 자리를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고 싶을 뿐.
팟!
해골 교장이 사라졌다.
이한은 비블레 교수를 속으로 애도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칭찬하려고 가는 건 아닐 테니까.
툭툭-
“?”
첨탑지기가 잘 포장된 꾸러미를 하나 이한의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했다.
포상 관해서는 고나달테스 님에게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한은 감동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어쩌다가 해골 교장 같은 사람한테 고용되어서...
* * *
오후.
이한은 부여 마법 추가 강의를 듣기 위해 비블레 버두스 교수의 공방, 성각관으로 향했다.
‘놀랍군.’
놀랍게도 꽤 많은 학생들이 탑 앞에 모여 있었다.
버두스 교수가 최악의 교육자라는 걸 감안해보면, 부여 마법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모르툼 교수님이 괜히 불쌍해지는군.’
교수를 동정하는 건 금기 중의 금기였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가끔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잠깐. 그런데 왜 다들 안 들어가고 밖에 서있지?”
“문을 안 열어주시는데?”
이한은 친구들 사이로 나아가 공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교수님? 계십니까?”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서로 상의하는 듯한 소곤거림이 들렸다.
-어떡하지? 정말 해도 되나? 나중에 징벌방 가는 거 아니야?
-교수님 대신 강의해도 좋다고 허락받았잖아.
-그래도... 그걸 어떻게 믿어?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문이 열렸다.
“!”
“!!!!”
일학년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문 뒤에 있는 건 버두스 교수가 아니라, 처음 보는 고학년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학년 학생들도 깜짝 놀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학년 학생 중 한 명만 깜짝 놀랐다.
‘그 신입생이잖아!?’
코홀티의 친구이자 고대마법-부여마법을 전공하는 4학년 학생, 쿠만다스는 이한의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어? 잠깐만. 얘 흑마법 전공하지 않나?’
쿠만다스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물론 이중전공, 혹은 삼중전공이 없는 사례는 아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설령 이중전공을 하더라도 쿠만다스처럼 서로 연관성이 높고 공부하기 쉬운 분야를 골라 이중전공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이 따라가다가 쓰러지는 것이다.
실제로 쿠만다스는 부여마법을 먼저 전문적으로 배우고, 그 다음 고대마법에서 아티팩트 분야를 추가적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사실상 부여마법과 연계되는 이중전공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눈앞의 학생은 1학년 때부터 흑마법+부여마법 전공을...?
‘1학년부터 양쪽을 배우는 거면 상당히 어렵고 힘들 텐데.’
쿠만다스는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디레트가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1학년 아닌가.
친구들 사이에서 ‘워다나즈 가문에서 대법 시전한 거 아닌가’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1학년이었으니...
저 정도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런 천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궁금하단 말이지.’
쿠만다스는 궁금해졌다.
물론 쿠만다스도 제국 전체로 놓고 보면 천재가 맞았지만, 이 마법학교는 제국의 천재들 중 천재들만 모아놓는 곳.
그 곳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진짜 천재는 격이 달랐다.
바로 눈앞의 워다나즈 가문 출신 소년처럼!
‘저런 녀석이랑 비교하면 나는 아주 평범한데...’
조각상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는 이한의 모습은 더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잠잘 때 빼고는 언제나 마법의 세계에 빠져있는 마법사처럼 느껴졌다.
“선배님.”
“왜 그러지?”
조각상, 아니, 천재가 입을 열었다.
“탁자 위에 있는 간식 먹어도 됩니까?”
“...어? 어어. 먹어도 되는데...”
“된단다.”
“워다나즈, 고마워!”
다른 1학년 학생들은 이한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우르르 안으로 들어오는 신입생들의 모습에, 쿠만다스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어라...?
‘뭔가... 뭔가 생각했던 거랑 다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