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이한은 황제 폐하의 오른팔이 되어 해골 교장을 지하 감옥에 넣는 상상을 하며 탑으로 돌아왔다.
‘으음.’
평범한 학생이라면 차라리 ‘때려죽여도 이거까지 공부는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저를 징벌방으로 보내십시오!’라고 했겠지만, 불운하게도 이한은 말도 안 되는 과제를 받아도 일단 할 수 있는 곳까지는 해보는 성격이었다.
본인만 모르고 있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성격.
‘으으음...’
이한은 개인실로 들어가 <고대 기초 사령술-진정한 언데드 소환에 대하여> 책을 훅훅 넘겼다.
고대 문자부터 시작해 각종 언어와 암호가 섞여 있긴 했지만 책 자체의 구성은 의외로 정석적이었다. 덕분에 무슨 내용의 책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니. 이 책의 2/3가 나한테 쓸모없는 내용이군.’
탁!
이한은 책을 덮고 놀랐다.
고대 기초 사령술 책은 모르툼 교수가 말한 세 번째 방법의 언데드 소환을 기초부터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이었다.
그냥 언데드를 소환하는 대신 시체에 강력한 마법을 걸어서 일으키는 방식.
요즘 잘 안 쓰이는 방식답게 난이도도 높고 마력 소모도 막대했다.
그런 만큼 책의 내용 중 1/3은 흑마법에 필요한 마력을 증폭시키는 방법들이었고, 나머지 1/3은 마법을 쓸 때 소모되는 마력을 절약하는 방법들이었다.
즉...
이걸 합한 책 내용의 2/3은 필요가 없었다.
‘양이 줄어서 좋긴 하군.’
이한 입장에서는 한숨 돌릴 일이었다.
지금 안 그래도 공부할 게 많은데 양을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아까 힐끗 보니 방법들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17년 된 무덤의 흙과, 11년 된 뼛가루를 섞어서 크랑텐 용액에 넣어 매일 세 번씩 마시면 마력이...
‘아 이래서 흑마법이 인기가 없군’싶은 수련 방법들.
이한은 오랜만에 마력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저런 걸 안 해도 되다니!
책의 남은 1/3 부분에는 실용적인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온갖 종류들의 시체와, 그 시체들로 네크로맨시를 펼쳤을 때의 특징들, 펼칠 때의 주의사항 등등.
기사의 시체는 뼈에 높은 순도의 마력을 품고 있어서 일으켜 세울 때 좋다. 기사들은 동료의 시체를 내주는 것에 쩨쩨한 자들이니, 매달 그믐달 때 주의가 허술할 때를 노려야 할 것이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개인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지?
‘누가 옛날 책 아니랄까봐 방법이 아주 막나가는군.’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이계에서 소환해내는 방식의 네크로맨시도 사용하는 시약이나 소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강력하고 영험한 존재의 뼈나 시체를 사용할수록 더 강한 이계의 존재들이 불려나오는 것이다.
하물며 시체를 100% 활용해 일으켜 세우는 방식의 네크로맨시는 시체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그러므로 마법사는 외투 안주머니, 허리띠의 주머니, 소매 주머니, 부츠 안쪽 등에 최소한의 뼛조각을 넣어 다니는 습관을 가져라. 만약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낭패하지 않도록. 시체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는 것이니...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
옛날 방식의 네크로맨시, 그러니까 고전적인 네크로맨시는 생각보다 확실한 장점들이 있었다.
소환해내는 방식의 네크로맨시는 불러낸 언데드를 강화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이계의 존재를 불러오는 만큼 마법사가 이런저런 강화를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차라리 더 강한 존재를 소환해내면 모를까.
그러나 직접 만들어내는 방식의 고전적인 네크로맨시는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강화할 수가 있었다.
예를 들어 뼈 무더기에 마법을 걸어 스켈레톤 전사의 형태로 싸우게 한다면, 뼈의 종류부터 시작해 각종 부여 마법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강화가 가능했다.
게다가 훨씬 더 튼튼했다.
소환해내는 방식의 네크로맨시는 한 번 타격을 입고 역소환되면 회복될 때까지 이계에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네크로맨시는 마법사가 마력만 되면 다시 지팡이를 휘둘러서 복구시키고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해골 교장이 왜 배우라고 한 건지는 알겠는데...’
