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왜? 워다나즈한테 전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 아니다.”
살코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오고닌이라는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아마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 오고닌이라면 지금쯤 마탑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을 테니까.
설마 그런 사람이 1학년 학생을 가르치겠다고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나저나 발도르오른이란 분은...”
“아. 발도르오른 님. 나도 저번에 나갔을 때 만나봤는데, 정말 현명하시더라.”
저번에 밖에 나갔을 때 이한과 같이 발도르오른을 만난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이 지나가다 대답했다.
“과연. 대단하군.”
친구들이 다 이런 반응을 보이자 살코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한 마법사인가보군!
* * *
환상 마법으로 만든 결계는 일종의 자물쇠와 비슷했다.
자물쇠도 약하고 헐거운 놈이 있다면 단단하고 튼튼한 놈이 있었고, 단순한 구조인 놈이 있다면 복잡한 구조인 놈이 있었다.
뛰어난 환상 마법사가 친 결계는 복잡하고 단단한 자물쇠들을 여럿 겹쳐서 걸어 놓은 것과 비슷했다.
침입자가 이 결계를 뚫고 들어가려면 각 자물쇠들의 구조를 모두 간파하고 해제할 줄 알아야했다.
필연적으로 공격 측이 수비 측보다 수준이 높아야 가능한 것이 이런 해제 작업.
당연히 이한이 기라성 같은 마법학교의 마법사들보다 수준이 높지는 않았지만...
꽝!
‘운이 좋군.’
이한에게는 발도르오른한테 배운 방법이 있었다.
막대한 마력량을 휘둘러 자물쇠 자체를 박살내는 방법!
물론 몇몇 결계들은 힘으로 부수지 못하도록 대비가 되어 있었지만, 꽤 많은 결계들이 이런 부분에서는 방비가 허술한 편이었다.
마법사들의 상식으로 봤을 때 이렇게 무식하게 결계를 해제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만한 마력량을 갖고 있는 대마법사가 무엇하러 저런 무식한 방법으로 결계를 해제하겠는가.
그냥 구조를 간파하고 해제하면 그만인데!
저렇게 무식하게 해제하는 것까지 방비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보면 저건 낭비였다.
장막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열렸다.
운 좋게 이한이 뚫을 수 있는 결계가 걸린 것이다.
이한은 발도르오른한테 다시 한 번 감사했다.
...물론 발도르오른은 이렇게 무식하게 해제하고 다니라고 알려준 게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계단이 꽤 길군.’
결계를 해제하고 나타난 나선계단.
꽤 올라간 것 같은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길이 막히거나 별다른 장애물이 나오지는 않았으니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덜커덕, 덜커덕!
나선계단 끝에 위치한, 복도로 연결된 문이 눈에 들어왔다.
열려 있는 문에서는 꽤나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복도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법 실험인가?’
이한은 문쪽에 다가가서 복도를 훑어보았다.
미완성된 마법진들이 곳곳에 새겨져있고, 재료들이 복도 사방에 무질서하게 굴러다니는 꼴이 매우 낯익었다.
마법사든 아니든 수많은 과제들에 허덕이는 학생들의 모습은 어디나 다 비슷한 것이다.
“계십니까?”
이한은 조심스럽게 외쳤다.
복도 주변에 몇 학년이 있든 간에 괜히 말 안 하고 발을 디디는 것보다는 먼저 말을 하는게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선배들은 이한에게 보이지도 않을 테니...
우당탕콰당탕!
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재료통이 넘어지고 나무상자들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종이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너 여기 어떻게 왔어, 후배?
* * *
마법학교의 1학년 학생과 4학년 학생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4학년 학생은 1학년 학생보다 끼니를 챙겨먹는 것에 능숙하고, 마법학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으며, 마법도 더 많이 쓸 줄 알았지만...
기본적으로 과제가 나오면 과제를 하고 시험을 앞두면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4학년 학생들 중 손꼽힐 정도로 드문 흑마법 전공인 디레트와 코홀티도 마찬가지였다.
“재배치 기간에는 돌아다녀서 좋을 거 없지 않아?”
