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무기에 마력을 담는다는 건 매우 뛰어난 검사의 증거처럼 들렸지만, 사실 그 정도로 난이도가 있지는 않았다.
이한도, 더르규도, 지젤도 당장 무기에 마력을 어느 정도 담을 수 있었다.
아마 셋보다 실력이 부족한 흰 호랑이 탑 학생 두셋 정도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십 년 넘게 기사 가문에서 꾸준히 검술을 수련한데다가 에인로가드에 입학할 정도의 재능인 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담은 마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게 어렵고 중요한 거였지, 일순간 마력을 담는 건 비교적 난이도가 낮았다.
그러나 투척 무기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졌다.
검이라면 마치 신체의 일부분처럼 계속해서 마력을 순환시키면서 안정적으로 담은 마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던지는 순간 손끝에서 떨어지는 투척 무기는 훨씬 더 까다로웠다.
순환으로 마력 회수도 안 되는 만큼 마력 소모도 컸고 컨트롤의 난이도도 몇 배로 올라갔다.
즉...
“너 마법 썼지!?”
“오해다.”
코피를 흘리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씩씩댔다.
아무리 오해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건 선을 넘었다.
눈덩이에 마력을 담아서 던진다?
정말 많이 양보해서 그럴 수 있었다.
대체 마력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계속 던져도 지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눈덩이에 냉기 속성의 마력을 담아서 던진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됐다.
워다나즈가 무슨 투척 무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닌데 그런 비전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투척 무기에 마력을 담아서 던지는 것도 어려웠지만 거기에 원소 속성 부여까지 한다는 건 정말...
흰 호랑이 탑 학생들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마법 썼잖아! 이렇게 눈덩이가 얼어붙어서 오는데!”
“마력을 불어넣어서 던졌더니 알아서 얼어붙은 거다.”
“그게 말이 되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가 막혔다.
차라리 ‘사실 워다나즈 가문에는 투척 무기의 비전이 있다’라고 우겼다면 나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마력에 냉기가 부여됐다니 그게 무슨 지팡이 없이 손 휘둘렀는데 매직 미사일 나가는 소리란 말인가!
“친구들아! 내 말을 들어다오! 이한의 말은 정말이다! 어떤 마법도 쓰지 않았다!”
“더르규 저 자식 또 속고 있어!”
“더르규 너 임마 귀 그렇게 얇으면 안 돼!”
“......”
더르규는 풀이 죽어서 다시 앉았다. 지젤이 혀를 차더니 말했다.
“마법 안 썼다! 내가 봤어.”
“모라디!?”
“속지 마. 모라디 지금 같은 편이라고 편들어주는 거야.”
‘이런 개새끼들이...’
지젤은 속으로 욕했다. 이한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들 친구들한테 신뢰받지 못하는군.”
“......”
“......”
더르규와 지젤은 처음으로 뜻이 일치했다.
말이나 못하면!
“다들 무슨 일입니까?”
잉걸델 교수는 의아하다는 듯이 올라왔다.
학생들이 던지란 눈뭉치는 안 던지고 코피를 흘리며 말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 워다나즈가...”
코피 흘리는 흰 호랑이 탑 학생이 울먹이며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지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까 흰 호랑이 탑 망신시킬 때만 해도 여기서 더 망신시킬 수 있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더 망신시킬 수가 있었다.
“과연.”
잉걸델 교수는 놀라워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증언도 놀라웠고 지금 상황도 놀라웠다.
‘워다나즈 같은 학생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이한이 그 정도로 순수하고 선량하기보다는, 이한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 이렇게 대놓고 들킬 속임수를 쓸 것 같진 않았다.
잉걸델 교수도 나름 제자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한은 당당하게 말했다.
“교수님.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
잠시 후.
확인을 끝낸 잉걸델 교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마법 아니군요.”
“!?”
“아, 아니. 교수님! 진짜 눈덩이가 얼어붙었다니까요!? 저거 완전 돌멩이에요!”
