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아차. 내가 무슨 실수를.’
이한은 대답하고서 후회했다.
피곤이 아직 덜 풀렸는지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온 것이다.
교수로 일한 적 있냐니.
이런 모욕적인 말을...
-내가 그 정도로 현명하진 않지.
거인은 살짝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다행히 별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체스 한 판 더 두시겠습니까?”
상대가 좀 교수 같아도 어쩌겠는가.
구해준 은혜가 있는 만큼 이한은 상대가 조금 억지를 부려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좀 많이 강해보이기도 했고.
-아니. 내기는 서로 공평해야지.
“체스만큼 공평한 게임이 또 어딨다고...”
거인은 이한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다른 내기를 찾아봐야겠군. 뭐가 좋을까.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이한은 지젤에게 속삭였다. 지젤도 동의한다는 듯이 작게 끄덕였다.
“제압할 방법은 없고?”
“모라디. 저 덩치가 안 보이나?”
이한은 어이없어했다.
저렇게 강력한 거인을 제압할 방법이 있냐고 묻다니.
그냥 죽으라고 하지?
“서리거인의 왕은 더 컸는데 덤벼들었잖아.”
“...그러게 넌 아까 왜 룩을 움직였어?”
말문이 막힌 이한은 비겁하게 화제를 돌렸다. 치사한 공격에 지젤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뭐가 좋을까... 격구는 숫자가 맞지 않고, 수수께끼는 저번에 했었고... 술 마시기 대결은...
지젤은 가만히 듣다가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내기는 공평해야 한다면서 술 마시기 대결 같은 게 어떻게 공평한 대결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많이 마시는 걸로 승부하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연금술사들이라면 자주들 하는 내기일 텐데, 하긴 아직 일학년인 만큼 알지 못하겠군.
거인은 술 마시기 대결이 무슨 내기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대결이 시작되면, 연금술사들은 각종 재료와 물약들을 사용해 상대가 마실 술을 직접 만들어 건네줬다.
받은 연금술사는 이 술을 마신 다음 자기가 새 술을 만들어 다시 상대에게 건네줘야 했다.
-그렇게 하다가 먼저 쓰러지면 패배인 거지.
“...잠깐. 술이 아니라 물약이잖습니까?”
설명을 듣던 이한은 멈칫했다.
재료와 물약들을 사용해서 만들면 결국 물약 아닌가?
-그렇지? 비유잖나. 그리고 말했듯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 받지 않아도 괜찮아.
“어... 아닙니다. 들어보니 제법 할만한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
거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사실 이한 옆에 있는 학생의 말처럼 이 대결은 거인에게 유리했다.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도 물약에 대한 내성이 강한 편이었지만, 거인은 그보다 더 선천적으로 강한 내성을 갖고 있었으니까.
-다시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아닙니다. 제가 이래보여도 연금술 강의에서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
-......
지젤과 거인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이한을 보았다.
‘워다나즈 이 자식... 혹시 아직 잠에서 덜 깼나?’
-음. 1학년 강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고 연금술의 모든 걸 배운 건 아닐 텐데.
거인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이한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저항력으로 승부하면 절대 내가 밀리진 않는다.’
이제까지 몇 번 경험해 본 만큼 이한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막대한 마력은 곧 막대한 저항력.
하지만 이걸 상대에게 들킨다면 내기 종목이 바뀔 수도 있었다. 이한은 최대한 멍청한 1학년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가이난도를 떠올리는 거다.’
“저 같은 천재는 1학년 강의만 들어도 거의 모든 걸 알 수 있습니다. 공부는 무엇하러 합니까.”
“......”
-...그, 그래. 그렇군. 알겠어. 그래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불리한 내기니... 만약 이긴다면 보상을 하나 더 주도록 하지. 내 집에서 원하는 걸 하나 가지고 가도 좋아.
“!”
이한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좋은 건 아니군.’
처음 들었을 때는 ‘어?’싶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어...’싶었다.
거인의 집이 생각보다 검소하고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녹슨 대형 무기 같은 걸 이한이 낑낑대며 가지고 가봤자...
“야.”
지젤은 참다못해 이한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최대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이한은 사정을 말해주려다가 거인이 혹시 들을까봐 참았다.
“모라디. 내가 누구냐? 나는 다른 천재들과 수준이 다른 천재다.”
“......”
지젤은 환장할 것 같았다.
* * *
거인은 확실히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난장판과 잡동사니 무더기를 뒤적거리면서 무언가 닥치는 대로 꺼내고 붓고 하는데 동작에 막힘이 없었다.
가이난도의 개인실이 쓰레기장 같아보여도 가이난도 본인에게는 나름의 질서가 있는 것처럼, 거인의 동굴도 그런 게 분명했다.
물론 이런 점은 다 이한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무슨 재료가 있는지 다 알고 있는 연금술사와, 낯선 장소에서 급히 만들어야 하는 연금술사.
어느 누가 유리할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버리고 갈까.’
지젤은 조용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워다나즈가 이길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하는 꼬라지가 매우 불안...
쿵!
-다 됐군! 난 이걸 <거인의 벌꿀술>이라고 부르지.
1시간 걸려서 거인이 마침내 물약을 완성했다.
“제조법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한은 이 와중에 나중에 쓸 일이 있을까 싶어 질문을 던졌다. 지젤의 어이는 더 이상 사라질 분량도 남지 않았다.
