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저기 불사조 탑 학생들하고 아직 이야기를 못 나눠보신 것 같은데...”
“나중에 나눠보도록 하지. 그래서 치유 마법의 어떤 분야에 흥미가 있지?”
두 선배는 이한의 정신을 빼기 위해 쉴 틈을 주지 않고 말을 던졌다.
“아차! 아직 어떤 분야에 흥미가 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괜찮아! 그런 걸 돕기 위해 우리들이 있는 거다. 자. 다른 강의를 뭘 듣고 있지? 뭘 듣는지 말해주면 네가 가진 흥미를 깨닫게 해줄 수 있어.”
“연금술. 연금술 듣나?”
자기들 할 말만 신나게 하는 선배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연금술을 듣고 있다니. 마침 치유 마법에도 연금술과 인연이 깊은 분야가 있지. 질병을 분석하고 그 질병을 치료하는 물약을 만들어내는 것. 그건 마법사 개인이 치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일지도 몰라.”
“부여 마법은 어때? 부여 마법은?”
선배 한 명의 질문에 다른 선배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타박했다.
“연금술 듣는다잖아.”
“아차... 그렇지만 2개 들을 수도 있잖아.”
“설마 그러겠어?”
“교수님께서 학구열 강해서 다른 강의도 듣는다고 하지 않으셨나?”
소곤거리던 두 선배는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부여 마법도 듣고 있습니다.”
“역시...!”
“혹시 변환 마법도 듣고 있는 거 아니야?”
“왜. 소환 마법도 듣고 있다고 하지?”
“둘 다 듣고 있습니다만?”
“......”
“......”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고 웃으려던 선배들은 이한이 표정 변화가 없자 멈칫했다.
...농담이 아니었나?
“다... 어? 진짜로?”
“뭐 잘못됐습니까?”
이한의 목소리가 아주 살짝 거칠어졌다.
이한도 사람인 이상 지금 강의 시간표를 보면 아무리 감정을 통제해도 분노가 살짝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건 아닌데...”
“그래서 가르시아 교수님 이야기를 하셨군...”
알카시스 교수가 ‘다른 강의 다 듣는다’고 했을 때 기껏해야 한두개 정도 더 전공하나 싶었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선배들은 살짝 질린 얼굴로 이한을 보며 물었다.
“혹시 아직 남은 강의가 더 있나?”
“예. 뭐.”
후배의 입에서 남은 강의들이 하나씩 더 나올 때마다, 선배들의 표정은 질림에서 공포로 바뀌었다.
이건...
이건 진짜...
‘...아무리 인원이 부족해도 그렇지, 이런 녀석까지 치유 마법을 듣게 해도 되나? 너무하는 거 아닐까??’
두 선배는 진지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 * *
필과 칠.
치유 마법의 강의를 대신 맡은 두 선배의 이름이었다.
“별명인가요?”
“그래.”
“왜 별명을?”
“너희들도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치유 마법사는 밖에 나갔을 때 가문, 이름 말해서 좋을 게 없어.”
치유 마법사의 신분은 구체적으로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치료를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와달라고 요청이 날아오고, 치료를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책임을 묻는 연락이 날아오는 것이다.
쉬는 날에도 끌려 나가지 않으려면 흔하고 기억하기 힘든 별명을 쓰는 게 좋았다.
“......”
“......”
불사조 탑 학생들은 선배들의 피와 같은 조언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되레 황당하다는 듯이 선배들을 쳐다보았다.
“사제로서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을 피하려고 그러는 건 좀...”
“조용히 해! 너 불사조 탑이지? 내 친구 중에 불사조 탑 있는데, 걔도 1학년 때는 너처럼 굴었어.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알카시스 교수가 봤다면 ‘정신나간 놈들아 학생들을 꼬드기라고 했지 쫓아내라고 했냐’라고 했겠지만, 불행히 알카시스 교수는 자리에 없었다.
