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클빅이 이한을 동정하고 적당히 제압하려는 것과 달리, 이한은 100% 진심이었다.
사실 고위 환상 마법사 상대로 신입생이 진심을 내지 않으면 그게 미친놈이었다.
결투가 시작되기 전 최대한 걸어 놓은 강화 마법.
그 강화 마법이 단련된 이한의 신체 능력을 한층 더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빠르게 달리는 제자의 모습에 해골 교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결투 전에 저렇게 마법을 미리 걸어 놓는 게 반칙은 아니었다.
하물며 이한은 신입생이고 상대는 나름 이름이 알려진 마법사.
저런 것 가지고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조금 체면이 없어 보이고 궁색해보여서 그렇지.
해골 교장이 보기에는 좀 한심해보였다.
그냥 싸워도 이길 텐데 참...
‘품위가 없군.’
이한은 해골 교장이 저런 재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치도 못한 채 내달렸다.
‘가까이 붙어야 한다!’
해골 교장이 ‘눈 감고 싸워도 이긴다’하고 확신을 가진 것과 달리, 이한은 당연히 확신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상대 마법을 한 대라도 맞으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몇 번 마법이나 독 같은 것에 저항력을 보여주긴 했었지만 그게 100% 확실한 보장은 아니지 않은가.
상대의 실력이 실력인 만큼 이제까지와 달리 한 번에 이한을 쓰러뜨릴 수도 있었다.
그런 마법사와 맞붙을 때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은?
최대한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가까이 붙는 것이었다.
탁!
이한은 소매 속에서 쇠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는 클빅에게 던졌다.
이미 이한의 움직임으로 한 번 놀란 클빅은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쇠 구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간단한 투사체 정도는 가볍게 막아낼 실력이 있었지만...
...쇠 구슬은 클빅의 예상보다 빠르게 날아들었던 것이다.
“큭!”
클빅은 외우고 있던 주문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쇠 구슬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리를 좁힌 이한은 바로 클빅의 멱살을 잡고 넘어뜨렸다.
쾅!
그리고 팔을 뒤로 꺾어 제압했다. 클빅의 지팡이가 저 옆으로 날아갔다.
“졌... 졌네!”
클빅의 패배 선언에 환상 마법사들은 깜짝 놀랐다.
저 신입생의 움직임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고작 1학년 학생이 저렇게 기민하고 빠르게 움직일 줄이야!
“고나달테스 각하께서 노린 게 저거였군...!”
“제기랄. 우리의 허점을 노리셨어. 기사 가문의 학생을 데려오실 줄이야.”
“과연. 저런 식의 공격은 미리 알지 못했다면 바로 대응하기 쉽지 않지. 그걸 노린 건가.”
만약 1학년 학생한테 똑같은 마법으로 맞붙어서 패배했다면 그 충격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허점을 찔려서 패배하자 조금 다른 반응이 나왔다.
-아, 저 소년은 어린 나이에 참 기특하구나!
‘아니야 머저리들아...!’
환상 마법사들의 수군거림에 해골 교장은 기가 막혔다.
저런 깜짝 속임수 같은 걸로 이기려고 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1학년 앞에서 환상 마법이 무참히 무시당하는 걸 보여주려고 왔는데...
안 되겠다. 근접전 금지다.
“예!?”
이한은 경악했다.
근접전을 금지하라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안 너무하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제가 지는 걸 원하시면 그냥 솔직히 말하셔도 됩니다만.”
아니라니까!?
데리고 온 제자가 툴툴대자 해골 교장은 두 배로 기가 막혔다.
이 못난 제자 놈은 아직도 자기 능력에 확신이 없었다.
그냥 몸으로만 막아도 되는데!
“예. 그러시겠죠.”
......
해골 교장이 노려보든 말든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근접전을 금지하면...
‘정말 힘들어지는데.’
환상 마법은 저주처럼 시전 속도가 빠르고 피하기 힘든 편이었다.