장점들을 보니 왜 배우라고 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분노가 사라지진 않았다.
‘...나머지가 다 단점이잖아.’
막대한 마력 소모.
언데드 하나하나 손수 짜서 넣어야 하는 복잡한 마법 구조(막말로 언데드 하나당 아티팩트 하나씩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법사가 집중해서 개별로 명령을 내려줘야 하는 전술 운영까지.
물론 마법 수준이 높아지면 각종 방법으로 마력 소모도 줄이고, 마법도 좀 쉽게 걸 수 있고, 명령 내리는 것도 수월해진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입장벽이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스켈레톤 전사 소환>이... 4서클이군.’
말이 4서클이지 학교 밖에서 4서클 마법사면 ‘아이고 대마법사님’하고 잔뜩 치켜세우는 아부를 들을 마법사였다.
에인로가드에 뛰어난 마법사들이 너무 많아서 ‘4서클 마법 익혀 와라’같은 소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거지.
이한은 정말 새삼스럽게 분노했다.
‘볼라디 교수도 그렇고 해골 교장도 그렇고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한 2~3 서클 정도면 못 이기는 척 예습하는 셈치고 했을 텐데 4서클 마법들이 우르르 쌓이니 어이가 없었다.
이한은 한숨을 쉬며 모르툼 교수에게 받아온 뼛조각들을 꺼냈다.
“왼팔에 걸 수 있는 마법들은 다음과 같다... 부유, 회전, 포박, 타격...”
어쩌겠는가.
과제니까 해야지!
* * *
“워다나즈 왜 안 나와?”
주말인데도 아침만 간단하게 차려놓고 개인실에서 나오지 않는 워다나즈의 모습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당황스러워했다.
가이난도야 늦잠을 자든 방에서 언데드가 되든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한은 몇 시간만 보이지 않아도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구운 식빵 사이에 잼과 치즈, 훈제된 고기와 계란을 끼워 넣은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집어먹은 친구들은 그 때까지도 이한이 나오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네가 어제 워다나즈 화나게 한 거 아니야?”
“아, 아니야! 내가 물론 이한이 제안했지만 언데드 계에 가기 싫다고 하긴 했어. 그리고 이한이 공부해야 하는 거 많다는데 카드 게임을 하자고 귀찮게 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
“이런 쓰레기 새끼. 너 때문 맞잖아!”
“빨리 가서 사과해!”
“아... 아니라니까!”
가이난도는 투덜거리며 이한의 개인실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열렸다. 열고 들어와.
“이한. 저 자식들이 터무니없는 음해를... 으아아아아악! 이한이 교장한테 공격당하고 있다!”
“!!!”
“모두 이쪽으로 와! 워다나즈가 공격받고 있대!”
탑 내에서 언데드한테 공격받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학생들은 허겁지겁 달려왔다.
좀 잠잠하다 싶었더니 주말이라고 해골 교장이 이한의 개인실에 언데드 잠입조를 침투시킨 것이다.
정말로 비열한 수작이었다.
“바로 올라ㄱ...”
탁!
황녀는 냉정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고 친구들을 만류했다.
“어째서?!”
“무작정 바로 들어갔다가는 반격을 받으실 겁니다! 몸을 낮추고 계단을 낀 상태로 마법을 날리죠!”
추종자가 황녀의 뜻을 친구들에게 전해주었다.
나름 그럴듯하게 들려서 친구들은 계단 밑에서 몸을 낮추고 마법을 준비했다.
“워다나즈! 지금 도우러 간다!”
“지금!”
황녀가 가장 앞에서 달려 나오더니 매직 미사일을 시전했다.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마력덩어리가 빠르게 날아갔다.
캉!
그러나 공격은 물 방패에 막혔다. 이한은 넘어진 가이난도의 한쪽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들 멈춰라. 공격받는 거 아니다.”
“워... 워다나즈!!”
“...아니. 공격받고 있잖아!!”
친구들은 경악했다.
이한의 개인실을 스켈레톤 전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보낸 게 아니라 내가 일으켜 세운 거다. 아직 움직일 정도는 아니긴 한데...”
