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잘못 봤... 아니.”
지젤의 목소리가 떨렸다.
놀랍게도 쿠라레 도마뱀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지?’
쿠라레 도마뱀들은 영리한 몬스터였다.
마비시킨 먹잇감들이 많고 움직임이 둔한 놈들을 노리지, 굳이 위협적인 마법사를 쫓아올 이유가 없었다.
어째서...
-■■■! ■■■■!
-■■■■■!
도마뱀들은 아까보다 한층 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비독을 쏘아냈다.
철퍽! 철퍼덕!
누가 봐도 제대로 열이 받아서 독기가 오른 기색이었다.
“끈질긴 놈들 같으니... 뼈여, 쏘아져라! 쏘아져라! 쏘아져라!”
소나기처럼 퍼붓는 뼛조각들이 땅바닥을 갈기고 수풀을 헤집었다.
도마뱀들은 허겁지겁 피했다.
그리고 더욱 더 울부짖었다.
-■■■■■!!
“아.”
이한은 쿠라레 도마뱀들이 왜 약한 놈들을 내버려두고 둘을 쫓아오는지 알아차렸다.
지젤도 알아차렸다.
“...그거 좀 때렸다고 쫓아온다니.”
“내 말이.”
이한은 바로 동의했다.
지젤은 순간 욕하려다가 참았다. 같은 편과 싸워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워다나즈... 모라디...!”
“우릴 위해서...!”
다른 길로 후퇴하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먹먹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한과 지젤이 그들을 위해 희생한 거라고 오해하는 게 분명했다.
“개같이 멍청한 새끼들이 진짜...”
“뭐라고?”
“개의치 말고 후퇴하라는군!”
이한도 한 대 때리고 싶긴 했지만 참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중에 생색이나 내자 싶었던 것이다.
쿵!
도마뱀 하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돌격을 시도했다. 빠르게 날아드는 방패와 충돌한 도마뱀이 울부짖었다.
파파파파파팍!
이한은 가차 없이 단죄했다. 뼛조각 세례를 받은 도마뱀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옆으로 도망가 버렸다.
‘안 좋은데.’
이번 돌격은 막혔지만 몬스터 놈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도마뱀들이 동시에 달려들면 이한으로서도 막기 힘들어졌다.
다 쓰러지고 한 놈만 돌격에 성공해도 이쪽이 손해였으니...
지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쌍검을 뽑아들고 거칠게 외쳤다.
“워다나즈. 내가 시간을 번다! 마력 회복 언제 되지!?”
아무래도 지젤은 이한이 일시적으로 마력이 고갈됐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제까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잘만 패왔던 이한이 흑마법만 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마력 문제가 아니야!”
“뭐?”
“마력 문제가 아니라고. 밤을 새서 정밀한 컨트롤이 힘들어.”
“...이 정신나간... 큭!”
지젤은 달려드는 도마뱀의 아가리를 강하게 찌르고 뒤로 물러섰다.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대체 왜 밤을 샌 거지?!”
산을 타는 건 막대한 체력 소모가 일어나는 일.
대체 왜 그걸 앞두고 밤을 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워다나즈가 흰 호랑이 탑 학생도 아니고...
“과제가 너무 많아서.”
“......”
지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는, 상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강가로 와라.
“?!”
갑자기 들리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둘은 놀랐다.
-강가로 와라. 저 도마뱀들은 여기 냇물을 싫어하니 쫓아오지 않을 거다.
누가 말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한과 지젤은 바로 방향을 돌려 강가로 향했다.
지금 상황이라면 더 이상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 ■■■...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리까지 강물에 담그자, 놀랍게도 쫓아오던 도마뱀들이 분한듯 노려보기만 하며 멈춰 섰다.
지젤이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말했다.
“저게 보여? 도마뱀 놈들이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워다나즈? ...워다나즈!”
지젤은 이한이 앞으로 쓰러지는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마비독?!’
