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어어?’
디레트의 말처럼 상급으로 분류되는 강력한 악마들은 몇 대 때린다고 굴복하지 않았다.
몇 대 때린다고 굴복한다면 그게 강력한 악마겠는가?
그냥 들짐승이지.
그렇지만 코홀티는 분명 악마가 시선을 피하는 걸 본 것 같았다.
“디레트. 디레트.”
“지금 돌아가는 길 찾아주느라 바쁜 거 안 보여? 네가 대신 찾아줄래?”
디레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후배가 가려는 길이 막힌 탓에 새로 샛길을 찾아주고 있었다.
하필이면 재배치 주간이라 몇몇 길이 사라져서 더 골치가 아픈데 방해를 하다니.
“저 악마, 몇 대만 더 때려봐도 될까?”
“마음대로 해. 대신 나중에 나도 너 때릴 거야.”
“...하, 하하. 농담도...”
코홀티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농담 같진 않았다.
“넘어뜨려라!”
주문과 함께 수정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악마에게 마법이 시전되었다.
코홀티가 쏘아낸 충격파를 맞은 악마는 아까처럼 고통 섞인 고함을 지르고 시선을 피하...
...지 않고 그냥 ‘뭐하는 거지 이 마법사 놈은’하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지켜봤다.
머쓱해진 코홀티는 악마에게 물었다.
“내가 너무 약하게 시전했나?”
물론 악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홀티는 한 번 더 시전했다.
이번에는 좀 더 집중해서 강하게.
팍!
충격파가 쏘아지고 악마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아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잘못 봤나??’
코홀티는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후배한테 마법 한 번만 다시 써달라고...”
“마음대로 해.”
“정말!?”
“응! 후배한테 과제도 대신 해달라고 해. 후배한테 시험도 대신 봐달라고 하고. 왜? 졸업도 대신 해달라고 하지?”
“...이...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디레트는 ‘이 새끼를 어떻게 죽여야 하지’하는 눈빛으로 물러섰다. 코홀티는 눈치를 보며 간신히 이한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냥 시전하면 됩니까?”
-그래. 편하게 해. 편하게!
‘무슨 일이지?’
이한은 의아해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한은 선배들이 꽤나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강력한 악마들은 폭력으로 굴복하지 않는다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법사들도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
말로 해도 안 듣는다면 마법이 나가는 것도 당연했다.
선배들은 마력을 관리해야 할 테니, 마력에 여유가 있는 이한에게 부탁하는 것이리라.
‘이해가 간다.’
어려운 실험을 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다 실험기구를 박살내고 싶은 욕망과 다퉈야 하는 법.
‘좀 더 가까이 붙는 게 편하겠지.’
이한은 수정 우리에 좀 더 가까이 접근했다.
조준이야 지금도 할 수 있었지만 가까이서 시전하는 게 더 펀했다.
스윽-
“?”
이한이 다가오자 방금까지 수정 우리 밖을 당당하게 노려보고 있던 악마가 시선을 깔았다.
‘잘못 봤나?’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마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악마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더니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번쩍여라!”
-■■■■■! ■■■■■!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악마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붙였다.
누가 봐도 100% 확실한 굴복의 자세였다.
“......”
“......”
코홀티와 디레트는 그 모습에 경악해서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 * *
다른 차원의 강력한 존재들은 숨쉬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왔다.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건, 세계의 규칙을 바꾸는 힘인 마법에 대해서도 저항력이 강하다는 뜻.
이런 존재들이 가진 마법 저항력은 만만치 않았다.
아까 코홀티가 시전한 마법에 ‘뭐하는 거지 이 마법사 놈은’ 눈빛을 보낸 것도 이래서였다.
물론 마법 저항력이 무적은 아니었다. 여러 공략 방법이 있었다.
관통에 특화된 고난이도의 마법을 시전하거나, 아니면 같은 마법이라도 마력량을 엄청나게 늘려서 힘으로 뚫어버리거나...
그런데 이 중 후자는 사실 비현실적인 방법에 속했다.
같은 마법에 마력량만 무작정 많이 늘린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다.
마력이 늘어났으니 어느 정도 마법의 효과가 강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럴 바에는 그냥 더 상위의 마법을 익혀서 시전하면 됐다. 굳이 하위의 마법에 무식하게 마력을 많이 담을 이유가 없었다.
마법 자체의 한계 때문에 효과가 강해지는 데에도 제약이 있는데다가, 마력을 늘렸으니 시전 난이도도 올라가고, 무엇보다 마법사의 마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무모하게 행동하다가는 마력 탈진이 오기 딱 좋았다.
-알겠지? 후배?
디레트와 코홀티는 행여나 이 무모한 후배가 마법학교 복도 한구석에서 마력 탈진으로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아주 자세히 경고했다.
이 뛰어난 후배가 선천적으로 마력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법 재능이 뛰어나서 다른 학생들보다 빨리 마법을 익혀나가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배로서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경고해줘야 했다.
-마력 탈진은 생각보다 아주 무시무시하다고!
-지금 상태는 어떻지? 어지럽거나 식은땀이 나진 않고?
“예... 괜찮습니다.”
‘과하게 걱정하시는군.’
이 정도로 쓰러졌다면 이한은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사실 이한도 본인이 마법을 시전할 때 마력을 본능적으로 과투입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발광 마법의 지속 시간이나 부여 마법의 지속 시간이 그 증거 중 하나였으니까.
