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놀랐습니다. 벌써 만날 줄이야.”
“?”
이한은 밀레이 교수의 말에 의아해했다.
저번에 우레걸음 교수가 한 번 안내해줘서 정령계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계의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침입자들에게 호기심이 많았다.
‘가만히 있어도 접근하지 않나?’
...이한을 보고 도망가는 게 이상한 거였지 원래 정령들이 더 접근해야 정상이었다.
“원래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말했듯이 안전장치가 있잖습니까.”
“아.”
강한 존재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걸어놓은 안전장치는 동시에 마법사들의 기척도 숨겨놓았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만큼 만날 수 있는 이계의 존재도 줄어들기 마련.
“그런데 만났는데요?”
“마력 때문이겠군요.”
밀레이 교수는 이한을 보며 말했다.
안전장치로 가려도 마력이 완전히 감춰지지 않으니 그 마력을 맡고 언데드들이 기어온 게 분명했다.
‘아니. 다른 놈들 때문이 아니었군.’
흑마법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이 같이 다녀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가이난도가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언데드들이 찾아오더라!
“역시 이한 네가...”
“불만이라도 있나?”
“아, 아니. 언데드 불러줘서 고맙다고.”
가이난도는 나중에 공동묘지에 가게 될 일이 생긴다면 이한은 절대 데리고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주말까지 이 마법진은 계속해서 유지해놓겠습니다. 오늘 계약에 성공하지 못한 학생들도 꾸준히 도전해보십시오.”
“!”
주말까지 마법진을 열어준다는 말에 이한은 반색했다.
‘스켈레톤 마법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스켈레톤 전사와 계약을 하긴 했지만 하나 정도 더 한다고 나쁠 건 없으리라.
달그락-
뼛조각 속에 들어가 있던 샤르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왜 마력낭비를 하냐는 뜻이었다.
“가이난도. 라파드엘. 잘 됐다. 마법진을 계속 유지해주신다고 하는군. 다시 들어가서 새 언데드를 찾아보자. 너희와 계약할 언데드들도 있을 거야.”
“워... 워다나즈. 그건 좀...”
라파드엘이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이한은 상대가 꾀를 부리는 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
“라파드엘. 힘든 척 하지 마라.”
“...마력이 진짜 없다고 이 자식아!”
라파드엘은 분노했다.
이한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 버텼지만, 원래 다른 이계에 발을 디뎠다가 돌아오는 건 상당한 마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옆의 가이난도 역시 힘들었는지 의자에 앉아서 초콜릿을 냠냠 먹고 있었다.
“아. 마력이 고갈난 거군.”
“그래!”
“그러면 일단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다음 쉬는 시간에 들어가도록 하지. 다음 쉬는 시간이 언제지? 말해봐라.”
“......”
바로 라파드엘의 강의 시간을 확인하려는 이한의 모습에 라파드엘은 섬칫한 공포를 느꼈다.
‘이... 이 자식!’
덩치 크고 험상궂은 인상을 가진 기사도 줄 수 없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공포.
낯선 공포를 느낀 라파드엘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빨리 말해라.”
“꼭... 꼭 날 데리고 갈 이유는 없지 않나?”
“안 돼. 원래 화살ㅂ... 아니, 전위가 한 명 있어줘야 마음이 편해.”
“너 방금 화살받이라고 하려고 했냐?”
“이상한 누명 씌우지 말도록. 그래서 쉬는 시간이 언제지?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라. 흰 호랑이 탑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가이난도는 그 틈을 타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이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가이난도 네 강의 시간은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까 말 안 해도 된다.”
“...!!”
* * *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자 밀레이 교수는 남은 자리를 정리했다.
이런저런 재료를 사용해서 마법진을 그린 만큼 주변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아까 그렸던 마법진인가?’
밀레이 교수는 이한의 자리에 남은 마법진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방패 형태를 소환하려고 했던 만큼 크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실패 또한 교훈이 됐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
밀레이 교수는 이한이 그린 미완성 마법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방패 형태의 마법을 제대로 다뤄본 적도 없을 1학년 학생이 이 정도 수준의 마법진을 완성하다니?
...정말 천재인가??
* * *
라파드엘은 마력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이한과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될 경우 최소한 넷이서 상대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
“이야. 반갑다.”
두 시간도 지나기 전에 흑마법 강의에서 이한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콜록. 셋에게서 다른 마력이 느껴지는데. 언데드계에 다녀오기라도 했나?”
모르툼 교수는 라파드엘의 속마음도 모르고 물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콜록, 아주 잘 했다!”
모르툼 교수는 기침을 쿨럭이며 외쳤다. 너무 강하게 외쳐서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 정도입니까?”
“당연하지. 콜록. 흑마법에 사령술만 있는 건 아니지만, 뛰어난 흑마법사 중에 사령술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암흑 원소를 다루거나 독, 저주를 다루는 것도 흑마법의 영역 중 하나였지만 역시 대다수 사람들이 흑마법 하면 떠올리는 건 언데드 소환인 사령술이었다.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비전의 마법.
“콜록. 그런 걸 소환 마법 시간에 한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혹시 다른 학생들이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지 않던?”
“......”
이한은 멈칫했다.
스켈레톤 전사와 계약을 했다고 했을 때 학생들의 반응이...
‘부러워하진 않았는데.’
대단하다고 놀라워하긴 해도, ‘와 흑마법 부럽다 나도 배우고 싶다’하는 학생들은 확실히 없었다.
그러나 이한은 모르툼 교수가 보내는 안타까운 시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콜록.”
모르툼 교수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라파드엘은 ‘안 그랬잖나?’하고 눈빛을 보냈다. 이한은 무시했다.
