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그런 이한의 마음을 모르는 학생들은 정령계와 연결된 마법진 앞에 줄을 섰다.
밀레이 교수는 조언했다.
“다섯 명씩 한 조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리 안전장치가 걸려 있는 마법진이라 하더라도 1학년 학생 혼자서 낯선 이계를 탐사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럴 때는 여럿이서 같이하는 게 안전했다.
“그런데 교수님.”
“뭐죠?”
“워다나즈는 혼자 들어가요?”
이한은 자신을 언급해준 검은 거북이 탑 학생에게 고마워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 살짝 고민했다.
그냥 혼자 들어가도 조금 씁쓸할 뿐이지 별 상관없었는데, 굳이 언급하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는가.
“언데드계는 적성에 맞지 않는 학생이 들어가 봤자 얻는 게 없을 겁니다.”
“앗. 흑마법 배우는 다른 학생들도 있어요.”
그 말에 밀레이 교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요? 누굽니까?”
“......”
“......”
가이난도와 라파드엘은 방금 말을 꺼낸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을 죽이고 싶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밀레이 교수가 입을 열었다.
“둘은 언데드계로 들어가세요.”
“......”
“......”
“이야. 반갑다.”
“득츠르...”
이한의 반가운 인사에 라파드엘은 이를 갈며 작게 중얼거렸다.
산뜻하고 아름다운 정령계 대신 사악한 음의 마력이 가득한 언데드계로 들어가게 되다니.
하여간 흑마법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흑마법을 향한 원한이 다시 치솟았다.
“이, 이한. 난 정령계로 보내주면 안 돼?”
“가이난도. 내가 보기엔 넌 정령보다 언데드가 적성에 맞다.”
“아니... 해봐야 아는 거 아닌...”
“자. 다들 들어가자.”
“손 치우지 못해?”
이한은 두 친구의 등을 떠밀었다. 혹시라도 정령계로 놓치기 싫어서였다.
* * *
휘이이이익-
‘음산하군.’
언데드계는 모르툼 교수의 공방, 흑암관 주변의 풍경과 비슷했다.
음(陰)과 암흑 속성의 마력이 많은 곳인 만큼 풍경에서 느껴지는 게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컴컴한 사방.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주인 없는 묘지.
시냇물 대신 검은 진흙이 끓어오르는 강가.
반쯤 포기한 가이난도는 생각을 바꾼 모양이었다.
“이한. 어떤 언데드가 좋을까? 추천 좀 해줄래?”
“언데드는 다 쓰레기지.”
라파드엘의 훼방에 가이난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에이. 너무 그러지 마. 라파드엘. 같이 온 처지잖아.”
‘아니. 웬일로 저런 어른스러운 대응을?’
이한이 놀라는 사이 가이난도가 작게 속삭였다.
“저 자식 묘지에 버리고 우리끼리 움직이자.”
“다 들린다 비열한 놈아!”
“칫.”
“둘 다 그만해라. 라파드엘. 너도 같이 온 이상 협력해야 한다.”
“내가 왜...”
이한은 바로 지팡이를 내밀었다. 라파드엘이 손을 허리춤에 뻗기도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생각해보니 협력해야겠군.”
라파드엘은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친절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해해주니 고맙다. 자. 앞장서라.”
“왜?!”
“기사잖아.”
“너 기사잖아.”
푸른 용의 탑 학생 두 명의 뻔뻔한 말에 라파드엘은 기가 막혔다.
물론 기사나 전사는 전통적으로 파티의 전위를 맡는 직업이었다.
문제는...
“워다나즈! 네가 나보다 검술 성적이 좋잖나!”
“와... 저런 추한 소리를 하다니...”
가이난도가 감탄했다.
검술 강의를 듣지 않는 가이난도의 눈에는, 라파드엘이 전위에 서기 싫어서 억지를 부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저런 억지를 쓰냐?
“닥쳐! 황자 놈아! 저 자식이 얼마나 검을 잘 쓰는데!”
“난 이번 원정에서는 지팡이 써야 해. 네가 앞장서라.”
“하ㅈ...”
“해.”
이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목소리에는 반문을 허락하지 않는 압박이 담겨 있었다.
라파드엘은 씩씩대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맹세했다.
