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둘이 거인의 동굴을 빠져나오자 벌써 캄캄한 밤하늘 위로 새벽별이 뜨고 있었다.
이한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과제해야 하는데 시간을 쓸데없이 날렸군.”
“......”
지젤은 워다나즈가 보여주는 잔잔한 광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 상황에서 과제 걱정부터 하다니.
마법학교에서 수석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이 정도는 미쳐있어야 하는 건가?
“왜 그렇게 쳐다보지? 난 괜찮은데.”
이한은 지젤의 시선을 눈치채고 대답했다.
물론 부여 마법 과제 때문에 밤을 새긴 했지만, 어느 정도 자고 난 덕분에 회복된 것이다.
원래 배우는 학생들은 밤을 새도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어야 했다. 이한은 그런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였다.
“그래... 괜찮은 거, 아주 잘 알겠네.”
“걱정해줘서 고맙군.”
툭-
“...방패 좀 치우지?”
이한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방패가 날아오자 지젤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미안하군. 지속 시간을 확인해야 해서.”
지젤은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지금 산맥을 돌아다니고, 거대 도마뱀들의 습격을 받고, 거인과 대결을 하는 와중에도 마법 과제를 신경쓰고 있었단 것 아닌가.
‘마법에 미친 새끼 같으니...’
-워다나즈!!
-모라디!!!
어느 정도 걸어 나오자 저 멀리서 일렁이는 횃불과 함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고함이 들렸다.
이 주변을 아직도 수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다!”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달려왔다. 먼지투성이에 온갖 들풀이 달라붙은 겉모습을 보니 내내 수색을 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있던 더르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군. 다들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찾고 있었다.”
“고맙다.”
“고맙긴 무슨. 너희 둘이 해준 게 얼만데.”
“음.”
“으음.”
이한과 지젤은 동시에 신음했다.
사실 다른 친구들을 미끼로 삼아서 빠져나가려고 한 거였지만...
“귀족이라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지.”
“기사라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지.”
“역시...!”
자리에 모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동시에 감탄을 터뜨렸다.
모라디야 그렇다 치더라도, 워다나즈도 확실히 이럴 때 보면 리더로서의 품격이 있었다.
물론 수틀리면 각종 사악한 마법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비열한 대마법사긴 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적당히 수습이 되자 지젤은 친구들을 보며 물었다.
“잠깐. 몇 명이나 다 나와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대충 둘러봐도 아까 일행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까지 다 나온 것 같았다.
“아. 돕겠다고 그래서. 잘했지?”
“......”
공부 좀 해...!
지젤은 끓어오르는 말을 속으로 가라앉혔다.
“...응. 고맙네. 다들.”
“저기 더 있는 것 같은데.”
이한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횃불들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아하니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전부가 수색에 참여한 모양이었다.
참으로 뜨거운 우정이었다.
“다들 착하군.”
“ 닥쳐...”
* * *
“난 오늘 나온 검은 빵 2개하고 이 초콜릿 푸딩을 건다.”
“뭐... 뭐라고? 정말이냐?”
“왜. 겁이라도 먹었나?”
“겁이라니... 감히! 좋아. 워다나즈가 오늘 저녁에 줄 간식을 걸지! 저 방패는 오늘 안에 끝날 거야!”
“흥. 내일까지 간다!”
“......”
탑에 돌아와서 앉아 있던 이한은 친구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빙글빙글 도는 방패가 언제까지 버틸까’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치열하게 내기를 걸고 있었다.
이미 하루는 확실히 넘었고, 이제 친구들의 관심사는 2일을 돌파하느냐 안 돌파하느냐였다.
“말도... 말도 안 돼...! 내가 책에서 봤는데 별도의 작업을 안 하면 절대 하루 못 간다고 나와 있었다고!”
가이난도는 책을 흔들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모처럼 공부했는데, 지식이 본인을 배반한 것이다.