“으음... 마법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식견이 깊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지금 주변 환경이 냉기로 가득차서 워다나즈가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군요. 무의식적으로 마력에 냉기 속성을 부여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잉걸델 교수의 설명에 학생들은 ‘오’하고 납득했다.
확실히 주변 환경은 마법사에게 영향을 끼치곤 했다.
지금처럼 부자연스러운 혹한의 환경이 워다나즈의 마력에 일시적으로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냉기 속성을 제거하죠?”
“불 같은 걸 붙이나?”
“무슨 소리를?”
잉걸델 교수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네? 어... 냉기 속성을 제거해야 하지 않나요?”
“눈싸움의 순수성이란 게 있으니까 제거해야 하지 않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잉걸델 교수의 시선에 말을 더듬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설마?
“무기에 마력 불어넣는 건 기사의 기술인데 제거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들 계속하시죠.”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잉걸델 교수가 마법을 금지해서 잊기 쉬웠지만, 잉걸델 교수는 따뜻하고 화기애애한 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전에 가까운 강의를 추구하는 사람!
탓-
이한과 더르규, 지젤이 바위 뒤에서 몸을 내밀었다.
셋의 양손에는 얼어붙은 눈뭉치가 들려있었다.
“잠ㄲ...!”
* * *
“이한. 돼지는 어떻게 나누지?”
“음... 나눠서 갖고 가는 것보다, 그냥 강의 들은 친구들 자리에서 대접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군.”
이한의 말에 더르규는 놀랐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그래.”
“이한. 네 명예로움에 다른 친구들도 감동을 받을 거다.”
‘아닐 텐데.’
‘아닐 것 같은데.’
이한과 지젤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기 몇 점 준다고 마음이 풀리기에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너무 많이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너 눈 위에 연고 덜 발랐어.”
“넌 코피 다시 난다.”
산에서 내려온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꼴이 엉망이었다. 마치 누구한테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코피에 멍에 옷은 넝마가 되어 있고...
삼삼오오 구석에 모여 앉아 잉걸델 교수가 준 연고를 바르는 모습이 상당히 처량했다.
오죽하면 이한도 고기를 가져가는 걸 포기하고 대접하자고 마음먹었을까.
더르규와 지젤은 단검을 뽑아들고 정확하게 고기를 떼어냈다.
기사 가문 출신들은 대체로 사냥 경험이 많았고, 아니더라도 에인로가드에 들어와서 한 달 정도 지내면 사냥 경험이 많아지게 되어 있었다.
둘은 등심이나 안심 같은 커다란 부위들을 제외한 작은 살점들도 한곳에 잘 모아 놨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소시지로 만들기 좋았던 것이다.
“???”
고기를 자르던 더르규는 이한이 주머니에서 향신료 통을 꺼내는 걸 보고 놀랐다.
...그걸 왜 들고 다니지?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한은 냄비를 올리고 불을 피웠다. 혹한의 추위 덕분에 화염 마법은 쉬운 편이었다.
그리고는 비계를 잘라서 냄비에 넣었다. 녹여서 돼지기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냄비를 불 위에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한은 쉬지 않았다. 남은 살점들과 향신료를 섞어서 바로 소시지를 만들었다.
어지간해서는 이한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지젤이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움직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한은 가문에서 가장 야영 경험이 많은 기사와 맞먹을 정도로 잡일을 잘했다.
...대체 왜 기사 가문도 아닌, 대귀족 가문 출신 소년이 저렇게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와서 먹어라.”
“어?? 정말로??”
‘방금까지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으면서 이 자식들이.’
처음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었지만, 작업이 진행되면서 점점 뚫어져라 부담되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이 말하는 의미는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우리도 좀... 주려나?
지젤은 얕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속 보이는 행동이라니.
오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고 있었다.
바닥 밑의 바닥 밑을 보여주다니...
