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오해와는 달리, 이한은 록 드레이크를 잡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록 드레이크의 맷집을 알고 있는데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 없지 않은가.
‘놈을 유인해낸다.’
맞서 싸울 필요도 그냥 포기하고 도망칠 필요도 없었다.
유인해낸다.
마법사가 어딜 가든 고급 인력으로 뽑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유연한 대처 능력이었다.
다른 모험가들은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도망쳐야 했지만 마법사들은 제 3, 제 4의 선택지들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한은 이런 부분에서 특히 유리했다.
마법사들 중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폭넓은 분야를 공부하고 있었으니까.
‘놈을 자극한 다음 시선을 유도하면...’
더르규도 더르규지만 지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있는 곳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순순히 록 드레이크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확보한다!
“워, 워, 워다나즈. 하나만 약속해줘.”
“?”
“록 드레이크를 잡지 않겠다고.”
“......”
이한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안 잡는다니까...’
“그래. 약속하마.”
“...진, 진짜지?”
“물론.”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워낙 무표정한 조각 같은 얼굴이라 저런 말을 해도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진짜 진짜로...”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너부터 미끼로 삼아버리겠다.”
“!”
이한의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기겁해서 입을 다물었다.
농담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자식들 괜히 데려왔나...’
이한은 지금 다른 친구들은 뒤쪽 언덕에 둔 채 흰 호랑이 탑 학생들만 데리고 접근한 상태였다.
어차피 록 드레이크를 유인하는 데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았다. 숫자만 많아봤자 투명화 마법만 힘들어졌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데리고 온 건 몸이 날래고 재빨라서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하기 쉽다는 것과...
‘나 혼자 가면 아무리 더르규가 있어도 내 말을 안 듣겠지.’
만약의 경우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이한의 명령을 듣지 않는 놈들도 자기 친구들이 이한 옆에 있으면 눈물을 머금고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으리라.
사실상 반쯤 인질!
물론 이한 옆에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자기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긴장한 표정으로 록 드레이크를 응시할 뿐.
“그런데 물 구슬만으로 록 드레이크가 반응할까?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
“그래서 놈의 급소를 때렸지.”
“......”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속으로 울었다.
그냥 도발한 줄 알았는데 그들 모르는 사이에 급소까지 때렸다니...
쿵, 쿵, 쿵, 쿵-
록 드레이크는 언덕에서 시선을 떼고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 코를 때린 괘씸한 놈이 누군지 찾으려는 기색이었다.
‘부탁한다. 샤르칸.’
팍!
이한이 신호를 보내자 다른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샤르칸이 뛰쳐나왔다.
록 드레이크는 녹색 형체를 가진 표범의 등장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
샤르칸은 무리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훨씬 더 거대한 덩치와 단단한 방어력을 가진 몬스터에게 덤벼드는 대신 날카로운 소리로 도발했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록 드레이크는 성질을 내며 샤르칸을 쫓으려했다.
“뼈여. 적을 붙잡아라.”
이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흑마법 특유의 음에너지가 주변을 휘감고, 록 드레이크의 앞발에 뼈로 된 구속구가 소환됐다.
달그락!
사실,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거인의 손가락에 밧줄을 건다고 거인을 묶을 수는 없었으니까.
록 드레이크의 앞발에 뼈로 된 구속구를 소환해봤자 1초면 박살내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연사했다.
“뼈여, 적을 붙잡아라. 뼈여, 적을 붙잡아라. 뼈여...”
하나로 안 된다면 둘로.
둘로 안 된다면 셋으로.
순식간에 뼈 구속구들이 증식하더니 록 드레이크의 앞발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여전히 별 의미는 없었지만 록 드레이크의 성질은 제대로 긁은 게 분명했다.
물 구슬에 얻어맞고 웬 언데드 몬스터가 도발하는데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뼈 구속구까지.
-■■■... ■■■...
“열이여, 공기를 일그러뜨려라.”
그런 상황에서 마법사 비슷한 형체가 일렁거리자 록 드레이크는 제대로 폭발했다.
이제까지 보여준 굼뜬 모습은 사라지고, 단단한 지면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며 폭주에 가까운 돌진을 시작한 것이다.
콰드드드드득!
가까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지진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돌진이었다.
“갔... 갔나? 간 거지?”
“그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했다.
그래도 워다나즈가 약속을 지켜서 록 드레이크 사냥 같은 무모한 짓은 하지 않고 끝났다.
다행이다 정말!
“너희들은 언덕으로 올라가서 록 드레이크를 쫓았다고 전해. 위에서는 상황을 모르니 혼란스러울 거다.”
“그, 그렇겠군. 지금 갈게.”
“나는 다른 학생들을...”
말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쪽에서 록 드레이크 한 마리가 새로 나타난 것이다.
“......”
“......”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학생들의 머리는 모두 멈춰버렸다.
그러나 이한은 바로 행동에 나섰다.
“록 드레이크 쫓았다고 전해라. 난 저 놈을 따돌리고 올 테니까!”
“워...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한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터무니없이 무모하고, 사악한 마법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망설이지 않고 친구들을 구하러 가는 워다나즈의 모습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라!”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위로 가서 전하라고!”
“미, 미안.”
이한이 진짜로 정색하면서 화를 내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지는 없잖아...
* * *
친구들이 다른 언덕 쪽에 위장하고 있다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한은 샤르칸을 데리고 재빨리 달렸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젠장.’
“열이여, 공기를 일그러뜨려라!”
이한은 주변에 환상을 불러왔다. 어떻게든 록 드레이크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빛이여!”
거대한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그 강렬한 광량(光量)에 멀리 있던 록 드레이크도 깜짝 놀랐다.
