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하여간 흰 호랑이 탑 놈들은 가짜 소문을 너무 좋아한다니까.”
“미안하다. 이한.”
“됐다. 더르규 네 잘못이 아니지.”
이한과 더르규의 대화에, 옆에 서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입을 떡 벌리고 억울해했다.
아니...
아니...!
“아니 부유 방패 만드는 거 맞...”
“영구가 아닐 뿐 간이 아티팩트 만드는 거 맞...”
“아.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너희 거나 하라니까. 저기 모라디가 너희 노려보는 거 안 보이나?”
이한은 철이 없는 친구들을 타박했다.
모라디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이한이나 모라디 같은 사람들에게는 동질감이 있었다.
조별과제 상황이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조장을 맡게 되는 사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처럼 말이나 잘 들으면 조장의 스트레스도 덜했지만, 저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처럼 만들라는 도안은 안 만들고 가짜 소문이나 퍼뜨리고 있으면 조장은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부유 방패 만드는 거 맞으면서...”
“우리도 딱히 영구적인 것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꿍얼거리고 투덜거리면서 자기네 자리로 돌아갔다.
“이한. 그런데... 지속 시간도 늘려야 하지 않나?”
도안을 수정해나가던 더르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반영구적인 아티팩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런 간이 아티팩트에는 마법 지속 시간을 늘리는 장치나 마법진이 들어갔다.
마법사 개인의 힘으로 시전하는 부여 마법의 지속 시간은 짧았고 이걸 보충하려면 각종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기껏 만들었는데 20, 30분도 가지 않는 고물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래. 도안을 완성하면 그것도 추가로 준비해야지.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다. 발광 마법 정도면... 마력 증폭 마법진하고 마력 보존 마법진으로 충분하겠지. 필요한 재료는 하급 마석에, 광령묵, 여명 가루...”
‘대체 어떻게 바로 튀어나오는 거지?’
더르규는 아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심지어 이한은 지금 발광 방패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외운 것처럼 바로 튀어나온 것이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그... 바로 나오는 게 놀라워서.”
“그냥 운 좋게 아는 게 나온 거다.”
겸손처럼 들렸지만 이한은 진심이었다.
왜냐하면 저번에 강제로 마법 폭죽을 제작하면서 배우게 된 재료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더르규에게는 겸손처럼 보일 뿐이었다.
‘정말 대단하다.’
“이한. 네 부유하는 강철 방패에도 필요할 테니, 네가 쓸 재료도 넉넉하게 구해다주겠다.”
더르규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도움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괜찮다.”
“아니다. 네가 도와준 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니. 부유하는 강철 방패는 마력량 소모가 심해서 아까 말한 걸로는 안 돼. 다른 방법 새로 구해야 한다.”
이한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에 더르규는 살짝 당황했다.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아마 천재의 고뇌나 그런 게 분명했다.
이한이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재료를 구할 방법이 있나?”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더르규가 말하는 걸 보니 재료를 제법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그런 수완이?
“별 거 아니지. 잠시만 기다려봐라.”
더르규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소곤거린 뒤 비블레 버두스 교수에게 다가섰다.
“버두스 교수님. 간이 아티팩트를 제작하기 위해 재료가 필요한데,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
‘그, 그렇군. 교수한테...’
생각해보니 저게 엄청나게 이상한 방법은 아니었다.
사실 학생들이 모르는 게 있으면 교수한테 묻는 게 정상이었다.
에인로가드가 비정상이라 그렇지.
‘교수한테 묻는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는데. 버두스 교수가 대답을 해줄까?’
솔직히 궁금했다.
해골 교장이라면 절대 조언을 안 해줬겠지만 버두스 교수는 해줄 것 같기도 하고 안 해줄 것 같기도 하고...
“......”
“교수님?”
“......”
버두스 교수는 이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학생들이 옆에서 부르거나 말거나 사파이어로 만든 확대경을 들고서 자기가 만들고 있는 아티팩트에 몰두해있었던 것이다.
“교수님...?”
“어, 어떡하지?”
“...빛이여!”
이한은 바로 지팡이를 휘둘러 거대한 빛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다른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광량(光量)을 가진 빛의 구체가 눈앞에서 반짝이자 버두스 교수는 기겁해서 고개를 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교수님. 실수했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강의실에 있던 다른 탑 학생들은 모두 다 이한을 미친놈처럼 쳐다보았다.
아무리 교수가 말을 무시해도 그렇지 저런 대담한 짓이라니.
지젤도 이한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저 자식은 진짜 겁이란 게 없나?’
그러거나 말거나 버두스 교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집중하려고 했다.
정신을 퍼뜩 차린 더르규가 외쳤다.
“교수님!”
“뭐? 왜?”
“간이 아티팩트를 만들려고 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이 있습니다.”
“어? 어. 그래.”
버두스 교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빛이여!”
“뭐야!??”
“죄송합니다. 교수님. 실수했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교수님! 교수님! 교수님!!!”
더르규는 이한이 두 번째 만들어 준 기회까지 놓칠 수는 없다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외쳤다.
버두스 교수는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무례하게! 목소리를 왜 그렇게 높이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가 막혔다.
‘워다나즈는 당신 눈앞에서 빛 덩어리를 터뜨렸는데...!?’
‘무례함의 기준이 대체?!’