두 선배는 방금 불사조 탑 학생의 말 때문에 울컥했는지, 쌓인 울분을 폭발적으로 토해냈다.
“휴식을 취해야 제대로 마법을 쓰지! 쉬는 날에도 도움 필요하다고 끌고 나가면 그게 마법이냐?!”
“누군 뭐 제국 사람들을 위한 헌신과 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했어?! 다만 잠 잘 시간은 달라 이거지! 나도 너희들처럼 1학년 때는...”
폭발해서 떠들던 선배들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멈칫했다.
“...내가 좀 흥분해서 말했지? 물론 이런 사소한 단점들이 있긴 하지. 그렇지만 치유 마법은 장점이 더 많아.”
“사람을 살리고 받는 진심 어린 감사.”
“제국 어딜 가도 존중 받지.”
“뿐만 아니라 징벌방도 잘 안 가.”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건 장점이 아니잖아...’
다른 학생들이야 속겠지만 이한은 속지 않았다.
해골 교장이 징벌방에 잘 안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정도로 일손이 부족하다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치유 마법이 얼마나 좋은지 알겠지?”
최대한 장점을 쥐어짜낸 선배들은 애절한 눈빛을 후배들에게 보냈다.
제발 도망가지 마!
너희 없으면 우리 학파 망해!
다행히 신입생들은 착하거나 순진했다. 방금 같은 불길한 대화를 듣고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다. 다들!”
“열심히 한다고 다 되진 않겠지만...!”
* * *
‘인형놀이라니 신선하군.’
학생들은 각자 봉제인형을 하나씩 받고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물론 인형놀이를 하라고 준 건 아니었다.
“아물어라.”
<하급 자상(刺傷) 치유>.
날붙이에 찔리거나 베인 상처를 아물게 만드는 치유 마법이었다.
인체 내부의 장기나 뼈를 다루는 치유 마법들은 그 복잡한 구조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요했지만, 피부와 근육 바깥에 난 상처는 비교적 접근하기 쉬웠다.
그렇다고 해서 난이도 자체가 쉬운 건 아니었다.
부여 마법에서도 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거는 마법은 강화 마법이라고 따로 분류하고, 환상 마법에서도 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거는 마법은 정신 마법이라고 따로 분류하듯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건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배우는 1학년에게는 특수 제작된 끈으로 연습을 시켰던 것처럼, 지금 봉제인형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아이템이었다.
“확실히 난이도가 올라갔습니다.”
티질링 사제가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마력을 소모한 탓에 몸이 살짝 피곤했다.
끈을 다시 잇는 것과 봉제인형에 난 상처를 꿰매는 건 얼핏 비슷해보여도 그 차원이 달랐다.
전자는 단순한 끈이라면 후자는 사람을 모방해서 만들어진 인형인 것이다.
“확실히 어려워졌지.”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제인형을 내려놓았다.
자상은 물론이고 인형의 팔이 부러진 절상(折傷)까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치유시킨 상태였다.
“......”
티질링 사제는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는 이한 님의 선의를 믿는 사람이지만... 다른 분들은 그런 말을 하면 화를 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니. 어째서?”
물론 저런 골절도 오늘 목표에 들어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목표를 제시한 선배들 중 어느 누구도 골절상까지 치유하길 기대하지 않았다.
자상만 치유해도 충분히 잘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한은 막대한 마력량과 다른 마법에서 단련된 컨트롤, 그리고 흑마법에서 배운 뼈의 이해까지 동원해 선배들이 안 보는 사이 절상까지 진도를 뽑아버린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
티질링 사제는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방학 때 교단에서 행사가 있을 겁니다.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물론이지.”
이한은 교단 사제들에게 잘 보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얼마나 관심이 많았으면 한 교단에서 멈추지 않고 여러 교단을 믿고 있겠는가.
“...잠깐. 그런데 무슨 행사인지 물어봐도 되나?”
