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들으면서 ‘이상하군 난 분명 오전에 저런 걸 구현하라고 공격당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지만, 이한은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해봤자 별로 좋을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흔히 몇몇 마법사들은 소환 마법의 결과만 보고 가장 쉽고 편리한 마법이라고 착각하곤 하는데... 그런 착각으로 이 자리에 온 거라면 지금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밀레이 교수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일어나려던 가이난도는 눈치를 보며 다시 앉았다.
‘하긴 소환 마법이 이런저런 밑작업을 많이 요구하는 편이긴 하지.’
이한은 가이난도가 옆에서 끙끙대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방금 들은 걸 골똘히 생각했다.
당장 다른 학파의 마법사들이 춤추는 검을 마법으로 구현하려면 몇 개의 마법을 연달아 시전해야 했다.
그러나 소환 마법사들은 그냥 춤추는 검을 소환해버리면 됐다.
이 결과만 보면 소환 마법이 훨씬 쉽고 편리해보였지만...
당연히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었다. 완벽한 마법이란 건 없었다.
춤추는 검을 한 번에 소환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밑작업을 해놔야 하는 것이다.
방금 밀레이 교수가 던진 것 같은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팔면체 형태의 금속(때문에 소환 마법은 이런 시약이 특히 많이 필요한 편이었다)에 미리 마법을 압축시켜놓거나, 혹은 마법진에 마법을 압축시켜놓거나.
‘그렇다고 지성을 가진 존재와 계약하는 건 그거대로 힘든 일이고.’
이한은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샤르칸의 뼈조각을 쳐다보았다.
당장 샤르칸만 해도 이한이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자는 사이 목을 물어뜯었을지도 몰랐다.
달그락!
샤르칸의 뼛조각이 항의하듯이 움직였다.
“오늘은 소환 마법에 필요한 시약과 마법진을 만드는 걸 연습하겠습니다. 지루한 일이 되겠지만, 소환 마법에서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불러낸 아이템이 마법사를 공격하는 불상사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한. 이한.”
가이난도가 툭툭 건드리자 이한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가이난도. 내가 도와줄 테니까.”
“!”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을 강의실에 와서 처음 듣고 이해하려는 학생은 하수였다.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을 강의실에 와서 들은 다음 나중에 이해하려는 학생은 중수였다.
숙련된 학생은 이미 오기 전에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을 어느 정도 공부해왔다.
그리고 바로 이한이 그런 사람이었다.
교수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는 사람!
“자. 이 깃펜 소환 마법진은 너도 몇 번 해서 잘 알겠지만 직접 처음부터 만들려고 하면 난해한 부분들이 있지. 여기 이 ◇ 문양 주변이 대표적인 함정인데...”
“그... 그게 아니라...”
“어려워도 조금만 참아봐. 잘 설명해줄 테니까.”
“화장실 가고 싶다고 이 자식아!”
* * *
꾸벅, 꾸벅-
‘저런.’
이한은 저 옆에서 고개를 꾸벅이는 흰 호랑이 탑 학생을 보며 한탄했다.
이런 부분을 보면 확실히 친구들이 1학년이라는 게 느껴졌다.
저렇게 대놓고 졸다니.
만약 이한이 존다면(절대 졸지도 않겠지만) 절대 저렇게 안일하게 졸지 않을 것이다.
‘밀레이 교수한테 이미 들켰겠군.’
주변을 둘러보니 꼭 흰 호랑이 탑 학생들만 조는 게 아니라, 모든 탑에서 조는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계속 자리에 앉아서 특수 제작된 마법 잉크와 각종 마석 가루를 이용해 마법진을 그리고 글자와 문양을 새기고 있다 보면 아무리 강철 같은 정신을 갖고 있는 마법사라 하더라도 안 졸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한처럼 이런 작업을 24시간 동안 반복해도 ‘뭐 이 정도야 새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 됐나?’
이한은 완성된 마법진을 확인했다.
단순히 종이와 잉크만 사용한 게 아닌, 금속 조각과 마석 가루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마법진이었다.
소환 마법으로 불러내려는 아이템이 복잡해질수록 마법진도 복잡해지기 마련.
이한도 몇 번 실수를 해서 다시 작성해야 했다.
스스로 ‘나는 소환 마법을 익히는 학생입니다’라고 글씨를 휘갈기는 마법 깃펜을 소환하는데도 이 정도라니.
더 상위로 올라가게 되면 얼마나 복잡해질지 걱정이었다.
‘생각해보니 교수는 제자들을 시키면 되겠군.’
화려한 마법 뒤에 숨겨진 노동량을 생각하니 이한은 씁쓸해졌다.
제국 사람들은 마법이라고 하면 화려한 기적을 떠올렸지만 사실 세상 일이란 건 다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잘했습니다.”
어느새 밀레이 교수가 가까이 다가와서 이한의 작업물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칭찬에 엄격한 밀레이 교수의 성격상 저 정도 칭찬이면 정말 잘했다는 칭찬이었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
이한은 밀레이 교수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오해라니 무슨 소리지?’
아까 가이난도와 어울리는 걸 보면서 이한의 소환 마법 수준이 가이난도 수준이라고 착각이라도 하신 것일까?
그런 거라면 사과할 법도 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아직 시간이 더 걸리겠군요. 그 동안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해보도록 하세요.”
“어...”
이한은 멈칫했다.
착각하기 쉬웠지만 교수들이 저런 말을 할 때 그냥 넘어가면 안 됐다.
교수의 성격에 따라 저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가르시아 교수가 ‘남는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거 해봐요 이한 학생’라고 하면 그건 정말 괜찮았다.