“그... 그러면 조금만 먹어볼까?”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기사답지 않으니까?”
이한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눈뭉치를 너무 많이 던졌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봐주자!
이한은 딱딱하게 굳은 검은 빵에 아까 기름을 짜내고 나온 바삭바삭한 알갱이를 얹었다.
학생들 숫자가 제법 되는 만큼 고기로만 배를 채우게 해서 좋을 게 없었다.
이럴 때 좋은 게 식사로 나오는 빵이었다.
학생들 중에 이 배급되는 빵을 그대로 먹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떻게든 맛에 변화를 주려고 하거나 혹은 화폐로 쓰곤 했다.
당연히 물물거래에 적극적인 이한은 이런 빵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었다.
‘슬쩍 끼워넣어서 배를 부르게 만드는 거다.’
그런 사악한 속셈도 모르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빵과 고기에 기뻐했다.
“워다나즈. 정말 좋은 일을 했군요.”
잉걸델 교수는 자기가 다 뿌듯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우승한 학생한테 선물로 줬는데 이렇게 다른 친구들한테 베풀어주다니.
이한은 사악한 속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교수님. 다 같은 친구인데요.”
“......”
지젤은 속으로 경악했다.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할 수 있다니.
더르규 같은 놈들은 속아도 지젤은 속지 않았다. 워다나즈는 지젤과 같은 부류였던 것이다.
저딴 말을 절대 진심으로 할 리가...
“워다나즈...!”
“흐, 흥. 연기를 쐬서 눈물이 나오는 거다. 절대 네 말에 감동받은 게 아니다.”
‘...이 멍청한 새끼들 진짜.’
지젤은 씹던 고기가 목에서 얹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얻어맞았는데 고기 좀 먹었다고 벌써 다 풀린 얼굴이라니.
같은 탑 친구들이라지만 이럴 때면 정말 한 대 치고 싶었다.
“이건 내가 대접하는 겁니다.”
잉걸델 교수가 신선한 우유가 든 항아리를 들고 왔다.
이한은 그 항아리가 우레걸음 교수의 오두막에서 본 항아리와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아니겠지.’
다들 불을 쬐며 먹고 마셨다.
심지어 이한도 긴장이 조금 풀렸을 때쯤, 뒤에서 유령처럼 볼라디 교수가 나타났다.
“강의 끝났습니까.”
“예. 끝났습니다. 배그렉 교수.”
“데리고 가도?”
“그러셔도 됩니다.”
이한은 순간 배신감 가득한 시선을 잉걸델 교수한테 보냈다.
그 시선에 잉걸델 교수는 살짝 당황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어... 배그렉 교수님. 이한이 어디로 가는 겁니까?”
“본관 상층부.”
“왜요?”
“추위 해결을 위해.”
“...!”
그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워다나즈가 이 혹한의 추위를 직접 해결하려고 나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게 정말일 줄이야.
교수와 같이 갈 정도라면 보통 각오가 아닌 모양이었다.
“워다나즈...!”
“넌 정말...”
‘아까 눈뭉치를 조금 더 세게 던질 거 그랬군.’
경외의 시선을 던지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렇게 짜증날 수가 없었다.
“좋다! 워다나즈. 우리도 같이 가주겠다!”
앙라고가 결심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한도, 지젤도, 볼라디 교수도 이해가지 않는다는 시선을 던졌다.
‘미쳤나?’
‘정신 나갔나?’
‘?’
그러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배부르게 먹고 소화시키느라 머리로 피가 덜 갔는지 다들 동의했다.
“좋아! 우리도!”
“함께하겠습니다. 배그렉 교수님!”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볼라디 교수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뜨거운 외침에 성의 있게 대답해줬다.
“떨거지들은...”
“교수님. 먼 길 오시느라 추우셨을 텐데 따뜻한 커피 한 잔 하시죠!”
이한은 재빨리 볼라디 교수의 팔을 잡아끌고 모닥불로 데리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