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오는 내내 이한 곁에 있었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꾸준히 가설을 내세웠다.
-내가 보기에 워다나즈는 휩쓸려서 끌려간 게 아니다, 워다나즈는 록 드레이크를 잡으러 쫓아간 거다.
물론 너무나도 과격하고 급진적인 가설이라 푸른 용의 탑에서 가이난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 새끼들 도와주러 가기 싫어서 수작부리는 거 아니야?
-아, 아니야!
“내가 뭐라고 했어! 내가 뭐라고 했냐고!”
“정... 정말 잡은 거야??”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믿기가 힘들어서 서로 쳐다만 보았다.
몇몇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워다나즈는 마법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남몰래 마법을 연구해 온갖 사악한 비전에 통달했대’같은 이상한 헛소문을 믿어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같이 지내는 만큼 그런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에 속지 않는 것이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냉정하고 영리했다.
이한이 듣는 강의마다 교수한테 ‘자네는 이 학파를 번영시킬 인재일세’같은 소리를 듣고, 또 본인도 ‘모든 마법 분야의 비의를 깨우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는 대단한 마법사의 재목이긴 했지만, 저 소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록 드레이크 사냥 같은 건 아무리 이한이 천재라고 해도 지금 할 수 있는 게...
“워, 워다나즈!”
이한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자 친구들은 비명을 질렀다.
록 드레이크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꼴이 크게 다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던 것이다.
이한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다친 곳 없다는 뜻이었다.
“록 드레이크를 잡은 거야?!”
“...뭐? 무슨 헛소리야?”
“아, 아니... 저기 쓰러져있어서...”
이한은 친구들을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자신들이 한없이 멍청해지는 기분을 받았다.
“둘이 싸워서 쓰러진 거지.”
“아... 그, 그렇구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아까 오면서 시끄럽게 떠든 흰 호랑이 탑 학생을 노려보았다.
‘저 자식 때문에!’
그러나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여전히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둘을 싸우게 만들었다고? 정신 계열 마법으로?!”
“무슨 일인데 그래? 워다나즈가 잡은 거 맞대?”
“록 드레이크 두 마리를 싸우게 만들었다는데?”
“역... 역시!”
“더르규를 정신 제압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이한이 조금만 덜 피곤했다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개소리를 수군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록 드레이크 두 마리가 서로 죽일 듯이 달려드는 상황에서 균형을 잡고 버텼던 것이다.
아무리 흘러넘치는 마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집중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록 드레이크를 해체해라. 덩치가 크니 먹기 좋은 부위만 잘라내도 충분하겠지.”
“알, 알겠어.”
“?”
푸른 용의 탑 학생들한테 말했는데 지나가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후다닥 달려가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상관없나.’
일단은 조금 쉬고 싶었다.
* * *
잠깐 눈을 붙인 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에서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배운 게 없지는 않다.’
이한이 가장 씁쓸한 건, 볼라디 교수의 ‘너는 아슬아슬한 위기에 던져놓으면 빠르게 배우는 편이니 계속 위기를 겪어야 한다’ 이론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아슬아슬한 위기에 빠질 때마다 무언가 배우고 깨닫곤 하니 자괴감이 들었다.
...정말 이게 마법사에게 맞는 방법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맞는 방법 같지는 않은데.’
지하에서 솟구쳐 나온 록 드레이크의 등 위에서 버티는 건 <하급 조종> 마법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록 드레이크 두 마리의 정면충돌에서 버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공중이 아닌 록 드레이크의 등판에 단단히 고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한은 궁여지책으로 록 드레이크의 비늘을 붙잡고 손끝에 마력을 방사했다. 강화 마법은 물론이고 추가적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지 않았다. 몸은 계속해서 날아갈 듯이 뒤흔들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한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퍼붓고, 퍼붓고, 퍼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마력이...?!
마법사들처럼 고도의 학문을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기사들도 마력을 이용해 상당히 다양한 기교를 펼쳤다.
이런 기술들은 기사 가문에 내려오는 비전에 해당되는 것이라 쉬이 유출되지 않고 기사 본인들도 어지간하면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한은 비교적 최근에 마력을 이용한 특이한 검술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백양목 기사단의 젊은 견습기사들이 찾아왔을 때.
그 때 엥게 가문의 라브다는 상당히 특이한 검술을 사용했었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 검에 흐르는 마력으로 상대의 검을 끌어당기는 기묘한 검술.
다른 학생들한테 물어보니 엥게 가문 특유의 흡검(吸劍)이라고 했다.
보기 드문 검술이라 기사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하다고.
...지금 이한도 얼떨결에 흡(吸)의 묘리를 깨달은 것 같았다.
탁-
이한은 손에 마력을 방사하며 바위에 붙였다.
그러자 끈끈한 인력이 손과 바위 사이에 느껴졌다.
“......”
‘이런 거 말고 마력 순환이나 익혀야 하는데.’
이 성질 변화로 록 드레이크의 등에 달라붙어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긴 했지만, 사실 이건 지금 이한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니었다.
검사로서 능숙하게 마력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어지는 육신 내의 마력 순환을 완성시켜야 하는데...
왜 새로운 검술을 만들 때나 고민할 이런 특이한 마력 성질 변화를 깨달았단 말인가?
‘잉걸델 교수님한테 말씀드리면 어이없어 하실지도 모르겠군.’
사실 이한은 착각하고 있었다.
잉걸델 교수라면 오히려 기뻐하면 기뻐했지 황당해하지는 않았다.
