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뭐야?”
“정신 차려, 머저리 새끼야!”
겔리악은 동료들의 거센 고함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 비싼 스크롤이 아무 효과가 없다니?
“시간 끌면 교수들이 온다! 빠르게 제압하고 길잡이 놈을 만나러 가야 해!”
“알고 있다. 움직여!”
겔리악과 동료들은 무기를 뽑아들었다.
동료들도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주는 건 자살행위란 걸 잘 알았던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진 마법사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가까이 붙는다!’
겔리악은 무기를 꼬나 쥔 채 땅을 박찼다. 몸속에서 솟구친 마력이 육체를 단단하게 강화시켰다.
현재 겔리악과 동료들은 투명화 아티팩트를 낀 상태였다.
흩어져서 최대한 빠르게 접근하면 마법사는 그들을 노리기 쉽지 않았다.
“샘솟아라.”
“!?”
겔리악은 마법사들의 임시 요새 위로 거대한 물 덩어리가 솟구치자 당황했다.
뭐지?
파아아앗-
물 덩어리가 갑자기 쪼개지면서 수많은 물 구슬로 비산했다.
그리고 물 구슬이 닥치는 대로 날아들었다.
‘뭐야?’
속도도, 궤도도 위협적이지 않은 하찮은 공격이었다. 동료 중 한 명은 같잖다는 듯이 팔뚝에 찬 건틀렛으로 물 구슬을 쳐냈다.
아무리 시간을 끌고 싶어도 그렇지 이런 어설픈 공격으로는 백전노장 모험가들의 발걸음을 묶을 수 없었다.
“번쩍여라!”
그 순간 번개가 날아들었다.
번갯불이 번쩍이며 땅 끝을 지지자 모험가는 당황해서 뒤로 펄쩍 뛰었다.
‘어떻게!?’
‘아티팩트가 무효화됐나?!’
그들이 갖고 있는 투명화 아티팩트들은 절대 싸구려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무효화 마법은 견디는 강력한 아티팩트였는데...?
“물을 피해라! 놈이 물로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겔리악은 경악했다.
저런 간단한 마법으로 투명화 아티팩트를 무효화시킬 줄이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 처음 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저런 식으로 물 구슬을 비산시켜서 흩뿌리는 마법사도 본 적이 없었고, 그 많은 물 구슬 중 몇 개의 궤도가 비틀린 걸 알아내는 마법사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번쩍여라, 번쩍여라, 번쩍여라, 번쩍여라!”
“크으으윽!”
방금 물 구슬과 부딪힌 모험가는 마법사에게 제대로 물린 모양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번개가 날아들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막아내고 있었지만 워낙 공격이 빨라서 막기 쉽지 않았다.
“도와줘, 개자식들아!”
“...쯧!”
다른 모험가 하나가 품속에서 플라스크를 꺼냈다. 플라스크 안에서는 화염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일류 연금술사들이 만든 <새끼 화염용 플라스크>였다.
겔리악은 슬슬 이번 의뢰가 성공해도 적자가 아닌가 위기감이 들었다.
빠르게 허공에 날아가는 플라스크.
그 순간 적 쪽에서 주문이 날아왔다.
“얼어붙어라!!”
콰직!
그 비싼 유리병이 허공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추락하는 모습을 본 모험가들의 눈이 뒤집혔다.
“저 마법사 놈이 진짜...!”
“저 자식 대체 뭐하는 놈이냐?!”
지금 상황만 아니었다면 모험가들은 진지하게 상대를 스카웃했을 것이다.
마법사라고 모든 상황에 완벽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법사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마법만 쓸 수 있었고, 자기가 대응할 수 있는 것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얼굴도 보이지 않는 마법사 놈은 마치 전부 예상이라도 한 것마냥 겔리악과 동료들이 꺼내는 모든 수를 다 막아내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저 정도 마법사라면 밖에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을 텐데...
“안 되겠다. 모두 방어를 포기하고 달려든다.”
“방어를 포기하고?!”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동료들은 멈칫했다.
그만큼 겔리악의 말이 무모했던 것이다.
마법사에게 접근하는 정석적인 방법은 최대한 들키지 않고, 흩어져서, 빠르게 접근하는 것.
물론 빠르게 접근하는 와중에도 방어를 풀어서는 안 됐다.
마법사의 광역기가 한 번 터지면 전사는 치명적이었으니까.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접근하되, 광역기가 터질 것을 대비해 온몸에 마력을 끌어올려서 방어를 굳혀놔야 했다.
이걸 풀면 그만큼 마력을 이동에 쏟아 부을 수 있으니 훨씬 빨라지긴 하겠지만...
“저 놈은 버려! 이러다 다 죽게 생겼다.”
“...달려라!”
“개자... 큭!”
마법사에게 물린 모험가 한 명이 결국 쓰러졌다.
수십 방이 넘는 번개가 날아들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진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 망설이던 동료들도 생각을 바꿨다.
저 정도 되는 마법사 상대로 더 시간을 줬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오늘 죽는 게 내가 아니기를.’
‘나 말고 다른 놈이 죽기를.’
“달려들어라!”
모험가들은 사나운 바람처럼 질주했다. 투명화 아티팩트에 쓸 마력도 아까웠는지 더 이상 모습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 * *
‘젠장. 들켰나.’
이한은 혀를 찼다.
모험가들은 이한을 정체 모를 대마법사로 여기고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한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리바운드로 쓰러진 상태.
각종 장벽들과 환상, 해골 전사들로 가리고 있었지만 모험가들이 가까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인질이 될 수 있었다.
‘허세가 통하는 줄 알았는데...’
이한을 5학년 학생으로 착각한 만큼 조금 더 허세를 부리면 상대방이 알아서 겁을 먹을 줄 알았다.