생각해보니 프리싱가 교단은 저주 특화 교단.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주 받은 아티팩트들을 착용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교단이었다.
마력 관련된 저주라면 얼마든지 착용할 생각이 있었지만, 다른 저주라면 조금...
“평범한 행사입니다. 신도분들을 초대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기도를 하고...”
‘다행히 평범하군.’
“신도분들이 갖고 온 저주 받은 아티팩트들을 착용하고, 못 착용하는 것들은 파기하고...”
“......”
이한은 어이없어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파기하는 거면 갖고 나가도 되나?’
물론 저주 해제가 쉽지는 않겠지만, 해제만 할 수 있다면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몰랐다.
“혹시 파기하는 아티팩트들을 갖고 가도 괜찮나?”
“상관없긴 합니다만... 더 착용하실 생각이십니까?”
티질링 사제는 ‘아무리 믿음이 깊어도 그렇지 너무 무리하게 착용해서 좋을 게 없을 텐데’라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당연히 이한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들켜버렸군. 내 신앙심을.”
“거기 둘. 그만 이야기하고 마법에 집중하도록.”
다른 학생들을 도와주고 온 선배들은 이한과 티질링에게 충고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할 건 없고. 내가 충고해서 딱히 기분 나쁘진 않지? 만약 기분 나빴다면 내가 사과하도록 할게. 절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줘.”
“...아. 예.”
절박한 선배의 기세에 압도당한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휴. 괜찮아 보이지?”
“그래. 아직까지는 치유 마법에 관심이 있어 보여.”
두 선배는 안도해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
그 탓에 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한이 못 보는 사이 봉제인형의 자상과 절상을 전부 한 번씩 치유했다는 사실을!
* * *
이한은 하품을 하며 탑으로 걸어갔다. 강의만 정신없이 듣다보니 벌써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번에 오두막에서 갖고 온 달걀 마저 써야 하는데, 오믈렛으로 할까 스크램블로 할까... 빵이 몇 덩이 남았었지? 오늘은 잘라서 버터에 볶아볼까. 저녁에는 소환 마법 마저 공부하고.’
“쳐내!”
“밀어!”
“...너희 과제 안 하냐?”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면서 격구를 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원래는 말을 타고서 기다란 막대로 공을 치는 놀이였지만, 말이 없으면 사람이 막대를 들고 달리면서 공을 쳐도 됐다.
지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하고 있는 건 후자였다.
“왜... 왜 그런 심한 말을 해? 우리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내가 과제 안 하냐고 물어봤지? 다른 말 안 하고?”
이한은 순간 자기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가문이라도 모욕했나 싶었다.
“워다나즈. 원래 몸과 머리는 연결되어 있어서 몸을 써줘야 머리가 돌아가는 거라고.”
“야... 그런데 워다나즈가 1등이잖아.”
친구의 논리가 가진 허점을 깨달은 흰 호랑이 탑 학생이 옆구리를 찔렀다.
“...너도 한 판 할래?”
“난 됐다.”
이한은 거절했다.
굳이 격구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이한은 스스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으니까.
빡!
“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튕겨나갔다. 이한은 혀를 차며 다가갔다.
“너희들은 사고를 안 치면 몸이 근질거리라도 하냐?”
“발... 발목이...”
“가만히 있어라.”
이한은 넘어진 학생의 발목을 확인했다. 딱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단 응급처치하고 치유실로 데리고 가야겠군.’
“붙어라.”
“가르시아 교수님을 불러와! 가르시아 교수님을!”
“...어.”
이한은 멈칫했다.
이런 일이 많았는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가르시아 교수를 바로 불러오려고 했던 것이다.
...괜히 내가 마법 걸었나?
‘교수님 불러올 줄 알았으면 굳이 응급처치를 안 했지.’
발목 부러진 학생도 끙끙대다가 치유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말려야 하지 않아?
꼭 이런 표정이었다.
이한은 못 본 척 무시했다.
네 친구들이니까 네가 말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