“계약을 맺고 소환할 수 있는 여러 이계의 존재 중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 언데드지. 언데드의 매력을 알게 된 마법사는 사령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콜록. 칼과 방패를 부리는 게 다 무어냐?”
마법사가 마력을 불어넣고 하나부터 열까지 명령을 내리는 것과, 나름 자아가 있는 이계의 존재를 소환해내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훨씬 더 편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자에도 단점은 있었다.
자아가 있다는 건 소환된 존재들이 마법사의 말을 잘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이 단점도 미리 굴복시키고 계약한 존재가 있다면 해소가 됐다.
그게 아니면...
무덤에서 지내거나 몸에 썩은 물질을 바르는 식으로 소환된 언데드들의 적개심을 없애는 방법도 있긴 했다.
모르툼 교수는 이 방법은 굳이 언급하지 않고 슬쩍 넘어갔다.
“콜록. 어쨌든 잘 계약했다. 너희 둘은 누구와 계약을 맺었느냐?”
“엇.”
“앗.”
“?”
“저, 저희는 아직...”
가이난도의 말에 모르툼 교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선 안 되지. 콜록. 언데드계로 가서 계약을 맺을 기회가 그리 흔한 게 아닌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수님. 제가 주말까지 데리고 가서 계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콜록. 믿을 학생이 자네밖에 없는 것 같군.”
“아닙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가이난도와 라파드엘은 이한을 노려보았다.
친구지만 오늘은 좀 많이 얄미웠다.
“콜록. 이미르그 학생도 가서 언데드 소환의 계약을 해보도록.”
“저... 저도요?”
가만히 있다가 불똥이 튄 거인 혼혈 학생, 이미르그가 당황스러워했다.
이미르그는 소환 마법을 듣지도 않는데다가 사령술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르그까진 필요 없겠군.’
이미 라파드엘만으로 견적을 다 낸 이한이었기에 남은 친구한테는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참가할 필요 없...”
“아니야. 같이 가야지!”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교수님도 그러셨잖나.”
가이난도와 라파드엘은 번개처럼 끼어들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
자기들만 가기 싫어서 친구를 강제로 끌어들이다니!
* * *
모르툼 교수는 계약을 대비해 몇몇 언데드계에서 자주 보이는 몬스터들의 특성과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소환 마법을 배우는 학생들 중 언데드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이 있다면 언데드가 얼마나 좋은지, 사령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흑마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차례대로 설득해달라고 말했다.
‘듣는 내 마음이 아파올 지경이군.’
이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콜록. 워다나즈.”
강의가 끝나갈 쯤에 모르툼 교수가 이한을 부르자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수님. 친구들을 잘 인도해서 쓸만한 언데드 몬스터와 계약을 맺게 하겠습니다.”
“콜록. 그게 아니야.”
“?”
“이걸 받게.”
모르툼 교수가 두툼한 갈색 책을 건넸다. 이제까지 이한이 본 책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낡아보였다.
‘<고대 기초 사령술-진정한 언데드 소환에 대하여>?’
“이 책을 주시는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한은 갑자기 이런 책을 왜 주나 싶어 의아해했다.
모르툼 교수가 쿨럭이며 입을 열었다.
“콜록. 사령술, 그 중에서도 언데드 소환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두 가지 아닙니까?”
하나는 계약되지 않은 존재를 소환하는 것.
계약으로 묶여 있지 않아서 마법으로 통제하고 각종 방법으로 적개심을 달래야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소환이 장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계약된 존재를 소환하는 것.
통제나 달랠 필요가 없었지만 계약 자체가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콜록. 틀렸네. 사실 세 가지지.”
“세 가지요? ...설마?”
이한은 멈칫했다.
“이해했나보군.”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설마 마법 아이템 같은 방식을 말하시는 건가?’
저번 밀레이 교수의 강의에서 배운 것처럼, 칼이나 방패 같은 자아가 없는 아이템들은 직접 마법사가 하나하나 움직임과 동작을 짜둬야 했다.
하지만 언데드 같은 경우에는 낭비 중의 낭비였다.
그냥 언데드를 불러오면 되는데 마법사가 무(無)에서부터 전부 짜올려야 한다니?
드는 마력부터 시작해서 거는 것까지 모두 난이도가 대폭 뛰는 비효율적인 방법 그 자체였다.
당연히 지금 쓰이는 방식도 아니었다. 이한이 괜히 ‘두 가지 아닙니까?’라고 한 게 아닌 것이다.
“콜록. 맞네.”
“요즘에 이렇게 소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없지. 콜록. 사실상 고대에나 썼던 방식이니까. 이 책에는 그 고대의 방식이 적혀 있네.”
“!”
이한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지금 쓰이지 않는 방식의 마법을 권하는 것도 놀라웠고, 그걸 왜 권하는지도 놀라웠다.
‘무슨 장점이 있... 잠깐. 지금 안 쓰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왜 제게?”
“콜록. 교장 선생님의 지시일세. 자네가 이 방법으로도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게 만들어달라고 신신당부하시더군.”
“......”
이한은 정색했다.
혹시라도 이한의 숨겨진 적성이나 마력 많은 체질 때문에 추천한 건 줄 알았는데...
“예. 뭐. 노력해보겠습니다.”
‘대충 넘겨야겠군.’
이미 흑마법은 충분히 성적을 관리하고 있었다.
저런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으로 언데드를 소환하는 마법까지 익히지 않아도 만점이 나오리라.
“콜록. 믿겠네. 자네라면 잘 익힐 수 있을 거야. 교장 선생님께서 매주마다 확인하라고 하시더군. 진도가 없으면 징벌방에 보내라고 하시던데 농담도 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