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확실히 워다나즈가 대단하긴 합니다.”
이한의 어지간한 활약에는 적응이 된 푸른 용의 탑 학생들도 놀랐는지 수군거렸다.
잠금 장치를 해제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저렇게 단숨에?
“황녀님? 황녀님?”
키락 가문의 네블렌이 다시 부르자 아덴아르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황녀는 미안하다는 듯이 사과했다.
“아닙니다. 어떻게 풀었는지 고민하고 계셨군요. 제가 나중에 물어보겠습니다.”
네블렌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가이난도는 잠금 장치를 흔들어보았다.
안에서 달그락거리며 뭔가 부서진 소리가 났다.
“어? 이거 부서진 거 아니야?”
“가이난도. 원래 고난이도 마법 잠금 장치는 그런 소리가 나는 거야.”
“그래? 내가 예전에 망가뜨린 장난감 같은 소리가 나는데...”
가이난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요네르가 물었다.
“푼 거 맞지?”
“아니. 부순 거야.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말고.”
“......”
진짜 부순 거였어?!
* * *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어두웠던 만큼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상당히 긴장됐다.
“빛이여.”
이한은 앞에서 빛의 구체를 띄웠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암흑 시야 마법을 걸면 걸었지 빛의 구체를 불러내는 건 피하고 싶었다.
앞이 잘 보인다는 건 상대도 이한 일행을 잘 본다는 것 아닌가.
계단 아래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빛은 상당히 도박이었다.
‘그렇지만 이만한 인원이 어둠 속을 걸어가는 건 더 위험하니...’
탁-
다행히 계단 밑에는 록 드레이크가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서고와 복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도서관에 입장했을 경우 입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친숙한 광경이었다.
“후!”
“휴...!”
학생들도 그걸 느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여기 서고 옆에 의자가 있어! 탁자도!!”
“벽에 등불이 걸려 있다고!! 보여?!”
‘누가 보면 학생들이 미친 줄 알겠군.’
너무나도 당연한 걸 대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은 어쩐지 짠했다.
사실 원래 도서관은 이게 정상이었다.
꽉꽉 들어찬 서고들로 구성된 벽과 통로, 곳곳에 위치한 탁자와 의자, 아늑하고 따뜻한 조명...
록 드레이크가 나오는 황야는 보통 도서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워다나즈?”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복도 반대편에서 닐리아가 불사조 탑 사제들과 같이 서있었다. 그림자 순찰대 출신의 다크 엘프는 반가운 얼굴로 이한을 불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남긴 표식 봤어?”
“?”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닐리아도 그렇고 사제들도 그렇고 그렇게 지친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지?’
“닐리아. 록 드레이크는 어떻게 돌파했지?”
“무슨 록 드레이크? 록 드레이크가 왜 나와?”
“......”
이한은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뒤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설마...
설마...?
“...너희는 혹시 입장하자마자 바로 여기로 왔나?”
“응. 어?? 뭐야. 너희들은 다른 곳에 떨어졌어?”
“......”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 * *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록 드레이크의 황야에 떨어졌을 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과 불사조 탑 학생들은 바로 서고 미궁 구역으로 떨어졌다.
서고 미궁 구역은 온갖 책들이 빽빽하게 밀집된 장소.
덕분에 두 탑의 학생들은 비교적 빠르게 책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고.”
뒤늦게 뒤에서 나타난 다른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희들. 여기 서고 미궁 구역에 뭐가 나오는 줄 알아?”
“뭐가 나오지?”
흰 호랑이 탑 학생이 서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절대로 궁금해서 묻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늘 망령이 나와.”
그늘 망령.
망령 계열 몬스터 중에서 암흑 속성을 비교적 강하게 갖고 있는 몬스터로, 부주의하게 접촉한 사람에게 빙의하는 몬스터였다.
서고 미궁 구역이 조명이 없지는 않았지만 온갖 서고와 책들로 구조가 복잡하고 컴컴한 장소도 많은 만큼 그늘 망령 같은 몬스터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을 경우 피하지도 못하고 바로 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건 그거고, 아무리 비교해도 록 드레이크 정도로 까다롭진 않았다.