“필요한! 재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선량한 더르규라 하더라도 목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버두스 교수는 마침내 질문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그래. 그럴 거 같아서 준비해놨어.”
“예? 그게 정말입니까?”
끼어들지 않으려던 이한은 무심코 대답했다.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위치 알려주는 정도도 아니라 재료를 준비해놨다고?
뭐지?
혹시 변신한 르지 교수인가?
“그래. 정말이지.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재료 없이 뭘 만들어? 그것도 몰라?”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한은 저런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풋내기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달리 이한에게 저 정도 도발은 산들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참. 넌 뭐 만들 거야?”
“아직 고민 중...”
“이한은 부유하는 강철 방패를 만들려고 계획 중입니다. 교수님.”
“부유하는 강철 방패? 아주 제법인데? 재밌는 걸 잘 골랐어. 아주 기특해.”
1학년 학생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버두스 교수에게, 저 정도 칭찬은 극찬에 가까웠다.
대신 대답한 더르규는 자기가 다 뿌듯했다. 더르규는 친구를 보며 미소지었다.
“...??”
물론 이한의 인상은 시험 전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처럼 일그러져있었다.
‘젠장. 교수를 이용해서 주제를 바꿔볼까 했는데.’
“그래서 교수님. 재료는 어디서 가져가면 됩니까?”
이한은 필요한 재료도 챙기고 몇몇 재료들도 슬쩍 주머니에 넣을 겸 물었다.
“지금 몇 시지? 슬슬 올 때가 됐는데.”
“??”
“아. 왔나보네. 밖으로 가자.”
* * *
“?????!”
버두스 교수의 마탑 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마차를 타고 온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낯선 사람들도 학생들처럼 매우 어색해하고 있었다. 이한은 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외부에서 사람 불렀으면 데스 나이트들은 좀 치워야 하지 않나?’
데스 나이트들이 마차 옆에 바짝 붙어서 부담스럽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 마법사님. 이 데스 나이트... 들은... 왜 이러는... 겁니까?”
손님 중 한 명이 손수건으로 진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
“어? 아. 지금 마법학교에 침입자 있어서 경계 기간이야.”
“아, 아니! 그런 기간에 저희를 부르시면 어떡합니까!?!”
“왜? 오히려 더 안전하잖아.”
-우리들이 너희 상인들을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마라.
“...됐습니다. 그냥 빨리 처리하지요.”
마차를 타고 온 낯선 사람들은 알고 보니 버두스 교수가 밖에서 부른 상인들이었다.
뛰어난 부여 마법사들은 대부분 상인들과 친했다. 심지어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도 그랬다.
아무리 인성이 개떡 같아도 성 하나의 가격과 맞먹는 아티팩트를 만드는 마법사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이한이 나서자 상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리 학생이라지만 대귀족 가문 출신 같아 보이는데 이런 잡일을 돕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뭐하나? 빨리 와서 도와라.”
“...엥???”
“도우라고.”
“어... 아니... 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더듬거리면서 끌려왔다. 이한과 친구들은 수레에서 짐을 내렸다.
‘멍청한 놈들.’
이한은 지금 상인들의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하고 있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불쌍한 겉모습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동정심을 자극하면 뭐라도 뜯어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 만큼 싸가지 없게 멀뚱멀뚱 서있으면 안 됐다. 성실하고 예의바른 소년소녀들이 되어야 했다.
“그런 거지. 더르규.”
“...구, 구걸... 아닌가?”
“무슨! 그게 왜 구걸이지?”
“으. 으응...”
‘구걸 맞는 것 같은데.’
옆에서 돕던 지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실리적으로 봤을 때 뜯어내면 좋았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자기가 직접 꺼낼 수는 없었지만!
‘대체 워다나즈 저 자식은...’
“그런데 이 짐들은 대체 뭡니까?”
“마법사님께서 갖고 오라고 한 재료들입니다만?”
“아.”
“아하!”
학생들은 감동했다.
그래도 버두스 교수가 교수는 교수였다.
학생들을 위해 재료도 밖에서 주문해주다니.
이 정도면 에인로가드 상위 5%쯤 되는 교수였다.
‘놀랍군. 진짜 가짜 아닌가?’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마저 정리했다.
“다 했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젊은 마법사님들!”
상인들은 몇 번이고 고마워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코밑을 쓱 훔쳤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기사로서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을 돕는 것도 기사의 의무였지. 워다나즈 이 자식... 좋은 지적을 했어.”
“자. 그러면 마법사님. 값을 부탁드립니다.”
상인들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버두스 교수가 갑자기 부탁한 탓에 급히 모았지만, 그걸로 돈을 더 받을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손님이자 뛰어난 마법사 아닌가.
원가만 받아도 충분히 참아줄 수 있...
“난 돈 없는데?”
“...예?”
이한은 상인들의 목소리가 한 단계 내려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농담...이시죠?”
“농담 아닌데? 쟤네들이 낼 거야. 쟤네들이 쓸 재료거든.”
“아... 아하!”
상인들은 안도했다.
그런 뜻이었구나!
하긴 에인로가드 학생들이라면 다들 금화 주머니를 두세개씩 차고 다닐 만큼 부자이리라.
“젊은 마법사님들. 값을 부탁드립니다.”
“......”
“......”
그러나 학생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상인들은 불길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