관련 방어 마법을 익혀뒀다면 막는 난이도는 대폭 내려가지만, 이한은 아직 1학년. 그런 방어 마법까지 익히지는 못했다.
이한이 아무리 빠르게 마법을 시전하고 공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마법에 한 번이라도 맞는다면...
“고나달테스 각하.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1학년 학생에게 근접전을 허락해주십시오!”
오히려 이한을 도와준 건 환상 마법사들이었다.
환상 마법사들은 1학년 학생을 핍박하고 그들을 무시하는 고나달테스의 모습에 발끈해서 나섰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패배했어도 그렇지, 1학년 학생한테 저런 페널티까지 줘서 이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
이한은 살짝 감동한 시선을 던졌다.
오고닌이 실력이 좀 부족해도 인망이 좋은 것처럼, 그 밑의 마법사들도 성격이 좋은 게 분명했다.
물론 해골 교장 입장에서는 환장할 일이었다.
지금 누가 누굴 동정하는... 근접전을 금지해도 너희들은 못 이긴다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금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의 긍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해골 교장은 환상 마법사의 주둥이를 마법으로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이한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다시 뛰쳐나가서 근접전을 시도할 표정이었다.
“나는 도이바흐. 잘 부탁하네. 물론 근접전을 시도해도 상관없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새로 나온 도이바흐란 마법사의 태도는 정중했고 시선에는 존중이 담겨 있었다.
기습이고 운이 따라줬다지만 어쨌든 클빅을 꺾은 것 아닌가.
1학년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도이바흐는 다짐했다.
‘환상 마법을 수련한 마법사로서, 그리고 오고닌 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저 1학년 학생의 특기와 정면으로 부딪쳐서 정정당당히 승리하겠다!’
환장하겠군 진짜...
해골 교장이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 * *
“아깝다!”
“대단하군!”
“저 정도일 줄이야...!”
이한은 그 뒤로도 세 명을 더 꺾었다.
도이바흐는 가장 시전 속도가 짧은 환상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지만, 이한이 빠르게 접근하면서 <뼈 구속구 소환>으로 집중을 방해하자 아슬아슬하게 늦어버렸다.
젤켄브는 전사를 상대하는 요령으로 주변에 환상 마법으로 된 미궁을 펼치고 접근을 막으려고 했지만 역시 반 발짝 늦어버렸다.
봉본도...
너희 환상 마법사들은 결투 연습을 얼마나 안 하길래 시전 속도가 이렇게 느린 거냐!?
설마 한 명 정도는 이한이 접근하기 전에 걸겠지 싶었던 해골 교장은 폭발했다.
물론 결투가 마법사의 필수 소양은 아니었고, 볼라디 교수나 해골 교장처럼 마법 전투를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마법사가 더 적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맞는 말씀입니다. 고나달테스 각하.”
“부끄럽습니다. 1학년 학생한테 이렇게 질 줄이야.”
“자네의 실력을 존중하네. 정말 뛰어난 실력이야. 기사 가문 출신이라고 기죽지 말게. 마법을 대성하는 건 가문과 상관없으니까.”
“예? 잠...”
“자네 정도면 제국 결투계에서도 곧 두각을 드러내겠지. 기대하고 있겠네.”
환상 마법사들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쉬운 패배였지만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뻔뻔하진 않았다.
심지어 상대는 1학년 학생 아닌가.
어떻게 졌든 간에, 상대의 실력을 존중하고 찬사를 보내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보다 시전 속도가 빠른 마법사들도 많이 만나겠지만, 계속해서 그 속도를 갈고 닦는다면 자네의 적수는 찾기 힘들 것이야.”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1학년을 순순히 칭찬하는 훈훈한 광경.
서로 다른 마법사들이 만났을 때 가장 이상적인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클빅은 어쩌면 고나달테스가 이걸 노리고 1학년 제자를 데리고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 환상 마법사들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저런 특기를 가진 1학년 제자를...