저 워다나즈 놈을 상대할 일이 생기면 꼭, 최소한 친구 넷 이상을 데리고 참가해야겠다고!
“다들 원칙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물론이다.”
“자서 못 들었는데.”
이한과 라파드엘은 가이난도를 쓰레기 보듯이 쳐다보았다.
“기본적으로 정령과 차이 없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쓸만한 놈이 있나 확인해봐.”
정령계를 돌아다니든 언데드계를 돌아다니든 이계의 존재와 계약하는 방법은 비슷했다.
돌아다니면서 상대를 부르던가 아니면 상대를 발견해서 찾아가던가.
물론 이한처럼 상대를 부르던 발견해서 찾아가던 도망가게 만드는 마법사는 좀 예외적이었다.
“하지만 이한. 언데드들은 정령들과 달리 대부분 적대적이잖아?”
“그렇지.”
앞장서서 가고 있던 라파드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괜찮다. 라파드엘. 뒤에서 지원할 테니까.”
“맞아. 라파드엘. 우리가 지원해줄게.”
“...더럽게 고맙다.”
정령계에서 계약은 설득과 매력으로 진행된다면 언데드계에서 계약은 힘과 싸움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언데드들이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만큼, 일단 제압되기 전까지는 덤비는 놈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스켈레톤 마법사 하나 찾으면 좋겠군.’
이한은 하급 언데드 몬스터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스켈레톤 전사든 궁수든 마법사든 계약만 할 수 있다면 새내기 마법사한테는 무조건 이득이었다.
특히 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스켈레톤 전사 같은 소환수를 앞에 소환해놓고 싸우는 게 매우 쏠쏠했다.
그러나...
‘스켈레톤 마법사라면 마법을 배울 수 있다.’
지식의 탐구.
이 또한 소환 마법사들의 목표 중 하나였다.
강력한 이계의 존재들은 마법사들이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린 지식들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제약이 걸려 있는 하급 언데드 몬스터들에게 그 정도 수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대화 가능한 이성이 없는 놈들이었다.
그나마 스켈레톤 마법사는 하급 언데드 몬스터들 중 몇 안 되는 마법 사용자.
본능으로 마법을 쓰는 놈이지만 시간만 준다면 따라서 배울 수 있으리라.
‘마법은 무조건 많이 배워 놓는 게 이득이다. 완벽하게 익히든 익히지 못하든.’
도서관에서 흑마법 책 하나 찾기 위해 록 드레이크를 상대하다보면, 이런 식으로 쉽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
“나, 나왔다!”
앞에서 소리가 들리자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스켈레톤 하나가 녹슨 뼈로 된 검을 들고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라파드엘은 바로 목검을 뽑아들고 스켈레톤과 격돌했다.
“어디서 언데드 따위가!”
쿵!
이성이 없는 몬스터의 검술은 역이용하기 쉬웠다. 라파드엘은 상대의 검을 틀어서 옆으로 밀어버렸다.
‘됐다!’
라파드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운이 좋았다.
언데드계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언데드 몬스터를 하나 만나다니.
이대로라면 제압한 다음 놈을 굴복시켜 계약을 맺을 수 있을지도...
퍽!
퍽퍽퍽!
그 순간 뒤에서 물 구슬이 날아와 스켈레톤 전사의 머리통을 부수고 팔과 다리를 박살냈다.
그러자 스켈레톤 전사는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푸스스...
“아차. 너무 강했군.”
이한은 혀를 찼다.
제약이 걸린 만큼 나타난 언데드들은 생각보다 약했다.
해골 교장의 소환수를 기준으로 잡고 공격을 날렸는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괜찮아. 이한. 라파드엘을 도와준 거잖아.”
“미안하게 됐다. 라파드엘. 혹시 계약하고 싶었나?”
“...그럴리가! 내가 언데드 따위와 계약할 줄 알았나?”
라파드엘은 고개를 홱 돌렸다. 이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 설마 우...”
“빨리 가자! 다음 놈을 찾으러! 난 계약할 생각이 없지만, 너희들이 계약을 해야 이 지겨운 탐사가 끝나겠지!”
“......”
* * *
‘운이 좋은 걸 떠나서, 이 멤버의 흑마법 재능이 괜찮나보군.’