-다는 말해주지 못하지만, 간단하게는 말해주지. 벌꿀과 장미 꽃잎. 수면초와 쌍두사(雙頭蛇)의 피. 산성 늪지대의 진흙. 이 정도만 들어도 대충 감이 오겠지?
“...아. 예.”
아무리 봐도 술과는 거리가 먼 독극물들에 이한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이쯤이면 <거인의 벌꿀술>이 아니라 <거인의 사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믿는다.’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커다란 잔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놀랍게도 벌꿀술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어떤 식으로 조합을 했는지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동시에 막대한 졸음이 몸속에서 용솟음치듯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
이제까지 경험했던 상태 이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전의 상태 이상들은 이한이 의식하기도 전에 무효화가 됐었는데...
‘그렇군. 물약은 직접 마셨으니...!’
당연히 외부 공격의 힘보다 직접 마신 물약의 힘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한은 정신을 집중하고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거대한 마력의 폭류가 벌꿀술이 불러온 졸음을 억누르고 불씨를 꺼뜨렸다.
한 번.
두 번.
세...
‘어? 끝났나?’
긴장했던 이한은 벌꿀술의 영향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살짝 당황했다.
갑자기 확 올라오길래 긴장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끝난 것이다.
‘으음. 겁먹어서 손해 본 기분이군.’
아마 초반 효과에 모든 걸 건 물약이 분명했다. 그걸 넘기면 효과가 그리 강하지 않은.
이한은 그렇게 거인이 알면 굴욕의 눈물을 흘릴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차례입니다.”
-......
거인은 눈만 끔뻑거리며 이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무 당황해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정도였다.
‘어떻게!?’
믿기지가 않았다.
직접 만든 <거인의 벌꿀술>을 마시고도 저렇게 멀쩡하다니.
저 학생이 무슨 언데드거나 드래곤 정도의 마력을 갖고 있는 마법사도 아닐 테고...
말이 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미리 <거인의 벌꿀술>을 견딜 수 있는 해독약을 만들어서 마신 것이다.
‘마법학교 학생들의 수준이 이렇게 높아졌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그것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고작 1학년 학생이 처음 보는 물약을 보고 바로 역으로 해독약을 준비하다니. 그것도 자기 공방이 아닌 낯선 자리에서.
거인은 이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닙니다. 제가 이래보여도 연금술 강의에서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저 같은 천재는 1학년 강의만 들어도 거의 모든 걸 알 수 있습니다. 공부는 무엇하러 합니까.
처음에는 아직 어린 학생의 치기 어린 말인 줄 알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만함도 결과로 증명한다면 그건 오만함이 아니라 합당한 자신감 아닌가.
설마, 이제까지 본 연금술사들 중 가장 뛰어난 천ㅈ...
“다 됐습니다.”
-뭐!?
“뭐!?”
거인은 물론이고 지젤까지 경악했다.
한 십 분도 안 쓴 것 같은데 벌써 완성했다고?
“워다나즈. 불만 있으면 말로 해! 내 탑 놈들처럼 멍청하게 굴지 말라고! 안 그래도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지젤은 결국 폭발해서 멱살을 잡았다. 그 모습에 이한은 생각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주나보군.’
-이미 선언했으니 돌이킬 순 없지. 이 술의 이름은 뭐지?
“어... 거인을 잠재우는 약 정도 될 것 같습니다만.”
-정직한 이름이군. 어디 한 번 마셔볼까.
거인은 자신만만하게 웃더니 솥을 통째로 들이켰다.
그리고는 표정이 변했다.
-...!!!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최대한 저항하고 있었지만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 거라고.
거인은 비틀거리면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런 천재였을 줄은...! 네... 이름이...?
“모라디입니다.”
“나 말고. 너 물은 거잖아.”
지젤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피로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아차. 그랬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입니다.”
-그... 렇군. 나는 이쿠루샤. 거인 이쿠루샤다.
아까 이한이 이름을 물어봤을 때, 거인은 슬쩍 말을 돌렸다.
원래 거인은 인정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마법사의 자존심을 배려해서 화제를 바꿨던 거였지만...
...이 정도의 천재라면 이름을 알 자격이 있었다.
-...네... 승리다... 원하는 걸... 하나... 가지고... 가도록.
쿵!
동굴을 뒤흔드는 코고는 소리와 함께, 이쿠루샤는 뒤로 쓰러졌다.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바트렉.”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은신처에서 열심히 만들던 거인 잠재우는 비약.
학생들이 제대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었지만, 혹시라도 효과가 없을까봐 긴장했었던 것이다.
“바크 가문의 바트렉? 그 이름이 지금 왜 나오는 거지?”
“그 친구가 만든 물약이거든.”
이한은 품속에서 물약병을 꺼내서 흔들며 대답했다.
“...!!!!”
지젤은 방금까지 ‘십 분도 안 되서 이런 강력한 물약을 만들다니, 저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재능이다!’라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욕했다.
저런 사기꾼 같은...!
“아. 미리 설명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쿠루샤 씨가 듣고 내기 종목을 바꿀까봐.”
“...나가기나 하자.”
지젤은 이제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잠깐.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보상은 가지고 가자고.”
“탐이 나는 게 있었...?”
지젤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 난장판에 쓸만한 보물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서걱!
이한은 잠자고 있는 거인의 머리털 끝을 살짝 잘라냈다.
아까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로 기말고사 하나 끝났군.”
“넌... 진짜 나보다 미친놈이야...”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