하찮은 머저리 놈들...
...아닌가?
됐다. 오고닌. 따로 대면하자. 흥이 다 깨어 버렸군.
해골 교장의 말에 오고닌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고닌이 봐도 방금 결투가 너무 이상하게 흘러가긴 했던 것이다.
* * *
이 못난 제자한테 제대로 설명 좀 해주도록. 내가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음... 그러니까. 자네는 대마력이 상당히 강하네.”
상당히?
“...매우 강하네.”
매우?
“...그냥 당신이 말하시는 게 어떻소?”
지금 축제방해자, 폭죽파괴자, 유물절도자가 나한테 명령하는 건가? 참 나.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오고닌은 더럽고 치사해도 참았다.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마력이란 게 여러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특히 순수한 마력을 정신에 직접 작용시키는 환상 마법 같은 경우에는 대마력의 영향을 유독 강하게 받는 편이지.”
오고닌의 자세한 설명에 이한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번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특히 직접 거는 환상 마법은 정말 어지간해서는 잘 통하지 않을 걸세.”
“아하. 그러면 교장 선생님께서 그냥 맞아도 된다고 하신 게 과장이 아니었군요.”
나 옆에 있다.
“그...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한은 오고닌의 보장에 흥미로워했다.
해골 교장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을 줄이야.
‘날 괴롭히려는 수작이 아니었군.’
물론 해골 교장의 말을 믿었다 하더라도 이한은 똑같이 싸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할 수 있는데 굳이?’
피할 수 있는데 뭐하러 맞는단 말인가. 0.0001%의 희박한 확률이라 하더라도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알려주셔서.”
그 책 꺼내봐라.
“예?”
오고닌이 쓴 책.
“......”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책을 꺼냈다.
서점에서 산, 오고닌이 젊은 시절에 쓴 책이었다.
그걸 보자 오고닌은 기가 막히다는 시선으로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정말 남 괴롭히는 데에는 여러모로 진심인 마법사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젊은 시절에 썼으니 미숙한 부분들이...”
“좋은 책 같습니다만.”
이한은 자신한테 묻는 줄 알고 대답했다.
오해는 풀렸지만 그렇다고 오고닌이 대마법사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솔직히 대마법사면 대마력도 뚫고 마법을 걸 것 아닌가.
그런 실력을 감안하면 이 책은 잘 쓴 책이 맞았다.
오고닌은 예상하지 못한 이한의 반응에 감사의 시선을 던졌다.
물론 해골 교장은 당연히 납득하지 않았다.
그게?! 내 책하고 비교해봐라. 다르게 보일 거다.
“그야 교장 선생님의 책이 더 훌륭한 건 사실입니다만... 책이란 게 각자 나름의 가치가 있는 거지 상대적으로 밀린다고 안 좋은 책은 아니잖습니까.”
해골 교장은 이한의 아부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방해에 화를 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반응이 늦었다.
“고맙네!”
오고닌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원래 수많은 마법사한테서 칭찬과 감사를 받아 온 오고닌이었다. 이제 와서 어린 마법사한테 칭찬을 듣는다고 새삼 감동하진 않았다.
하지만 미친 해골 교장 앞에서, 그 제자에게 칭찬을 듣는 건 오고닌의 무뎌진 심장도 뛰게 만들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괜찮다면 내가 좀 가르쳐줘도 되겠나?”
“!”
이한은 멈칫하고서 해골 교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뜻을 오해한 해골 교장은 툴툴대며 대답했다.
배우도록 해라. 오고닌 같은 마법사가 직접 가르쳐주는 기회는 흔치 않지. 좋은 기회다.
‘굳이 배워야 하냐는 뜻이었는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학교 안에는 키르민 쿠 교수가 있고 마법학교 밖에는 발도르오른 같은 마법사가 있는데 굳이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예의상 최선을 다해서 배워야겠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