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솔직히 ‘떨거지들은’ 뒤에 올 말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걸 들어봤자 분위기만 싸늘해질 테니까.
이한은 찌그러진 주석 잔에 따끈한 커피를 따라서 볼라디 교수 손에 쥐어줬다.
“맛있군.”
“감사합니다.”
커피를 홀짝이는 볼라디 교수를 보니, 이한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니. 생각해보니 내가 말릴 필요가 없었잖아?’
볼라디 교수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 떨거지 취급하든 말든 이한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교수가 사고를 치면 자신도 모르게 먼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는 본능 때문이었다.
“워다나즈. 이제 출발하나?”
“정말 같이 올 생각이냐? 위험할 텐데?”
“훗. 기사에게 위험은 마땅히 주어져야 할 미덕일 뿐.”
‘개소리하고 있군.’
이한은 눈뭉치를 더 세게 던졌어야 했나 생각하다가 말았다.
하긴 자기들이 사서 고생하겠다는데 이한이 뭐라고 말리겠는가.
이한이 굳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자. 그러면 가자!”
“모라디. 왜 검 안 챙겨?”
“????”
빵 사이에 구운 비계를 끼워서 먹고 있던 지젤은 멈칫했다.
뭐?
“무슨 소리지?”
“다 같이 상층 가기로 했잖아.”
지젤은 경악했다.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헛소리하는 걸 내버려뒀더니 화살이 자신한테까지 날아온 것이다.
“내가 왜...”
“모라디가 겁먹은 거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모라디가 너 같은 사람으로 보여? 위험한 곳 가는 만큼 모라디가 우릴 이끌어줘야 한다고. 괜히 화나게 만들지 마.”
“......”
지젤은 아까 앙라고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 주둥이를 닥치지 못하게 만든 걸 후회했다.
그 때 닥치게 했어야 했는데!
이한은 볼라디 교수와 같이 앞으로 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 잘못 아니다.”
“닥쳐...”
* * *
코홀티는 디레트의 눈치를 보며 쿠만다스와 속삭였다.
“그래서 그 신입생은 언제 올 거 같은데?”
“일단 지금 친해지려고 하고 있긴 한데...”
“그렇게 느려서는 안 돼! 지금 디레트 안 보여!?”
까마귀 수인족에 대해 잘 몰라도, 깃털이 거꾸로 솟아 있으면 누가 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디레트가 바로 그랬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로 매일 찾아와서 복도 순찰을 돌아야 하는 상황!
이쯤이면 같은 학년 친구여도 살인사건이 날 수 있었다.
“안 되겠다. 내가 가서 다시 한 번 쪽지를 보내볼게.”
“위험하지 않겠어? 교장 선생님이...”
“지금 징벌방 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다는 거 몰라?”
“그, 그건 그렇지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차원 사고가 난 반대 방향이었다.
코홀티는 혹시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
그렇게 데리고 오려던 워다나즈 가문의 신입생이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신입생이다!”
“뭐?! 정말로!?”
“말했잖아! 진심은 통한다ㄱ... 잠깐.”
기뻐하던 둘은 멈칫했다.
어라?
처음에는 워다나즈 가문의 신입생만 보고 기뻐했었는데, 그 뒤로...
“......”
“????”
교수는 물론이고 다른 신입생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보다 저 사람... 배그렉 교수 아닌가?’
마법학교의 교수들은 해골 교장도 그 숫자를 정확히 모른다는 농담이 있었다.
하물며 학생들은 더더욱 그랬다.
자신의 전공과 상관이 없는 교수라면 졸업 때까지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하는 일도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학생들은 4학년. 아는 교수들의 숫자가 제법 됐다.
게다가 배그렉 교수는...
‘무제 교수잖아.’
무제(無弟) 교수.
제자가 없는 교수라는 뜻으로, 이상한 교수밖에 없는 에인로가드에서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교수들이었다.
생각해보라.
‘대체 어떤 미친놈이 저 교수 밑에서 배우는 걸까’싶은 교수도 제자가 몇 명은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인기 없는 흑마법도 배우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제자가 없다는 건...
...정말, 아주, 매우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볼라디 교수를 알아본 4학년 학생들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4학년이 됐어도 볼라디 교수 같은 사람은 여전히 두려웠다.
‘저번에 3학년 한 명이 들으려고 했다가 마력 탈진 와서 쓰러졌다고 했었지?’
‘대체 무슨 강의를 하길래...’
“안,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4학년 학생들은 공포를 삼키고 인사를 했다.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자들인가?”
“예.”
“알겠다.”
볼라디 교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당연히 4학년 학생들은 황당해했다.
“???”
“교수님. 제가 설명하게 해주십시오.”
보이지 않는 선배들과 이야기하는 볼라디 교수의 모습에, 이한은 한숨을 참고 말했다.
사실 방금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일방적인 통보였지!
볼라디 교수가 선배들에게 걸린 해골 교장의 마법을 일시적으로 풀자, 4학년 학생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뒤에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깜짝 놀랐지만 이한은 무덤덤했다.
이제 와서 이런 걸로 놀라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던 것이다.
“선배님들.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 그래.”
이한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볼라디 교수가 이 추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 1학년들도 같이 하기 위해 왔다.
“!”
설명을 들은 쿠만다스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흔들렸다.
‘우리가 보낸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거구나!’
하도 모르는 척 무시하길래 뜻이 전달 안 됐나 싶었는데, 이 후배는 이미 눈치를 챘었던 것이다.