“공부... 공부는 다 필요 없어! 이런 죽은 글자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
“헛소리 하지 말고 앉아라.”
“응.”
이한의 경고에 가이난도는 다시 앉았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과제는 오늘 안에 끝내놓는 게 좋을 거야. 다른 기말 전 과제들이 많으니까. 지금 해야 하는 게, 밀레이 교수님 과제하고...”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날 괴롭히는 건데?”
과제를 읊어주자 가이난도는 진지하게 억울하고 서러워했다.
이한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른 과제가 뭐 있지?”
“<기초 음악>에서 노래를 하나 지어가야 하고...”
‘별 과제가 다 있군.’
이한은 <기초 음악>을 듣지 않았다. 필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초 음악>은 푸른 용의 탑에서 상당히 인기가 좋은 강의였다.
대귀족 가문 출신들에게 음악, 춤, 예술, 문학 등 이런 교양들은 생각보다 커다란 가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한에게는 볼라디 교수의 강의보다 가치가 낮은 강의였지만...
“난 대충 다 지었지.”
옆에서 지나가던 아산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가이난도가 놀랐다.
“벌써? 어떻게?”
“후후. 내가 왜 너한테 알려줘야 하지?”
“궁금한데 들려줄 수 있나?”
“워다나즈가 물어본다면야...”
“야...”
가이난도가 으르렁거렸지만 아산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매일 간식을 주는 친구와 매일 간식을 훔치려는 친구는 대접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인로가드. 에인로가드. 너무 좋다네.”
“......”
“......”
이한과 가이난도의 표정이 뒤틀렸다.
“따뜻한 식사와 푹신한 침대가 있는 곳. 에인로가드.”
“어...”
“가짜 소문 퍼뜨려도 되나?”
“후배들도 곧 들어와서 이 천국을 즐기겠지. 에인로가드.”
가사를 흥얼거리던 아산이 멈추더니 설명했다.
“그렇다고 교수님 앞에서 에인로가드 욕을 할 순 없잖아?”
“그렇긴 하지.”
이한은 아산의 마음을 이해했다.
가끔 성적은 진실보다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저런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만들어야 해?! 나도 그러면 내 마음대로 만든다!”
“뭘 만드려고?”
“한 존귀한 황자가 있었다네...”
“작작 해라.”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듣고 말해!”
“다들 <기초 음악> 과제 하시고 계십니까?”
키락 가문의 네블렌이 셋의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 빼고 설마 다 <기초 음악> 듣나?’
“그렇지. 키락 너도 지었어? 넌 보나마나 황녀님 찬양하는 노래 지었겠지.”
네블렌은 푸른 용의 탑에서 황녀를 추종하는 학생 중 하나였다.
그러나 네블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래? 뭘 지었길래?”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니, 이제 공부나 좀...”
이한은 말리려고 했지만 다른 둘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식사를 차려주는 명예로운 마법사가 있었다네...”
“......”
“......”
“감동적인데?”
아산은 감탄했다.
벽난로 앞에 앉아 있던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난도는 툴툴거렸다.
“흥. 저런 식으로 멋대로 찬양하는 걸 워다나즈가 좋아할 것 같아?”
“잘 말했다. 가이난도. 노래가 별로군.”
“아니... 어떤 점이 별로시길래?”
네블렌은 당황했다.
당연히 이한이 좋아할 줄 알았던 것이다.
“별로라고 하시면 새로 짓겠습니다만...”
“...잠깐.”
이한은 차마 그러라고 하지는 못했다.
과제를 새로 시작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습니까?”
“그래. 이제 공부나 하자고.”
“워다나즈! 저길 봐! 저기!”
“...공부하라는 말이 안 들렸냐?”
이한의 말에도 불구하고 가이난도는 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가리켰다.
이한은 한숨을 참고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경악했다.
“...!!”
마법학교 부지 내에서도 가장 커다랗고 위엄찬 본관 건물.