방금 같은 마법 저항력을 관통해버리는 효과는 예상 밖이었지만, 어쨌든 이한이 번개 마법을 시전하면서 무리를 한 건 아니었다.
이게 무리였다면 예전에 쓰러졌겠지!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데미지가 들어간 것 때문에 저 악마가 굴복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흑마법 전공 4학년 학생답게 디레트와 코홀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방금 이한이 보여준 강력한 마법 공격이 놀랍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악마가 굴복하진 않았다. 상급 악마가 그렇게 유약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
잠시 침묵이 일었다.
“??”
이한은 선배들이 글씨를 써주지 않자 당황했다.
뭐지?
-그게... 그러니까...
-이게... 꼭... 뭐... 정확한 건 아니고...
두 선배들은 시원한 답을 내놓는 대신 말을 돌렸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겁먹은 거 아닌가??”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긴 하는데... 그거 말고는 이유가 없지 않나...”
“......”
1학년 후배한테 두 선배가 ‘악마가 마법 몇 대 맞아서 마음이 좀 약해졌는데, 마침 네가 좀 마력도 많고 차갑게 생겨서 겁을 먹었나봐’라고 말한다면?
아마 그 1학년 후배는 탑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야. 에인로가드는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학년이 올라가나봐. 내가 오늘 어떤 미친 선배들을 봤는데,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뭔 개소리를...
하지만 이것 말고 이유가 안 떠오르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선배님?”
-...이게 아주 복합적이고 설명하기 힘든 이례적인 현상이야.
-맞...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절대 우리가 몰라서 그런 건 아니고.
두 4학년 학생들은 최대한 빙빙 돌려가며 설명했다.
악마가 너한테 몇 대 맞고 겁을 먹어 굴복했는데, 이게 개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너무 개소리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고, 나름 학문적인 증거도 있고...
‘오늘 구름의 모양을 보니 악마가 마음이 유난히 약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저 악마가 번개에 약할지도 모른다’같은 근거 없는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흘러나왔다.
“어... 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한은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첨탑 마구간이 중요하지 복도 막고 있던 상급 악마 놈이 이한을 보고 겁을 먹든 말든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참. 이제 지나갈 수 있어. 잘 됐네!
-맞아! 첨탑 마구간 갈 수 있겠어! 축하해!
왠지 두 선배가 빨리 이한을 보내려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한은 개의치 않고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들. 과제 중이셨다고 했는데 저 때문에 과제가...”
악마 굴복을 위한 마법진을 준비 중이었는데, 그 시험 상대인 악마가 굴복해버렸으니 일이 꼬인 셈이 됐다.
이한은 괜히 미안해졌다.
-아닌데? 오히려 더 좋지.
“예?”
-악마가 굴복했으니까 이 굴복한 악마 데리고 가서 마법진도 성공했다고 하면 돼. 교수님 어차피 귀찮으셔서 직접 와서 확인 안 하시거든.
신이 나서 1학년 후배한테 팁을 전수하는 코홀티의 뒤통수를, 디레트는 야무지게 갈겼다.
딱!
“좋은 거 가르친다 좋은 거 가르쳐!”
* * *
‘여기구나!’
디레트한테 들은 대로 걸음을 옮긴 이한은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각종 짐승들이 낮게 울어대는 소리.
마구간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이번 주말에...!’
마침 이번 주는 아무르가 찾아오는 주.
폰리그만 끌고 오면 밖으로 당당하게 날아갈 수 있었다.
이한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위험 요소는 없고... 데스 나이트들이 문제군.’
경계 때문에 데스 나이트들이 마구간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다.
누가 지나가든 말든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저 데스 나이트 놈들. 생각보다 귀찮단 말이지.’
지나가는데 갑자기 친근하게 말이라도 걸어오면 이한 입장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었다.
스르륵-
이한 앞의 벽이 녹아내리듯 열리더니 그 안쪽 통로에서 낯익은 사람이 걸어나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이한은 투명 마법을 시전하지도 못했다.
“...!”
입을 붕대로 칭칭 감은 기묘한 모습.
저번에 만난 교장의 하수인이자 마법학교의 봉사자인 첨탑지기였다.
첨탑지기는 이한을 보고서도 깜짝 놀라거나 데스 나이트들을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인사했다.
‘아. 지금 대낮이지.’
이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돌아다니면 무작정 잡아서 징벌방에 넣는 한밤중과 달리, 아직 태양이 하늘에 떠있는 대낮이었다.
학생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건 당연한 일이니 첨탑지기도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한은 제발 첨탑지기가 눈앞의 학생이 1학년이라는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길 빌었다. 아무리 그래도 1학년이 앞에 있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일 테니까.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첨탑지기가 종이에 글씨를 써서 보여주자, 이한은 즉시 대답했다.
“사실 기말 전 과제를 준비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운이 없으셨습니다. 안내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아. 혹시 저건 마구간입니까?”
첨탑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마구간을 구경해도 될까요? 번개걸음 교수님의 강의가 어려워서 따라가느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마구간을 구경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첨탑지기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학생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시설을 멋대로 구경시켜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한은 쓸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나봅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서 익숙한 친구들과 달리 저는 몸을 쓰는 데에는 언제나 서툴러서... 창피한 탓에 고집을 부렸나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들었다면 창칼을 던질 거짓말을 태연히 해냈다.
첨탑지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민하다가 결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저번 창고에서 도움을 받은 데다가, 저렇게 자신의 약한 부분을 극복하려는 학생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첨탑지기의 주인도 분명 이렇게 행동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