아마 해골 교장의 서슬 퍼런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모르는 척했던 게 분명했다.
“후배. 고맙다! 난 네가 우리 제안에 응할 줄 알고 있었다!”
“예?”
“...우리 제안이라니?”
옆에서 듣고 있던 디레트가 정색하며 물었다.
이 자식들이 설마...?
“아, 아니. 별 거 아니야.”
“너희 설마...”
“아니라니까? 우린 접촉 안 했어! 진짜야!”
디레트는 저주로 쿠만다스를 마비시키고 이한에게 물었다.
“이 자식들이 접촉 안 했어? 정말로?”
“예. 안 했습니다만.”
디레트는 이한의 눈동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거짓말의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였나 보네.’
디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치고 다른 4학년 학생들의 태도가 유독 수상쩍었던 것이다.
그냥 괜히 찔려한 건가?
‘후배... 고맙다...! 이 은혜는 나중에 꼭 보답하마!’
마비된 쿠만다스는 눈빛으로 이한에게 감사를 보냈다.
와준 것도 고마운데, 디레트의 살기를 눈치 채고 거짓말까지 해주다니.
정말 기특한 후배였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군.’
물론 영문을 모르는 이한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4학년들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다들 학교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어, 어쨌든 진행시켜볼게. 자. 후배. 이 유물이 뭔지 알아?”
쿠만다스는 거대한 작살처럼 생긴 고대의 유물을 꺼냈다.
지금 4학년 학생들은 이 뒤틀린 차원의 복도 공간 곳곳에 구멍을 내서 마력을 밖으로 누출시키고 있었다.
안에 차원이 몇 겹 겹쳐져 있든, 공간이 어떻게 뒤틀려 있든, 뭐가 소환되어 있든 간에 영역 자체의 마력이 줄어들면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이대로 마력이 전부 다 소진되면 뒤틀린 차원도 사라지고 복도도 원래대로 돌아올 터.
...문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이 유물은 공간 관통의 마법이 내장된 아주 비싼 고대 유물이지.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긴 하지만 한 번 작동하면...”
“본론만 말해.”
“...하여간 이걸로 복도의 공간들을 관통시켜서 누출량을 늘리는 거다.”
쿠만다스는 디레트의 눈치를 보며 말을 끝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4학년 학생들답게 설명에 능숙하고 방법도 합리적이었다.
사실, 4학년 학생들이 교수들보다 설명 잘 하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군.’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
쿠만다스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리 마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신입생 입장에서 저 정도의 고대 유물을 작동시킨다는 건 어마어마한 각오가 필요했다.
자신의 마력을 밑바닥까지 쥐어짜낼 각오.
자기가 저지른 사고도 아닌데 이렇게 책임감 있게 나서다니.
‘훌륭한 신입생이 들어왔구나...’
디레트는 한심해 죽겠다는 듯이 쿠만다스를 노려보았다. 교수나 신입생들만 없었다면 험한 욕이 몇 개는 나왔을 눈빛이었다.
쿠만다스는 그 시선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면 시작할까?”
“잠깐.”
“예?”
볼라디 교수가 입을 열자 쿠만다스는 당황했다.
‘혹시 계산에 틀린 게 있나?’
“그 방식대로 하면 안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사라지겠군.”
“예... 그렇죠? 마력이 흩어지면 차원 유지가 안 되니까?”
“그렇다면 허락할 수 없다.”
“......”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가자.”
볼라디 교수가 뒤틀린 차원의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한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 뒤를 쫓았다.
쿠만다스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 내, 내가 뭘 잘못 한 건가?”
“당연하지. 멍청한 자식아. 교수님 앞에서 1학년 학생 마력 빌려서 유물 작동시키겠다고 했는데 어떤 교수님이 그걸 허락해? 따라오기나 해.”
디레트는 친구들을 구박하며 지팡이를 들었다. 친구들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뒤를 쫓았다.
* * *
볼라디 교수는 실전을 추구했지만 그렇다고 안전 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뒤틀린 차원의 싸움에 대비해 각종 강화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쟤네들한테도 걸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지?”
(떨거지들한테)왜(걸어줘야하)지라고 들렸지만, 이한은 침착하게 이유를 댔다.
“...강화 마법이 없으면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도망치느라 싸움을 방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
볼라디 교수는 강화 마법을 시전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차오르는 힘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후배. 걱정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옆에 선 4학년 학생들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마법학교에서 선배의 든든함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볼라디 교수가 이한을 보며 물었다.
“<부유하는 냉기 방패> 마법은 익혀 왔나?”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투사체에 주의해라.”
“?????”
4학년 학생들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부유하는 냉기 방패> 마법이라고 했나?
...그거 4서클 마법 아니야?
“방금 뭐라고 했...”
쿠만다스는 방금 대화가 무슨 의미였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앞에서 몬스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흐릿한 안개 같은 형체를 가지고서 움직일 때마다 진눈깨비를 뿌리는, 거대한 덩치의 겨울 망령이었다.
“마력을 얼마나 처먹였길래 겨울 망령 덩치가 저렇게까지 커진 거야?”
디레트의 중얼거림에 4학년 학생들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처리할게.”
“당연히 우리가 처리해야지. 그걸 뭐라도 하는 것마냥 비장하게 말하지 마.”
디레트는 지팡이를 들었다. 4학년 학생들도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나 마법을 준비하기도 전에 겨울 망령 위로 무수히 많은 숫자의 작은 화염들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
“????!”
후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