“그래. 잘 됐군. 우린 록 드레이크 상대하고 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잠깐, 진짜야?”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또 허세를 떠는구나 하고 코웃음을 치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멈칫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록 드레이크 나오더군.”
“...뭐, 서로 고생하면서 왔군!”
“뭘 서로 고생이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울컥했지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자기들이 잘못 골라서 고생한 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닐리아는 이한을 좀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 안됐네. 어떡해?”
“됐어.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혹시 책 위치 기록해 놓은 거 있으면 공유나 부탁하지.”
“그건 해줄 수 있는데, 지금은 야영 준비부터 하는 게 나을걸?”
“야영을? 지치긴 했지만 다들 몇 시간 정도는 더 움직일 수 있을 텐데.”
닐리아는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과 벽 곳곳에 매달린 조명들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조금씩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거든. 그늘 망령 숫자도 늘어나더라. 괜히 돌아다니다가는...”
“가이난도가 그늘 망령한테 당했다!!”
“빙의하지 못하게 막아!”
“늦었어! 빙의했다!”
“때려! 빙의 풀릴 때까지!”
“사제님! 사제님이 때려주시죠!”
“...저렇게 될 수 있지.”
“그렇군.”
이한은 친구들한테 양팔을 붙잡힌 채 뺨을 맞는 가이난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록 드레이크를 만나고 온 탓에 약해보이긴 했지만, 그늘 망령은 확실히 성가신 몬스터였다.
특히 이런 지형에서 사람 숫자가 많을수록 더더욱 강함을 발휘했다.
뒤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빙의당해서 난동을 부리고, 진형이 흐트러진 사이 옆에 있던 친구도 빙의당하고, 간신히 해제했더니 소란을 듣고 온 다른 그늘 망령들이 또 덤벼들고...
다른 몬스터들도 나오는 구역이라면 파티가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주기적으로 그늘 망령의 숫자가 늘어나는 거면, 다시 그늘 망령의 숫자가 줄어드는 순간이 오겠군. 이것 때문에 기간을 하루 넘게 잡은 건가?’
“닐리아. 야영 준비 관해서 몇 가지 조언을 듣고 싶은데.”
“...물론이지!”
닐리아는 오늘 본 표정 중 가장 신이 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옆에 있던 더르규는 그 기세에 압도됐는지 살짝 움찔했다.
“서고 미궁 구역이라고해서특별히어렵게생각할건없어.중요한건기본이야.저번에말한거기억하고있지?”
‘숨 넘어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사람여럿이들어갈수있을만한공터구역을찾아.거기로들어가는통로는좁을수록좋지.그래야몬스터들이오지않을테니까.그늘망령은빛을보고오는거알지?”
“그렇군...”
‘저걸 다 알아들었다고?’
더르규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저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의 말은 솔직히 뭐라고 하는 건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 * *
“다 된 건가?”
“대충은.”
닐리아의 조언을 받아들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야영하기 괜찮은 장소를 찾았다.
넓은 공터 비슷한 곳에 짐을 풀고, 이어지는 좁은 통로에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천을 쳤다.
저 먼 복도 쪽에서 깜박이는 불빛이 보였다.
“저기는 어디였더라?”
“검은 거북이 탑 놈들일걸? 쟤네들도 잘 준비하나 보다.”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네 탑의 학생들 모두 이 근처에서 흩어져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고 미궁 구역이 만만찮게 복잡한 만큼 중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길을 잃기 쉬워졌다.
게다가 이 중앙 인근에는 여러 장점들이 있었다.
물이 나오는 분수대부터 시작해서 여러 편의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자. 다들 뽑아. 정한 대로 두 명씩 돌아가며 보초 서는 거다.”
가이난도는 손을 뻗어 제비를 뽑았다. 대충 중간쯤 되는 순서였다.
“중간이네. 좋은 건가?”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뭐든 좋은 거겠지.”