분명히 도마뱀들의 공격은 맞지 않았는데 어째서?
-피곤해서 쓰러진 거군.
“...네?”
-피곤해서 쓰러진 거라고. 신입생인가? 보통 신입생들은 피곤해서 쓰러질 때까지 공부하진 않을 텐데. 신기하군.
“......”
* * *
이한이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본 건 공중에 떠있는 방패였다.
‘어디지?’
푹신푹신한 짐승의 가죽위에 누워 있는 걸 보니 길바닥이 아니라 어디 오두막 같은 곳에 들어온 게 분명했다.
시선을 돌리자 모라디가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이한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물건부터 확인했다.
‘음. 아무것도 안 가져갔군.’
-잃어버린 게 있을까봐 그런가? 잃어버린 건 없다.
“!”
이한은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거인이 동굴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모라디와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디는 양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올려놓고 탁자 위에 뚫어져라 시선을 던졌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이한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무슨 상황이지?’
거인이 적대적인 것 같지 않자 이한은 일어서서 다가갔다.
놀랍게도 둘 사이에 놓인 건 체스판이었다.
‘엔드게임이군.’
이한은 판 위에 펼쳐진 기물들과 배치를 보고 게임이 후반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모라디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슬슬 두지 그러나? 더 고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오프닝에서는 실수를 해도 미들게임에서 회복이 가능하지. 미들게임에서는 실수를 해도 엔드게임에서 만회가 가능하고. 하지만 엔드게임에서는 그 뒤가 없어.
‘음. 다른 건 몰라도 체스 둘 때 상대 기분 나쁘게 하는 데에 재주가 있으시군.’
제대로 통했는지 지젤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지젤은 흰색 킹을 옆으로 눕혔다. 졌다는 뜻이었다.
“...졌습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도록. 세상에는 멍청한 거인만 있는 게 아니니까.
거인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지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한은 상대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멍청하기로 소문난 거인한테 마법사가 체스로 지다니.
아마 가이난도한테 체스로 지면 저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어렵지 않지.
거인은 자신이 이 주변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는지, 그리고 가끔가다 마법학교 학생들이나 교수들을 만나면 소소한 대화나 내기를 즐겼다고 말해줬다.
“저, 그런데...”
-혹시 내 거인답지 않은 지성의 근원이 궁금한 건가?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궁금할 수 있지. 하지만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하지 못할 것 같군. 이렇게 생각해보도록. 사람들 중에서도 유난히 멍청한 사람은 있지 않나?
거인은 확실히 논리적이었다. 이한은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래. 이해해주니 고맙군.
“...그런데 왜 체스를?”
질문을 듣자 거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기를 좋아한다고 했잖나.
“이 와중에 내기를?”
이한은 모라디의 탐욕에 경악했다.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지젤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네가 쓰러져서 둔 거잖아, 개자식아!”
거인의 말에 따르면, 거인은 지나가는 사람한테 말을 걸지언정 억지로 내기를 시도하진 않았다.
하지만 빚이나 은혜가 사이에 놓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쓰러진 이한을 거인의 동굴로 데리고 와서 간호를 해줬으니, 마법사들도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해줘야 한다는 게 거인의 논리였다.
“무슨 보답 말입니까?”
-몇 가지 있지.
거인은 벽을 툭툭 쳤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는 목록들이 있었다.
-내기에서 진 마법사들에게 시킬 일
1. 동굴 지하실 대청소(기한 지난 물약들 꼭 다 버리고 라벨을 새로 붙여야 함)
2. 장서 보관고 정리(아무래도) 책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것 같음
3....
-이 중 하나를 골라서 해주면, 서로 남은 빚은 없게 되겠지.
이한은 목록을 다시 훑어보았다.
얼핏 보면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았지만, 이한은 교수들이 내미는 간단한 ‘할 일 목록’들 속에 얼마나 지독한 흉계가 숨어 있는지 잘 알았다.