-훌륭합니다. 워다나즈. 뛰어난 검사들은 언제나 젊은 시절에 자신만의 검술이 가진 편린을 찾아내곤 했지요. 그렇게 검에 진지한 만큼, 검 또한 대답해준 겁니다. 이제 그 깨달음을 스스로의 검에 녹여보도록 합시다.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재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어떤 순간이었죠?
...같은 말을 하며 기뻐해 줄 터.
검술에 매우 진지한(적어도 잉걸델 교수의 생각으로는) 제자가 자신만의 검술로 가기 위한 깨달음을 얻은 것 아닌가.
“워다나즈. 좀 괜찮나?”
“아. 그래. 고맙다.”
이한은 바위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깨달음은 나중에 생각해 볼 일이고 지금은 눈앞의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좀 들지.”
“뭐지?”
“로스트 비프. 록 드레이크의 고기를 썼어.”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두툼하게 잘려서 구워진, 육즙 가득하고 촉촉한 선홍색의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그런데 록 드레이크의 고기면 비프가 아니지 않나?’
이한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접시를 받았다.
물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런 부분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이미 민들레와 도토리를 끓여서 커피를 만들어 먹고 있는데 드레이크 고기나 소고기나 뭔 차이겠는가.
“잘 먹겠다. 고맙...”
“감사할 건 없다. 워다나즈. 네가 잡은 건데.”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살짝 머쓱했는지 코밑을 쓱 훔쳤다.
새삼스럽지만 워다나즈한테 이렇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던전, 아니 도서관에 들어오기 전에 워다나즈에게 식사를 대접할 일이 생길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이건 정말...”
“됐다니까. 워다나즈. 감사할 것 없어.”
“아니. 퍽퍽하다고. 누가 요리했지?”
“......”
흰 호랑이 탑 학생은 황당하다는 듯이 워다나즈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맛있지... 않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한은 앞으로 걸어갔다.
옆을 보니 푸른 용의 탑 학생들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열심히 요리한 건 고마운데...
...뭔가 아쉬운 게 분명한 표정!
“이한!! 일어났구나!”
가이난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모든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속으로 생각했지만 양심상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뱉었다.
“네가 대신 요ㄹ... 읍읍.”
“제발 닥쳐...!”
“푸른 거지의 탑으로 불리고 싶냐!”
수치심이 발동한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가이난도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은 뒤였다.
“...워다나즈. 원한다면 네가 해도 좋아.”
고기 앞에 서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이 이한을 불렀다.
몇몇은 팔짱을 끼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눈빛이었다.
‘네가 아무리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야영의 꽃인 요리까지 능숙할 리가 없지 않느냐?’
‘나는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고기를 구워왔다. 워다나즈. 넌 몇 년을 구웠지?’
‘이 자식들 검술에도 이렇게 경쟁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기 앞에 섰다.
묘하게 뜨거운 눈빛이 어이없었다.
“다들 이한이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군.”
더르규가 옆에 있던 지젤에게 중얼거렸다.
검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던 지젤은 ‘안 궁금한데’하는 눈빛으로 더르규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벌이던 헛짓거리에 별 관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라디. 이한의 요리 실력은 상상 그 이상이야.”
‘어쩌라고...’
안 궁금해!
지젤은 욕을 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다시 검을 붙잡았다.
* * *
이한이 마법으로 쓰러뜨렸을 때도, 혹은 검으로 쓰러뜨렸을 때도 본 적 없는 존경심 어린 시선을 몇몇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던졌다.
그만큼 고기가 맛있었던 것이다.
그건 신비로운 마법의 맛이었다.
‘...그냥 검술 강의 듣는 첫날에 고기나 구워서 가지고 갈 거 그랬나?’
그랬다면 진지하게 흰 호랑이 탑 학생의 1/4 정도는 끌어들일 수 있었을지도...
“다 먹었으면 이동하지.”
“잠깐. 워다나즈. 기다려라.”
“?”
“물을 모아야 해. 여기 이 풀 보이나? 이 풀을 뽑으면 뿌리에 물을 머금고 있...”
“샘솟아라.”
“......”
“물 채워라. 가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왜 기사들이 술만 마시면 마법사들에게 투덜거리는지 알 것 같았다.
기사들은 온갖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해야 하는 일을 지팡이 하나로 해버리는 허탈감!
“마법사들은 진짜...!”
“너희도 마법사잖아?”
그러는 동안 이한은 아래로 내려가는 문을 확인했다.
“잠금 장치가 있군.”
“마력을 움직여서 푸는 방식의 잠금 장치다.”
“주변을 뒤져서 책을 찾고 있었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알아낸 정보를 공유했다.
마력을 움직여서 특정 모양을 만들어내면 풀리는 방식의 잠금 장치.
그런 만큼 모양을 알아내지 못하면 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한은...
‘마력 여유 있으니 많이 쓰이는 모양 몇 개만 돌려볼까.’
“비켜봐라.”
이한은 잠금 장치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제일 유명하고 자주 쓰이는 기호들과 문양들부터 돌려볼...
파지직!!!
이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보다 장치의 한계마력량이 적었는지, 이한이 불어넣은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안이 박살나는 느낌이 났다.
‘...망했군.’
이한은 뒤에서 쳐다보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실수로 장치를 부쉈다고 말한다면 ‘워다나즈 이 사악한 마법사 놈! 본색을 드러내는구나!’하고 악을 쓸지도 모르는 놈들이었다.
“???”
물론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거겠지.’
덜컹!
장치가 박살나자 고정하고 있던 부분도 부서졌는지, 문이 열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탄했다.
숨도 쉬지 않고 바로 열어버리다니!
“...어떻게 알아낸 거지?”
지젤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추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한은 침착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지혜와 번뜩임.”
“......”
지젤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지만 저 워다나즈의 두뇌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