“그래. 원래는 그렇지. 어떤 저주받을 개자식들이 서리거인 왕을 복도에 풀어놔서 일주일을 그냥 날리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
코홀티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친구들과 같이 마법 실험을 하다 실패해 상층 복도에 다른 차원이 중첩되었던 사고.
1학년들이야 봄에 찾아온 흰눈에 행복하고 기적 같은 시간을 보냈겠지만 코홀티와 친구들은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리거인 왕이 돌아간다고 중첩된 차원의 여파가 바로 사라지진 않았으니 주변에 각종 마법진을 설치해서 대비하고, 주기적으로 상황 확인해서 보고서 작성하고...
그리고 이 모든 걸 과제와 기말고사를 대비하면서 해야 했다.
교수들은 1학년 학생들한테는 친절하고 부드러워도, 4학년 학생들한테는 칼날 같았으니까.
자기들이 저지른 실험 실수 때문에 과제를 못해오거나 시험에 낙제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그러게. 누군진 몰라도 정말 나빴다.”
“응. 그래. 누군진 몰라도 뒤졌으면 좋겠다. 그렇지?”
“으, 으응.”
“입 닥치고 마법진이나 완성해. 남은 시간 생각해보면 재배치 주간이 아니라 대악마 주간이었어도 작업해야 하니까.”
지금 디레트와 코홀티가 하고 있는 과제는 강력한 이계의 존재들을 통제하는 마법진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존재들은 호시탐탐 주인의 등을 찌르고 통제에서 벗어나는 걸 노리기 마련.
하급 소환수들은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통제가 가능했지만, 소환수가 강력해지면 강력해질수록 지능이 높아지고 의지 또한 강해졌다.
이런 존재들을 통제하려면 간단한 방법으로는 안됐다. 고난이도의 마법들을 동원해야 했다.
지금 둘이 시도하고 있는 마법진이 바로 그 방법 중 하나였다.
제대로 완성된다면 소환된 존재의 힘을 약화시키고 의지를 꺾는 효과가 있었지만...
“벽면 다 그렸어?”
“끝났어.”
“확인해봐.”
코홀티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둥그런 방울을 꺼냈다. 하급 악마와 계약이 되어 있는 방울이었다.
아직 확인도 안 된 마법진에 강력한 소환수를 불러내는 건 당연히 안 됐고, 약한 몬스터를 먼저 소환해서 테스트를 해봐야했다.
펑!
연기와 함께 악마 하나가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악마는 처음에는 얼핏 괴로워하는 것 같더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눈치를 보며 슬슬 구석으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동쪽이 생문(生門)이네. 막아야겠다.”
“내가 지금 막을게!”
코홀티는 열심히 달려가서 막았다.
친구가 서리거인 왕을 잊어주길 빌면서.
“막았어?”
“막았어.”
“확인해봐.”
코홀티는 다시 악마를 소환했다. 튀어나온 악마는 아까처럼 초반에는 조금 괴로워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바로 적응해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번엔 북쪽이 열렸네.”
“......”
코홀티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고위 마법진이란 게 원래 이랬다.
한 곳 완성하면 다른 곳이 말썽이고, 또 그 곳을 수정하면 멀쩡했던 곳이 문제를 일으키고...
“다시 수정하자.”
“그래... 억.”
“?”
코홀티가 움찔하자 디레트는 눈썹을 찡그렸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너 방금 분명히 ‘억’이라고 했잖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마음대로 해. 숨겼다가 들키면 진짜 흑사병 저주 걸어버릴 테니까.”
“...사실 저기 아래에 걸어놓은 침입자 방지 결계가 깨졌...”
“장난해 진짜?!”
‘흑. 숨길걸.’
코홀티는 속으로 후회했다.
디레트의 회유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버텼어야 했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게 왜 깨져? 내가 제대로 걸어놓으라고 했지?”
“아니... 진짜... 제대로... 걸었는데...”
“그럼 왜 깨졌는데?”
“...내가 아마 실수했나봐...”
코홀티는 쭈그러들며 말했다.
없던 지름길도 생겨나는 본관 재배치 기간.
