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훌륭하군.
명예로운 왕관에 흠집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서리거인 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만큼 도전자가 보여준 모습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왕관의 방어를 뚫나 했는데, 물 원소의 심화 응용 속성인 증발을 사용할 줄이야.
증발은 물 원소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마법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나올 만큼 까다로운 속성이었다.
설령 충분한 이해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력 소모가 극심한 만큼 사용에 제약이 컸다.
이해도는 물론이고 극심한 마력 소모까지.
뛰어난 마법사라 하더라도 쉬이 쓰기 어려운 속성인데, 어린 마법사한테서 보게 될 줄이야.
냉기 원소를 제법 잘 조종하더구나. 자존심을 접고 선택한 그 판단이 그대를 성장시켰으리라 믿는다.
증발뿐만 아니라 냉기 원소의 조종도 칭찬할 만했다.
마법사들 중에서 굳이 원소 조종을 갈고 닦는 사람은 드물었다.
괜히 얼음 조각을 이리저리 불규칙하게 움직이면서 상대를 공격하기보다는, 더 강한 고위 마법을 익히는 게 마법사로서 일반적인 것이다.
하물며 냉기 원소는 물 원소나 흙 원소처럼 유지나 조종이 쉬운 원소도 아니었다.
아무리 주변 환경에 냉기가 가득했다지만 수십 개가 넘는 조각을 동시에 조종한 건 온전히 마법사의 능력이었다.
‘......’
이한은 그냥 조용히 듣기로 마음먹었다.
딱히 자존심 때문에 화염 마법만 쓴 건 아니었지만, 굳이 그걸 말해서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 명예로운 도전자를 위한 증표를 남긴다.
서리거인 왕의 선언과 함께 이한의 지팡이 끝에 푸른색으로 빛나는 돌이 박혔다. 강렬한 냉기가 응축된 돌이었다.
눈이 녹고 봄이 찾아오면 냉기를 다루기 어려울 터. 마법사를 위해 냉기를 남겨놓았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반색했다.
물론 서리거인의 왕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지금 눈앞의 마법사가 자신이 선사한 냉기로 화염 마법을 연습하려고 한다는 것을!
‘추위가 끝나면 화염 마법이 다시 어려워질 텐데, 냉기를 불러올 수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된다.’
당연히 제한이 걸려 있겠지만, 며칠에 한 번이라도 냉기를 불러 올 수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냉기는 원소 중 가장 위대한 원소...
‘으음.’
서리거인 왕의 말에 이한은 머뭇거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마법사들도 그렇고 정령도 그렇고 자기가 다루는 원소가 무조건 최고라고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한은 입을 다물었다. 선물도 받았으니 저 정도는 참고 들어주는 게 예의였다.
...다루는 방법을 깨닫는다면 도전자의 적수는 없으리라. 그러면 언젠가 다시 만나 도전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다. 명예로운 도전자여.
“감사합니다. 전하.”
서리거인의 왕은 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위엄 있는 모습으로 뒤돌아서 떠났다.
차원 너머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에 이한은 존경심과 감사 어린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다시 만나지는 맙시다.’
감사한 건 감사한 거였고, 이한은 다시 만나서 도전할 생각이 없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느라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볼라디 교수는 장벽을 풀고 이한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4학년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정말 미친 사람 같았지만(사실 지금도 미친 사람 같긴 했다)...
그래도 저렇게 고생한 1학년 신입생을 칭찬해주는 걸 보니 교수의 마음에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칭찬해주지 않았다면 4학년 학생들이 더 분노했을 것 같았다.
“화염마법을 고집하지 않았으면 더 빨리 해냈을 거다.”
“......”
“......”
4학년 선배들은 경악했다.
지금 그들이 제대로 들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뭐라고?
‘너무한 거 아니야 정말??’
1학년이 서리거인 왕 상대로 도전에 성공했으면 해골 교장도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을 해줬을 텐데...