강의실 의자 몇 개 이어놓고 누워서 낮잠을 자도 됐다.
그러나 해골 교장이 ‘남는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거 해라’라고 했을 때 낮잠을 자는 건 자살행위였다.
아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징벌방으로 이동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간단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혹시 교수님께서 결과물을 확인해주실 겁니까?”
마법진이나 시약 제작의 결과물을 확인한다면 그건 정말 자유롭게 하란 게 아니라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겠다 놀지 말고 열심히 해봐라’에 가까웠다.
확인하지 않는다면 마음 편하게 쉬어도 됐고.
‘으음.’
노교수는 워다나즈 가문 출신 학생이 꺼낸 말에 고민에 잠겼다.
원래 밀레이 교수는 학생 한 명을 특별대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평등과 엄격.
그것이 밀레이 교수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이한이 아무리 소환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학생들과 별개로 추가 결과물을 봐주는 건...
‘하지만 잘못이 있다.’
밀레이 교수는 반성했다.
학생들에게 공평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밀레이 교수 본인이, 처음에 저 워다나즈 가문 소년에게 편견을 갖고 대한 것이다.
멋대로 재능에 취한 오만한 학생이라고 생각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확인하도록 하지요.”
“......”
‘젠장.’
이한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밀레이 교수도 결국 해골 교장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유는 무슨 자유란 말인가!
“알겠습니다.”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깃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한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중 밀레이 교수가 ‘고작 그거입니까?’같은 소리를 하지 않을 만한 건...
‘역시 떠다니는 방패인가.’
이한이 모든 형태의 원소 변환에 대해 볼라디 교수의 합격점을 받았지만, 호오(好惡)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법사는 자기가 자주 사용하는 형태가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한이 지금 가장 익숙한 형태는 구슬과 방패였다.
구슬보다는 방패가 좀 더 인상적이리라.
‘지금 마법으로도 자율적인 움직임은 불가능하니 몇몇 부분은 편법으로 때워야겠군.’
스스로 움직이면서 막는 방패는 무리더라도 제자리에 고정 되어서 막아주는 방패 정도는 지금도 여러 원소로 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조금 약하게 보일 수 있으니 불완전하더라도 움직임을 조금 추가하면...
‘그런데 뭘 하려는 거지?’
밀레이 교수도 마법사인 이상 호기심이 없을 순 없었다.
하물며 이한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번 학년 학생들 중 손꼽히는 재능을 갖고 있는 학생.
그런 학생에게 자유롭게 시간을 줬을 때 뭘 할지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형태를 보니 방패인가.’
밀레이 교수는 살짝 안타까워했다.
욕심이 조금 과했던 것이다.
아마 저번에 물 구슬을 다루는 걸 보니 물 원소 형태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선후가 틀렸다.
먼저 물 방패 마법에 익숙해지고, 눈을 감고도 그 마법의 마력 구조와 흐름을 그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마법진으로 그려도 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마법진부터 먼저 나서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같은 물 원소 마법이라 하더라도 구슬 형태와 방패 형태는 전혀 다른 형태였으니까.
‘하지만 실패 또한 교훈이 될 겁니다.’
밀레이 교수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실패하지 않는 마법사는 없었다.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를 뿐.
* * *
“다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다른 학생들도 마법진을 얼추 완성시키고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거의 다 했는데. 아쉽군.’
“오늘 이렇게 강의가 끝나면 다들 많이 아쉬워하리라 생각합니다.”
밀레이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네!’라고 대답해도 될지 몰라서 우물쭈물했다.
“네!”
시원하게 대답하는 가이난도를 보며 학생들은 감탄했다.
밀레이 교수는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당연합니다.”
“너무 지루...”
이한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가이난도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이난도의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오늘 한 과정은 소환 마법의 길을 걷는 마법사라면 앞으로 수천 번, 수만 번 겪게 될 과정입니다. 미리 각오를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밀레이 교수는 말과 함께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강의실의 형태가 변화했다. 학생들이 구석으로 밀려나고 가운데에 커다란 빈 공간이 생겨났다.
“오늘 남은 시간에는 계약에 대해 배울 겁니다.”
“...!”
“!!!”
학생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무생물체 소환이 아닌, 다른 계(界)의 존재와 만나서 의사를 소통하고 계약을 맺는 소환.
사실 이게 더 일반적인 소환 마법의 이미지였다.
‘위험해서 그렇지.’
어쩔 수 없이 페르쿤트라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정령과 계약한 이한인 만큼 저런 계약의 위험성을 잘 느끼고 있었다.
지성을 가진 존재와의 계약이 왜 위험하겠는가?
상대방도 언제든지 마법사를 엿먹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마법사가 1학년 학생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마계에서 수백 년 구른 악마에게 어린 마법사들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밀레이 교수도 그런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학생들만 있을 때 다른 계를 엿보거나 탐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현재 밀레이 교수가 강의실 중앙에 시전한 마법진은 일종의 안전장치가 달린 통로였다.
정령계를 엿볼 수 있지만, 접근할 수 있는 정령의 힘에는 제한이 걸린 통로.
일정 이상 강력한 존재들은 아예 접근을 하지 못했다.
‘교수님은 이렇게 안전수칙에 철저하신데, 선배들은 대체 뭔 개짓거리를 해서 서리거인의 왕이 소환된 건지 모르겠군.’
이한은 자리에 없는 선배들을 욕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한 학생.”
“예?”
“이한 학생은 이 마법진을 쓰도록 하십시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밀레이 교수가 정령계 마법진 말고 다른 마법진을 불러오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들어보니 정령들이 학생을 피한다고 하더군요. 언데드들의 계(界) 중 하나를 찾아서 열어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씁쓸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