이 기간에는 고학년 학생들이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괜히 상층부에서 실험하고 있는데 신입생이 쫄래쫄래 들어왔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네는 마법학교를 몇 년씩이나 다녔으면서 대체 뭘 배운 건가? 이 마법학교에서 후배를 다치게 내버려두다니. 이 명예로운 학교에서 부상자가 나온다는 게 말이나 되나?
-말이 되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당연히 디레트와 코홀티도 새로 연결된 지름길에 저학년들이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워뒀다.
결계 마법도 걸고, ‘이 길은 결계로 보호되고 있으니, 실력 없는 자는 돌아가시오!’ 같은 문구도 써놓고...
그런데 코홀티가 결계를 걸 때 실수를 했는지 갑자기 깨져버린 것이다.
“빨리 다시 가서 걸어!”
“알, 알겠어!”
코홀티는 허겁지겁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손님이 그것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낯익은 1학년 학생이 지름길의 계단을 타고 올라와 문을 통해 나오자, 디레트와 코홀티는 경악했다.
* * *
“상층 지름길이라고 쓰여 있어서... 아닙니까?”
-맞긴 한데.
이한은 보이지 않는 디레트와 익숙하게 대화를 나눴다.
마법학교의 신입생이라면 별로 놀랍지 않은 광경이었다.
-워다나즈. 저번에는 정말 고마웠다.
다른 글씨체가 올라오자 이한은 의아해하다가 깨달았다.
“아. 혹시 저번에 서리거인의 왕 때 계셨던?”
-맞아. 이야. 정말 고맙...
디레트는 참지 못하고 코홀티의 등짝을 팔꿈치로 찍었다.
“아주 잘났다. 후배 도움 받아서 해결해놓고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냐?”
“컥. 컥! 디레트, 지금, 후배가 보고 있는데 폭력은...”
“어차피 안 보여!”
디레트는 마법의 힘을 빌려 손찌검을 했다.
이한은 선배들이 대화하다 말고 사라지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십니까?”
-잠깐 깃펜을 놓쳐서.
‘뭔가 수상한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선배들도 선배들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어떻게 올라왔지? 결계가 쳐져 있지 않았어?
“아. 해제를 시도해봤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
“......”
디레트는 황당하다는 듯이 코홀티를 쳐다보았다. 코홀티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1학년한테 해제당했다고...?’
이게 다른 친구들한테 소문이 퍼지면 코홀티의 별명은 <무쇠대가리한테 패배한 자>나 <무쇠대가리 이하>가 될 게 분명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디레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떻게 해제했는지 물어보기로 하고, 중요한 걸 물었다.
-상층에는 왜?
“저번에 말한 첨탑 마구간을 찾고 있는데요.”
디레트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 사실을 말해준 게 디레트긴 했지만, 1학년 학생이 설마 정말로 진지하게 상층부 첨탑까지 길을 뚫으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짜 1학년 맞아??
-...내가 말해줬으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네. 첨탑 마구간은 여기서 가까워. 복도 따라서 쭉 걸은 다음에 옆으로 꺾어서 계단 올라가면 바로 나와.
“정말이십니까?!”
이한은 뛸듯이 기뻐했다.
재배치 주간 덕분에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그래. 계속 운이 나빴으니 슬슬 운이 좋을 때가 됐지!’
이제까지 주중과 주말에 당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걸어가다가 금화의 소나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너무 불운만 많았던 것이다.
-잠깐. 그런데 지금 여기 못 지나가. 실험 중이거든.
디레트는 종이에 화살표를 그렸다.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진 복도 끝에 수정으로 된 감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누가 봐도 성질이 잔뜩 난, 덩치 커다란 악마가 갇혀 있었다.
-실험 끝날 때까지는 저걸 치울 수가 없어.
디레트는 무슨 실험을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저 악마를 굴복시키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저 우리, 혹시 밖에서 안으로 마법 통과 됩니까?”
-되긴 하는데 왜?
“번쩍여라!”
이한은 수정 안에 갇혀 있는 이름 모를 악마한테 번개를 한 방 갈겼다.
악마가 고통 섞인 고함을 질렀다.
-후배. 도와주려는 건 고마운데 악마들은 때린다고 굴복하지 않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라?’
대화하느라 이한을 보고 있던 디레트와 달리, 옆에 있던 코홀티는 수정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악마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방금 악마가 시선을 피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