“제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신입생은 분노하는 대신 순순히 실수를 인정했다.
그 모습에 4학년 선배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이 내가 선배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다니!’
‘나는 대체 이 마법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신입생이 미친 교수한테 저렇게 시달리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니.
무력함과 분통함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화염이 아니라 냉기로 접근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 떠다니는 냉기 방패를 완성했다면.”
4학년 학생들이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두 사제(師弟)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담담히 방금 있었던 싸움을 복기할 뿐.
‘그렇군. 떠다니는 냉기 방패를 원하셨던 건가.’
이한은 딱히 열 받지 않았다.
사실, 볼라디 교수 성격에 이 정도면 엄청나게 칭찬이었다. 무려 ‘잘했다’로 시작했으니까.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교수 같았지만...
‘떠다니는 냉기 방패를 사용해서 상대 공격을 막아 시간을 벌고, 냉기 조각 물량전으로 가란 소리셨군.’
싸움이 끝나고 나니 볼라디 교수의 생각이 좀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볼라디 교수도 나름 기대하는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떠다니는 냉기 방패로 시간을 벌고, 주변의 막대한 냉기를 이용한 물량전으로 돌입한다면 왕관의 방어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4서클 마법을 일주일 만에 익혀 오리라 기대한 부분은 넘어가고...
“왕관의 방어에는 허점이 있었다. 전방위에서 연속공격을 퍼붓거나, 회전 속성을 추가해서 관통을 시도할 수 있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이한은 머릿속에 담아뒀다.
호오와 별개로 나중에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볼라디 교수의 가르침을 확실히 기억해두는 게 좋았으니까.
“...지금 회전이라고 하셨...”
“황제 폐하께 고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어려운 냉기 원소에 회전까지 추가시키라는 말을 들은 4학년 학생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그래도 증발은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볼라디 교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혹한의 추위가 끝나고,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 복도의 어둠속으로 교수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사악한 괴물이 사라지자마자 4학년 학생들이 이한에게 달려들었다.
“...괜찮아!?”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만.”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갑자기 4학년 선배들이 뭘 잘못 먹은 것마냥 달려든 것이다.
“아까 서리거인 왕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많이 구르긴 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걱정했지만... 방금 교수님하고 대화! 정말 괜찮은 거냐?”
쿠만다스는 이한의 몸보다 마음을 걱정했다.
만약 쿠만다스가 1학년 때 교수한테 끌려 나와서 강제로 서리거인 왕한테 도전하게 됐는데, 성공하고 나서도 저런 말을 듣는다면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을 것 같았다.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모자랄 판에...
“칭찬이었습니다만?”
“...방금 그게?”
“후배. 혹시 칭찬이 뭔지 모르는...”
“칭찬이었습니다. 다들 오해하신 모양이군요.”
이한은 사소한 오해가 있었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4학년 학생들은 오늘 느낀 감정 중 가장 놀랐다.
‘이... 이 녀석...’
‘얼마나 터프한 거야...?’
이제 보니 이 신입생의 진정한 재능은 마력량도, 마법 이해력도, 마력 통제력도 아니었다.
이 신입생의 진정한 재능은 바로 견고한 정신이었다.
마법학교의 교수들이 뭔 개짓거리를 해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정신!
“...후배. 널 존경한다.”
“후배. 널 존경해.”
“후배. ...쓰러지지 마라.”
“????”
4학년 학생들은 이한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뭐지?
“이한.”
“더르규.”
더르규가 다가오자 이한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얼굴만 봐도 걱정이 가득하다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지젤이 있었다.
지젤이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오자 이한은 멈칫했다. 또 뭔 시비를 걸려고 하나 싶었던 것이다.
“돌아가서 부상 없나 제대로 확인하라고.”
하지만 지젤은 시비를 거는 대신 걱정 비슷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
이한은 경악했다.
진짜 뭐지?