시간을 끌면 유리한 건 이한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주저함을 버리고 미친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당장 움직임만 봐도 검으로 맞붙었을 때 이한보다 약한 이들은 아니었다.
“스켈레톤 전사들, 움직여라! 고나달테스. 가라!”
이한은 겁먹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하는 것.
달그락!
스켈레톤 전사, 고나달테스는 다른 스켈레톤 전사들 사이로 달려 나가며 뼈 창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다른 스켈레톤 전사들도 일제히 뼈 창을 들어올렸다.
“?!”
팍!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모험가의 발이 본능적으로 멈췄다.
강력한 마법사의 언데드 소환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방어를 포기하고 전력으로 달려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젠장. 어느 정도로 강한 놈이지? 설마 물리 공격 면역은 아니겠지?’
장벽, 환상, 다급한 상황.
별 것 없어 보이는 스켈레톤 전사가 모험가에게는 강력한 언데드 소환수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한은 그 틈을 정확히 노렸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크아아악!”
모험가는 본능적으로 방패 아티팩트를 작동시키고 마력을 몸에 둘러서 강화시켰지만, 곧바로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막아서 될 게 아니었다.
피했어야 했다!
어찌나 벼락의 힘이 강했는지 방패 아티팩트가 찢겨나가고 몸을 그대로 태워버렸다. 모험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저...!?”
“쏘아져라!”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 하나를 분해시킨 다음 닥치는 대로 뼈 조각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사납게 난사되는 뼈 탄환에 접근하던 다른 모험가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망토여. 나를 삼켜라. 나는 밤에 숨노니!”
동시에 이한은 작게 주문을 외우고 투명화를 시전했다. 환상 마법이 남아 있는 상태라 모험가들은 순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이고 응축하여 폭발하라!”
쾅!!
마력 폭발 주문이 근거리에서 터져나가자 다른 모험가 하나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겔리악은 이제 동료 중 몇 명이 남았는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저 오늘 제대로 잘못 걸렸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저런 전투 마법사를 만나게 되다니.
상대보다 노련한 전투 마법사도 봤었고, 상대보다 고위의 마법을 쓰는 전투 마법사도 봤었지만, 이렇게 철벽같은 전투 마법사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냥 죽지는 않겠다.’
겔리악은 품속에서 물약을 꺼내 마셨다. 그러자 온몸의 감각과 마력이 미친듯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부작용이 어마어마한 <삼비르 광전사의 물약>이었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겔리악은 보이지 않는 마법사가 어디 있는지 확실히 느껴졌다.
시각을 속이고 청각을 속이고 후각을 속인다 하더라도 미세하게 달라지는 모래의 흔적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증폭된 마력이 검신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의 마법도 갈라버리는 마력의 결정체인 오러였다.
그걸 본 순간 이한은 일이 꼬였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가 핏발 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은 급하게 새벽별을 뽑아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미 상대가 먼저 도달한 뒤였다.
‘더 빠르게!’
살기 넘치는 위험을 앞에 두자 본능이 폭발했다. 이한의 검이 한 차례 빨라지며 겔리악과 충돌했다.
꽝!
마력과 마력의 충돌.
흑자석으로 이뤄진 검신이 겔리악의 마력을 빨아들였지만, 이미 반쯤 맛이 간 겔리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꽝!!
다시 충돌.
이한은 손아귀가 찢어져서 피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더 마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새벽별이 아무리 명검이라 하더라도 이한의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이한은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쉽게도 이한은 상대처럼 저런 고도의 기술을 보여주지 못했다.
날카롭게 정제된 상대 마력의 결정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식할 정도의 양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꽝!!!
아까와 차원이 다른 마력의 충돌에 주변이 뒤흔들리고 몇몇 소환수들이 사라졌다.
마력의 충돌로 인해 주변이 불안정해진 것이다.
그 여파는 투명화 마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순간 이한의 얼굴이 드러났다.
겔리악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5학년이 아니잖...? 컥.”
갑자기 겔리악은 검을 떨어뜨리더니 목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에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장 선생님!”
해골 교장은 아무런 대꾸 하나 없이 푸른 안광을 폭발시키며 저 멀리서 빠르게 날아왔다.
겔리악은 더듬거리며 반지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리고는 입에 털어 넣었다.
만일을 대비한 자살용 독약이었다.
‘뭐 이런 지독한...?’
이한은 숨통이 끊어진 겔리악의 모습에 경악했다.
방금까지 날뛰던 자가 해골 교장의 얼굴만 보고 자살을 선택하다니.
어딜 도망가느냐?
해골 교장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 순간 분명히 숨통이 끊어졌던 겔리악이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겔리악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믿기 힘들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무, 뭔...?”
이곳은 나의 영지. 영주의 허락이 없다면 죽음은 허용되지 않는다. 버러지 놈.
이한은 방금보다 더더욱 경악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에서 영혼이 흩어져야 하는 게 당연한 섭리인데, 이 마법학교의 땅은 그 섭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 놓다니.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 이건...”
마법 질문은 나중에 해라.
“아니. 마법 질문이 아니라 놈들의 동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길잡이와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겔리악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 상황에 저걸 들었다고?
해골 교장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침입자가 들어왔다. 학생들의 외출을 막고 쥐새끼를 찾아내라.
-예. 알겠습니다.
이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골 교장이 의아해했다.
왜 그러지?
“아니... 제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는데 너무 믿어주셔서...”
싸우다가 머리라도 맞은 거냐? 당연히 귀담아 들어야지. 설마 일학년의 말이라고 내가 의심이라도 할 줄 알았느냐?
“맞는 말씀이십니다.”
“...방금 뭐라고 했...”
너한테 입 열라고 하지 않았다.
해골 교장은 그대로 겔리악을 삼켜버렸다. 겔리악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