‘됐다. 시선을...’
-크르릉.
샤르칸이 당황스러운 소리를 냈다.
눈앞에서 록 드레이크가 땅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
이한도 이런 낯선 모습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록 드레이크는 이길 수 있을 상대에게는 정면으로, 위협을 느낀 상대에게는 땅 속으로 들어가서 기회를 엿본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었구나!
‘빛 마법을 너무 강하게 걸었나!’
록 드레이크 입장에서는 빛의 구체가 너무 쓸데없이 강하고 휘황찬란해서 위협을 느낄 수 있었다.
샤르칸은 갑자기 미친듯이 땅을 두드리며 이한의 소매를 물고 잡아끌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릉! 크릉!
“!”
이한이 그 신호를 못 알아챌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이한은 바로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록 드레이크의 이동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콰드드드드득!
굉음과 함께 록 드레이크가 땅 아래에서 나타났다.
사방의 균형이 무너지고 파편과 흙먼지가 비산하자 이한은 다급히 주문을 외웠다.
“움직여라!”
쇠 구슬이 공중에 단단히 고정되어서 앵커 역할을 했다. 이한은 쇠 구슬을 손으로 잡고 온몸에 힘을 줬다.
‘균형을 잃으면 죽는다!’
얼마나 버텼을까.
순간 아래에서 땅이 단단하게 지탱해주듯이 올라왔다.
‘잠깐...’
그건 땅이 아니었다.
록 드레이크의 거대한 등판이었다.
“......”
이한은 자신이 어느새 록 드레이크의 등판 위에 올라와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지하에서 뛰쳐나온 록 드레이크를 잘못 피한 탓에 등 위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아니. 그나마 다행인가.’
처음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지만 이한은 곧바로 정신을 추슬렀다.
다행히 록 드레이크는 누군가 자기 위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수상쩍은 빛 덩어리 주변을 부숴서 기분도 풀렸는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까운 언덕 나오면 바로 뛰어내려야겠군.’
이한은 돌아가면 저속 낙하 마법부터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보니 익혀두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
-■■...
-■■ ■■■...
“......”
이한은 가까운 언덕을 찾아서 내리지 못했다.
하필이면 위에 올라탄 록 드레이크 놈이 아까 성질나서 달려간 록 드레이크와 마주친 것이다.
어쩐지 방향이 비슷하다 했더니...!
툭, 툭.
툭, 툭, 툭.
록 드레이크 두 마리는 서로 노려보았다. 먼저 양보하라는 기세가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놈도 양보하지 않았다.
“...잠ㄲ...”
꽝!!!!!
두 록 드레이크가 사납게 격돌했다.
미친듯이 뒤흔들리는 록 드레이크의 등판 위에서, 이한은 생각했다.
‘...앞으로 잉걸델 교수님이 검술 훈련 하기 좋은 장소를 고민하시면 록 드레이크의 등짝 위를 추천드려야겠군.’
* * *
“빨리! 이 자식들아! 너희들은 왜 이렇게 느린 건데!”
“헉, 헉... 저 자식들... 왜 저렇게... 체력이...”
합류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가차 없이 재촉했다.
상황 설명을 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 중에서 워다나즈를 구출하러 가자는 걸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 너희 푸른 용의 탑 녀석들은 여기서 쉬고 있어라.
-너희들은 둔해서 안 돼.
오히려 이렇게 반응할 정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훨씬 쌩쌩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물도 아껴가면서 주변을 탐색했고, 또 방금은 록 드레이크가 올라오는 걸 막기 위해 각종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나름 편하게 움직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덜 지쳤을 수밖에 없었다.
“모라디. 고맙다. 네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더르규의 말에 지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혹시 검술 강의 때 같이 조를 짜서 움직인 것 때문에 친해진... 아, 아니군. 미안하다.”
지젤이 사람 죽일듯이 노려보자 더르규는 입을 다물었다.
“워다나즈가 목숨 걸고 록 드레이크를 유인했는데 도와주러 가지 않으면 여기 얼간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가는 거야.”
“그렇군.”
“그러니까 제발 개소리 좀 하지 마. 초이. 알겠어? 학교 밖에 있을 때부터 너는 대체 왜...”
“......”
더르규는 후회했다.
‘괜히 말해가지고...’
신랄하게 더르규의 인격을 모욕한(멍청이, 호구, 얼간이, 길거리 거지한테 소매치기당할 등등) 지젤은 기분이 좀 풀렸는지 화제를 돌렸다.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어.”
“뭐가?”
“워다나즈가 왜 우릴 도와준 거지?”
“......”
더르규는 이한에게 아래로 내려가는 문의 위치를 알려줬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지젤의 욕이 서너 배로 사나워질 것 같았으니까.
“글... 글쎄. 워다나즈가 사실 차가워보여도 우정을 중요시하는...”
“내가 개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무슨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해. 아무 이유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다고.”
사람은 언제나 자기 기준으로 만사를 판단하기 마련이었다. 지젤도 당연히 그랬다.
속셈이 있지 않다면 도와줄 리가 없다!
지젤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워다나즈의 사악한 두뇌를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런 속셈 같은 건 없었다.
“저... 저기!! 저기 봐!!!”
“호들갑 좀 그만 떨라고 해. 물이 썩어나는 것도 아닌데 뭘 볼 때마다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면...”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지젤의 말이 멈췄다.
더르규도 경악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 보았다.
저 앞에 록 드레이크 두 마리가 쓰러져있었던 것이다.
“......”
“내, 내가 말했잖아. 워다나즈가 아까부터 록 드레이크를 잡고 싶어 했다니까!”
사방이 조용해진 와중에,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의 말만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