“워다나즈. ...조심해라.”
“워다나즈. 그 강의는... 아니다. 돌아가서 다치지 않았는지 꼭 확인해.”
지젤만 그런 게 아니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에게 걱정 비슷한 말을 한 마디씩 남기고 돌아섰다.
이한은 더르규에게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
“그게... 음...”
더르규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이한과 반쯤 원수 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보기에도, 볼라디 교수의 강의는 너무 지독했던 것이다.
-저, 저러다가 워다나즈 죽는 거 아니냐?
-저래도 되나? 아무리 워다나즈라지만...
-저건 너무한 거 아닌가?
오죽하면 도전 중반부터는 이한을 걱정하고 응원할 정도로!
더르규는 차마 ‘네가 모두의 걱정을 받을 정도로 심하게 구르더라’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이한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었다.
“네... 네 도전이 기사 가문 출신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심금을 울린 것 아닐까?”
“더르규.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
더르규는 입을 삐죽거렸다.
* * *
축하한다. 언제 해결하나 했더니.
뒤틀린 차원의 복도를 빠져나오자 해골 교장이 둥둥 떠서 학생들을 맞이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교장 선생님. 저희가 했습니다.”
잘했다.
그러나 4학년 학생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해골 교장의 시선도 4학년 학생들을 향해 꽂혀 있었다.
너희들은 당연히 못했고. 한심한 놈들아.
“교장 선생님! 디레트는 잘못이 없습니다. 저희 때문에...”
쿠만다스는 필사적으로 변호했다.
안 그래도 열 받아 있는 디레트인데...
쿠만다스는 징벌방에서 나오기 전에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무슨 무쇠대가리 같은 천진난만한 소리를 하는 거냐? 친구 잘못 둔 게 잘못이지.
“......”
쿠만다스는 방금 볼라디 교수를 보고 ‘해골 교장보다 심한 거 아닌가?’하고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해골 교장이 더 심했다.
자. 그러면 징벌방을...
“교장 선생님!”
왜?
해골 교장은 투덜거리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네게 할 말 있었다. 나중에 말해라.
“그게 아니라... 저희가 이 문제를 해결한 것 아닙니까?”
그래. 잘했다. 됐지?
“아뇨. 보통 포상을 받잖습니까.”
...설마.
해골 교장은 불길함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 마라. 나 그런 거 싫어한다.
“선배님들을...”
그러지 마라. 나 구역질 한다.
“징벌방에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맞, 맞습니다!”
“선배님들을 용서해주세요!”
이한이야 ‘외출권 하나 아껴서 선배들한테 빚 만드는 게 이득이다’싶어서 한 말이었지만, 단순무식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바로 분위기에 넘어왔다.
그 뜨거운 호응에 해골 교장은 괴로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출권 받아라. 그냥. 내가 아무 함정도 파지 않을 테니까.
“그냥 선배님들을 용서해주시는게...”
해골 교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학교의 가장 어두운 지하까지 닿을 법한 깊은 한숨이었다.
...내 앞에서 꺼져라. 이 도금덩어리들아.
“감... 감사합니다!”
4학년 선배들은 이한에게 제대로 된 감사를 전할 틈도 없었다.
눈빛으로 진한 감사를 보내고 서둘러 달아났다.
해골 교장은 그 뒷모습을 진한 아쉬움을 담아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내 기쁨이지. 이제 몇 시간 후면 주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넌 나하고 같이 외출한다. 워다나즈.
“......”
이한은 서리거인 왕의 왕관보다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앙라고는 눈치 없이 감탄했다.
교장 선생님하고 주말에 같이 외출하다니.
워다나즈가 교장 선생님에게 직접 마법을 전수받고 있다는 소문이 정말이었던 것이다!
“우, 우와! 교장 선생님하고 같이...!”
이한은 앙라고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노려보지도 않은 눈빛이었지만, 앙라고는 자신의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아 ‘흡’하고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