그 본관 건물의 외형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슨...!?’
재배치 기간이라서 그렇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창문 위로 훅 떠오르는 거대한 해골의 모습에 학생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한은 놀라지 않고 물었다.
“재배치 기간이라니요?”
본관은 사실상 반쯤 살아 있다고 봐야지.
해골 교장의 말에 따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안에 마법이 쌓인 본관 건물은 이제 평범한 건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에인로가드를 오고 간 수많은 마법사들이 새로운 공간을 추가하고 새로운 마법을 시전한 만큼 본관 건물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몸을 재배치하곤 했다.
온갖 무질서와 혼돈을 비교적 재정비하는 것이다.
“어... 잠깐. 그러면 안의 배치도 바뀝니까?”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듣다가 깜짝 놀랐다.
기껏 지도를 만들어놨는데?
그렇게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뼈대는 남거든. 다만 여기 있어야 할 방이 사라졌거나 하는 일 정도는 생기겠지.
“그나마 다행입니다.”
밤산책 나갈 때 조심해라. 재배치 기간에 돌아다니다가 실종된 학생들이 몇 명 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밤에는 외출 금지잖습니까. 저는 규칙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
친구들은 물론이고 해골 교장까지 그 뻔뻔함에 살짝 감탄했다.
그... 그래. 알겠다. 나와라.
“예?”
주말마다 오고닌에게 환상 마법 배우기로 했었잖느냐.
“아...”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그제야 기억이 돌아왔다.
지금은 실력이 좀 녹슬었어도 전성기 때 굉장했던 대마법사, 오고닌은 환상 마법사들 중에서도 순수한 고전주의 환상 마법의 계보를 이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배울 기회를 받은 것이니만큼 해골 교장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했었지만...
“그런데 제가 지금 기말 전 과제 때문에 바쁩니다만.”
괜찮다.
“아. 오래 안 걸립니까?”
이한은 반색했다.
하긴 해골 교장도 이 학교의 장인데 학사일정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아니. 그건 나도 모르고. 기말 전 과제는 네가 하는 거니까 괜찮다는 거였지. 나와라.
“......”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가이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악한 리치에 대한 노래를 써야겠어.’
* * *
이쿠루샤를 만났다고?
“...아니. 혹시 에인로가드에 제가 모르는 게시판 같은 게 있습니까?”
이한은 당황했다.
교수들이나 부지 내에서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게시판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전파속도가 말이 되지 않았다.
이한은 교수 휴게실 게시판에 볼라디 교수가 <기말 전 과제 내용 설명 바람>이라고 쓰여진 종이를 붙이는 걸 상상해보았다.
‘휴게실에 잠입해서 게시판을 파괴해야 하나?’
그런 건 없다. 하지만 재밌는 생각이긴 하군.
“아니...”
그리고 이쿠루샤는 원래 알던 사이다. 찾아갔는데 갑자기 네 칭찬을 하길래 물어본 거지.
마법학교 부지 내에는 교수나 학생들만 있지 않았다.
그 강력한 마력의 흐름 덕분에 예전부터 오랫동안 살고 있던 신비한 존재들도 많았다.
원래 그 덩치가 다른 학생 칭찬, 특히 연금술 칭찬은 더더욱 잘 안 하는 편인데... 혹시 마력으로 사기친 거 아니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정당한 내기였습니다.”
그랬겠지. 흐음... 그런데 내성이야 그렇다쳐도 이쿠루샤를 쓰러뜨린 건 신기하군. 그런 물약을 알고 있을 줄이야... 우레걸음 교수가 가르쳐줬나?
“제가 연금술을 배웠으니 따지고 보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관둬라. 그나저나 연금술도 연금술인데, 체스를 정말 잘 두는 모양이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이쿠루샤 씨께서 좀 서투르셔서...”
???
해골 교장은 이한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이한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