‘지하실 넓이가 동굴보다 클 가능성이 있다. 장서 보관고도 마찬가지고.’
-이게 싫으면 나와 내기로 승부해도 되고.
“내기라... 혹시 마력량 승부 같은 것도 됩니까?”
이한은 슬쩍 물었다.
그러자 거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기는 서로 공평해야지. 나한테만 유리한 내기에 무슨 재미가 있겠나. 마찬가지로 힘으로 하는 내기도 받지 않아.
“아니... 괜찮은데...”
-원하는 내기가 있다면 꺼내보게. 공평하다면 받아줄 테니.
‘마력량 승부가 좋은데.’
이한은 혀를 찼다.
거인의 쓸데없는 배려 때문에 일이 귀찮아졌다.
‘모라디가 왜 체스를 골랐는지 알겠군.’
생각보다 거인이 만만치 않았다.
학생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경험이나 지식도 더 많을 테고, 얼핏 보여주는 현명한 모습을 봤을 때 지혜로도 더 뛰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한은 체스판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거인의 실력이 짐작 가능한 게 체스긴 했다.
문제는 체스에 자신이 없다는 것.
이한은 본인이 체스에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법학교에 들어와서 몇몇 상대를 이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못 둬서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 교수와 한창 둘 때 전적도 형편없었고...
“잠깐 상의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모라디. 모라디.”
“왜.”
“여기서 왜 룩을 움직였지? 그냥 3선에 고정시켜놓고 킹만 움직여서 체크를 피하면 무승부로 갈 수 있었을 텐데.”
“......”
원래 틀린 지적보다 맞는 지적이 더 짜증날 때가 있었다.
지금 이한이 바로 그랬다.
“왜 움직였지?”
“닥쳐. 좀.”
“실수였나? 그렇군. 혹시 저 거인이 어떤 오프닝을 뒀지?”
-체스로 다시 도전할 생각인가? 나쁘지 않지. 하지만 잘 생각하는 게 좋겠군. 후회할 수도 있으니.
“공평하게 하기 위해 기물 한두개 정도는 빼고 두시겠습니까?”
-서로 실력을 모르니 그럴 순 없지. 대신 친구한테 듣는 건 허락해주지.
거인은 느긋한 자세로 앉아 기다렸다.
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만만한 모습에, 이한은 갑자기 긴장되는 걸 느꼈다.
‘젠장. 들어보니 상당히 공격적인 스타일인데. 무승부를 따낼 수 있을까?’
이한이 노리는 건 기본적으로 무승부였다.
운이 따라서 이기면 좋겠지만, 안 될 경우 무승부를 노려서 다음 내기로.
‘모라디한테 들은 실력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상대가 실력을 숨겼을 경우.
이한은 제발 상대가 예상 안의 실력을 가졌기를 빌었다.
* * *
30분 후.
이한은 경악했다.
“...아니...”
-끄으으응...
“...끝난 것 같습니다만.”
-잠깐만. 5분만 시간을.
“아니. 끝났잖습니까. 여기서 옮겨도 나이트가 막고 있고, 이쪽으로 옮겨도 폰이 막고 있습니다.”
-...잠깐만. 그래도 5분만.
“......”
거인의 체스 실력은 생각보다...
...매우 약했던 것이다.
이한이 단단하게 틀어막고 버티자 거인은 억지로 공격을 시도하다가 허무하게 자멸했다.
이한은 지젤을 쳐다보았다.
‘그냥 모라디가 못 두는 거였군.’
‘왠지 기분이 불쾌한데...?’
-졌군. 졌어.
거인은 킹을 눕히며 인정했다.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 가봐도?”
-아니지.
“?”
-방금 이쪽 친구의 패배를 갚은 거잖나. 구해준 은혜가 남아 있는 거지.
“...혹시 마법학교의 교수로 일하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상대의 양심 없음에, 이한의 입에서 무심코 질문이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