실수로 스켈레톤을 부순 뒤로도 스켈레톤 전사 두 마리를 더 만나자, 이한은 확신을 얻었다.
생각해보니 가이난도도 나름 흑마법에 관해서는 제법 재능을 보여주는 학생.
그런 학생들이 여럿 있는 만큼 언데드 몬스터들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어떻게 생각하지?”
“...어... 그냥 네가 뛰어나서 오는 줄 알았는데?”
가이난도는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이한 때문에 오는 게 맞지, 딱히 가이난도나 라파드엘 때문은 아닌 것이다.
“...그런가? 아니.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텐데. 라파드엘. 넌 어떻게 생각하지?”
“날 너희들의 쓸데없는 말다툼에 끼워 넣지 마라.”
라파드엘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다시 만난 스켈레톤 전사 두 마리와도 계약을 실패한 것이다.
이번에는 이한 때문이 아니라 라파드엘 본인의 문제였다.
스켈레톤 전사를 제압하고 굴복시키려고 하자, 상대가 굴복을 거절하고 소멸될 때까지 저항을 선택한 것이다.
‘제기랄! 뭐가 문제인 거지?’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흑마법을 배우기로 결정한 라파드엘이었다.
언데드 소환처럼 흑마법의 커다란 축을 이루는 분야를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제대로 된 소환수를 찾아서 모르툼 교수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앗. 또 나왔다. 이한. 이번에는 네가 제압해봐.”
“라파드엘이 전위잖아?”
“근데 저 자식이 제압하니까 자꾸 반항하는 거 같단 말이야. 네가 제압해봐.”
“...내가 제압하면 뭐가 다르단 거지?”
이한은 살짝 정색했다. 가이난도는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 너는 뭐든지 잘 하니까? 제압도 잘 하지 않... 나?”
“아. 그런 소리였군. 난 또 다른 차원의 존재라면 나한테 겁을 먹는 게 당연하단 소린 줄 알았네.”
‘맞지 않나?’
가이난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무서워서 입을 다물었다.
“라파드엘. 교체다.”
“흥. 네가 한다고 달라질...”
퍽! 쾅!
-■■■■■!
스켈레톤 전사가 몇 대 맞고 엎드리는 모습에 라파드엘의 입이 크게 벌려졌다.
누가 봐도 저건 100% 확실한 굴복이었던 것이다.
‘저... 저?!’
“잘했어, 이한! 계약할 거야?”
“으음. 고민이군.”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기회가 있을 때 다른 차원의 존재와 계약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스켈레톤 마법사를 원했기에 마음에 걸렸다.
계약은 무한히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마법사 본인의 마력이나 정신력에도 영향을 받았고, 하면 할수록 마법사의 영혼에 계약자들의 잔향이 남아 다른 존재들이 꺼림칙하게 여기고 피하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계약하는 순간 주변의 다른 언데드들이 눈치채고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 주변에서 강한 영혼의 파동이 발생한다는 건 어떤 마법사가 언데드 하나를 제압하고 굴복시켰다는 뜻이었으니까.
정령계에서 정령 하나와 계약하면 그 인근에서 한동안 정령을 찾기 힘든 것처럼 언데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번만 기회가 아니다. 다른 곳에서 새로 찾으면 되겠지.’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약하겠다.”
뜻을 밝히자 예전에 페르쿤트라와 했던 것처럼 스켈레톤 전사의 영혼과 서로 얽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물론 페르쿤트라 정도의 지성이나 강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한이 원할 때 이 계약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잘 부탁한다. 스켈레톤 전사.”
“라파드엘. 너 왜 표정이 그래?”
“...언데드가 싫어서 찡그리고 있었던 거다!”
* * *
이한이 계약을 끝내자 밀레이 교수의 마법진이 감지를 했는지 셋을 불러들였다.
먼저 돌아온 학생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분명히 정령이었다니까...”
“그건 그냥 나뭇잎이었어. 헛것을 본 거야.”
밀레이 교수가 셋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조금 빠른 것 같은데. 설마 계약이라도 했습니까?”
“어... 했습니다만?”
“!”
밀레이 교수는 보기 드물게 놀랐다.
1학년 학생들이, 그것도 안전장치를 한 마법진으로 들어갔는데 이렇게 빨리 언데드를 만났다고?
계약을 한 것보다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