이한은 슬쩍 대답을 피했다.
사실 이런 야영에서 처음이나 끝이 낫지 중간은 어중간하게 일어나야 해서 더 피곤한 법이었다.
“가서 물 좀 떠와야겠다.”
“그럴 필요 없다. 샘솟아라.”
분수대에서 씻을 물을 좀 퍼오려고 했던 학생은 감동 받은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아까 록 드레이크가 나오는 황야와는 달리 물 생성 마법이 가능하긴 했지만, 부족한 마력을 그렇게 낭비하는 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이한은 아니었다.
낭비하든 말든 상관없는 수준의 마력!
“워다나즈... 만약 내가 다른 모험가들에게 파티에 필요한 뛰어난 마법사를 추천해달란 소리를 듣는다면, 꼭 너를 추천하겠어.”
‘무슨 끔찍한 소리를?’
이한은 물 만들어줬더니 악담을 퍼붓는 친구의 모습에 경악했다.
“워다나즈. 불빛이 많이 약해졌어.”
“슬슬 이쪽도 불을 끄는 게 낫겠군.”
도서관의 불빛이 아까보다 현저히 약해진 게 느껴졌다.
이럴수록 돌아다니는 그늘 망령들은 학생들의 불빛을 보고 찾아오리라.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자른 빵과 햄, 그리고 사탕 몇 개와 물로 식사를 간단하게 끝낸 다음 각자 자리에 누웠다.
사실상 딱딱한 도서관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운 셈이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훅-
“이한. 자?”
“아니.”
“카드놀이 한 판 할래?”
“아니.”
“그늘 망령이 여기로 오진 않겠지? 흰 호랑이 탑 놈들한테 갔으면 좋겠는데.”
“......”
“보초 서는 놈들이 졸면 어떡하지? 자고 있는데 그늘 망령이 들어오면?”
다른 쪽에서 누군가 빈 사탕 상자를 집어 던졌다. 가이난도는 한 대 맞았다.
“누구야?!”
“잠이나 자. 좀.”
“맞아. 입 다물고 자. 가이난도.”
곳곳에서 구박이 들려왔다. 가이난도는 투덜거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괜찮겠지.’
몬스터들이 혹시라도 들어오는 일을 막기 위해, 공터로 이어지는 통로 바깥쪽에서 두 명씩 보초를 서고 있었다.
물론 이한은 친구들만 믿지 않았다. 샤르칸도 소환시켜서 옆에 대기시켜놓은 상태였다.
마력이 낭비되긴 했지만 뭐 이 정도는...
‘그냥 샤르칸이 보초를 설 테니 쉬라고 할 거 그랬나... 아니. 철저한 게 낫겠지. 내가 다 해줄 필요도 없고.’
이한은 친구들이 들었다면 ‘야!’소리가 나왔을 생각을 했다.
사실 샤르칸이 있다면 보초를 서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 * *
“!”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천장 빛에 회중시계를 확인해보니 새벽이었다.
-크르릉!
샤르칸이 소매를 문 채 잡아당겼다. 이한은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무슨...’
“애들아!! 일어나!! 일어나!!!”
통로 바깥 쪽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친구들이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망령들이 몰려다니고 있어!”
“지... 지금 그거 때문에 잠을 깨운 거야?”
잠에서 간신히 깬 푸른 용의 탑 학생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몰려다닐 수도 있지 왜...”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보라고!”
몇몇 학생이 비틀거리며 통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퍼뜩 잠이 달아난 표정으로 뒷걸음질쳤다.
“...!!!!”
“그, 그늘 망령들이 무슨...?”
통로 바깥쪽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망령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이쯤이면 망령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온다!”
좁은 통로 끝에서 망령들이 꾸역꾸역 밀려닥치기 시작했다. 마치 거센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이한은 지팡이를 붙잡고 마법을 준비했다.
“타올...”
“이한!”
“왜?”
“도서관에서 화염 마법 써도 돼?!”
“...문제 생기면 교장 선생님 책임이라고 하자. 타올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