이한은 지팡이를 툭 쳤다. 스켈레톤 전사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군.’
* * *
<뼈다귀 손 소환 마법>이나 <뼈 구속구 소환 마법>을 이미 배운데다가, 각종 원소 변환과 통제에 이골이 난 이한이었다.
“뼈여. 쏘아져라.”
콱!
“뼈여. 갑옷의 형태가 되어라.”
콰득!
“뼈여. 벽이 되어라.”
콰드드득!
책에서 기초 훈련을 위해 제시하는, 뼈를 이용하는 단순 네크로맨시 마법들.
뼈를 여러 방식으로 형태 변환시키거나 발사하는 마법들이라 이한에게는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 쉬운데?’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염 원소를 다루면서 불이 옆으로 번질까봐 노심초사했던 걸 떠올려보면, 뼈는 정말로 쉬운 편이었다.
‘뼈가 원래 쉬운 편인가? 하긴 다른 원소들로 미리 연습을 한 상태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
모르툼 교수가 옆에 있었다면 ‘흑마법은 절대 쉬운 게 아니다 콜록 그냥 네 재능이 뛰어난 거다’라고 말해줬겠지만 개인실에는 이한밖에 없었다.
흑마법에 사용되는 암흑 원소나 음 에너지, 뼈나 독 같은 것들은 어려운 축에 들어가면 들어갔지 절대 쉬운 원소가 아니었다.
어디 가서 ‘화염 원소보다 뼈가 더 쉽죠’라는 말을 하면 ‘흑마법사답게 정신이 반쯤 나가셨군요’라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나와라.”
각종 기초 훈련을 통과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스켈레톤 소환 연습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기에 앞서 이한은 언데드 계에서 계약한 스켈레톤 전사를 불러왔다.
-■■■...
불려나온 스켈레톤 전사는 이한 앞에서 넙죽 엎드려 존경심을 표했다.
둘의 마력 차이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소환되어 있던 샤르칸은 하품을 하며 꼬리로 탁탁 바닥을 내리쳤다.
자기가 있는데 뭐 저런 하급 소환수를 불러내냐는 뜻!
“그래. 반갑다. 네 이름이 필요한데...”
-■■!
스켈레톤 전사는 지능이 낮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라서 거절했다.
감히 이름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다. 부를 이름이 필요하지. 넌... 고나달테스다.”
-■■■■...!
스켈레톤 전사는 황송해서 받을 수 없다는 듯이 부정했지만, 이한은 단호했다.
“고나달테스. 널 부른 이유는 내가 고전 네크로맨시를 연습하기 위해서다. 뼈와 시체들을 사용해 언데드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역시 옆에 교본이 있으면 좋겠지.”
아티팩트를 만들 때 이미 완성된 아티팩트를 보고 따라하면서 기초를 배우듯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스켈레톤 전사를 만들려면 완성된 스켈레톤 전사를 보고 따라하는 게 좋았다.
고나달테스, 아니 스켈레톤 전사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고맙다. 그러면 시작해볼까?”
세 시간 후.
이한은 인상을 찌푸린 채 의자에 앉아서 널브러진 뼈 무더기들을 노려보았다.
‘만만치 않군.’
스켈레톤 전사의 형태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금 더 어려운 방패와 갑옷이었으니까.
그러나 전사를 유연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콰직!
자동으로 활을 쏘게 만들려다가 또 하나의 스켈레톤 전사가 스스로 박살이 났다.
‘부서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는 것도 만만치 않군.’
그렇게 생각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여러 마리 세워 놓으면 되잖아?’
하나 부서지고 하나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여럿 일으켜 세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꽤 많은 마력이 소모되겠지만 그건 상관없었고, 소모되는 정신력과 집중력도...
‘물 구슬 수십 개 정도 가능했으니 스켈레톤 전사도 열댓 마리 정도는 일으켜 세울 수 있겠지. 안 되면 나중에 줄이면 되니까.’
* * *
“알겠지? 실패작들이라 별로 대단한 게 아니다.”
“...이한. 보통 마법사들은 혼자서 소환수를 열다섯 마리씩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는 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