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숫자 4를 표현하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야! 그건 1이잖아!”
“가이난도. 그건 1이 아니라 가운데손가락... 아니다.”
이한은 가이난도한테 조언을 하려다가 말았다.
소환수와 친해지는 것도 마법사가 해야 할 일.
괜히 이한이 조언을 해주는 것보다, 가이난도가 스스로 깨닫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찮다.’
과제 제출이 끝난 이한은 재빨리 돌아섰다. 다음 과제들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왜 자꾸 1을... 너 자꾸 이렇게 굴면 무시무시한 대마법사인 내 친구가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이한? 이한!!”
이한은 못 들은 척 달려 나갔다.
* * *
“...무슨 일이지?”
가이난도를 버리고 연금술 강의실로 달려온 이한은 앞에 펼쳐진 모습에 멈칫했다.
시아나 사제를 필두로 한 불사조 탑 학생들 앞에, 연금술 강의를 듣는 다른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흑흑. 사제님. 감사합니다. 사제님밖에 없습니다.”
“너, 너무 그러실 건 없습니다.”
“아닙니다! 사제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조금만 더!”
줄 뒤에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너만 과제 하냐?!”
“빨리 꺼지지 못해!? 추잡한 놈 같으니!”
“...????”
당황해하는 이한 뒤에서 요네르가 나타났다.
“과제 때문에 그래.”
“과제 때문에?”
“응.”
요네르의 눈 밑에는 졸음과 피로가 쌓여있었다. 이한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연금술 기말 전 과제가 생각보다 많이 까다롭잖아?”
“그냥 많이 까다롭지.”
친절한 우레걸음 교수는 기말 전 과제로 적절한 난이도의 물약을 만들어오라고 지시했다.
-아우룸의 황금 물약을 만들어 오도록. 별로 어렵지 않은 물약이니 너희들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다.
물론 학생들은 속지 않았다.
아우룸의 황금 물약은 만드는 것 자체의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긴 했다.
조제 과정도 비교적 단순하고, 추가로 해야 할 공정도 적은 편이고...
다만 들어가는 재료가 끔찍할 정도로 복잡했다.
일단 먼저 하급 정신 강화 물약과 세트리비의 이슬 물약을 섞어서 베이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다음에는 다시 하급 정신 강화 물약과 도브룩의 핏방울 물약을 섞은 걸 넣어주고, 그 다음에는 또 다시 하급 정신 강화 물약과 벨레젠의...
물약 하나 만들기 위해서 다른 물약 A, B, C, D, E 등등이 필요한 이상 이미 이 물약은 연금술사들의 주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난이도 자체가 그리 높진 않더라도 1학년 수준에 몇 번 실수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다시 처음부터 물약을 새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하급 정신 강화 물약 다시 만들고, 세트리비의 이슬 물약도 다시 만들고, 도브룩의 핏방울 물약도 다시 만들고...
우레걸음 교수는 ‘껄껄 아우룸의 황금 물약 같은 걸 만들 줄 알면 실수가 줄어들고 다른 물약도 솜씨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다’라고 말했지만 학생들은 벌써 우레걸음 교수를 가마솥에 빠뜨릴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들어보니까 불사조 탑 사제들이 <하급 정신 강화 물약>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구.”
“!”
제국 대부분의 교단들은 검소, 절약, 헌신 등 이런 미덕들을 기치로 삼고 있었다.
그런 만큼 불사조 탑 학생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에인로가드에 적응하는 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 베풀어주기까지 했다.
신전에서 일하며 자란 불사조 탑 학생들의 생활력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과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디저트 조금 하시겠습니까? 학교에서 받은 검은 빵 한 조각과, 민들레 뿌리로 만든 커피가 있습니다만.
-...마... 마음은 고마운데, 워다나즈가 저녁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군것질하면 실망할 거야!
그리고 이런 생활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물약 제조였다.
다들 신전에서 자란 만큼, 연금술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물약 제조에 대해 돕고 들은 게 많았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산과 숲을 뒤지면서 사냥감을 찾고,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각종 잡동사니들을 긁어모아 암시장을 돌릴 때, 불사조 탑 사제들은 남는 시간이 되면 재료들을 모아와 물약을 만들곤 했다.
그런 만큼 <하급 정신 강화 물약>도 꽤 많이 쌓여 있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친구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나눠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저런!”
요네르에게 설명을 들은 이한은 탄식했다.
“내가 불사조 탑에 갔어야 했는데... 아. 미안. 요네르. 푸른 용의 탑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고.”
“솔직히 이한 네가 하는 일 보면 불만 가져도 아무도 뭐라고 못할 것 같은데...”
요네르는 양심이 있으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많이 아깝긴 해.”
“그렇지?”
이한과 요네르는 같이 탄식했다.
잉여 물자가 있으면 그걸 효율적으로 물물교환해서 자본을 증식시켜야지, 무료로 뿌리다니.
다른 탑의 추잡한 학생들이 불사조 탑 사제들의 선량함을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있었으면 진두지휘했을 텐데.’
탄식을 마친 이한은 요네르와 함께 줄을 섰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였고 물약을 나눠준다면 받아야했다.
“<하급 정신 강화 물약>이 몇 병 정도 있어야 넉넉할까?”
“스무 병... 아냐. 스무 병도 솔직히 좀 불안할 것 같아.”
“기말도 비슷하겠지?”
“응...”
요네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기말 전 과제도 이렇게 지독한데 기말고사 물약은 얼마나 지랄맞... 아니, 어려울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아직 절망하지 않았다.
‘방법이 있다.’
이번 주말에 밖으로 나갈 계획이 있는 이한이었다.
밖으로 나가서 쓸만한 연금술 재료와 물약들을 모조리 사가지고 들어오면...
우레걸음 교수가 어떤 난제를 내던 간에 절반은 해결하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후후후...”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불사조 탑 사제들은 이한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네르도 살짝 당황해서 이한의 어깨를 톡톡 치며 불렀다.
“왜 그래? 과제 때문에 충격 받은 거야?”
“아. 그런 건 아니고...”
“빨리 빨리 좀 받아!”
이한 뒤에 줄서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툴툴댔다. 이한이 빤히 쳐다보자 학생은 시선을 피했다.
“플레맹 교단의 눈부신 샛별 같은 인재인 시아나 사제. 반갑군.”
“연금술의 통찰자이자 이해자이신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에 비하면 별 것 아니죠.”
시아나 사제는 반갑게 맞이해주면서 바구니에 물약 병들을 하나씩 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구니가 꽉 차고...
다른 바구니에도 하나씩 더...?
“?”
“??”
이한과 요네르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더 많이 주고 있는 것 같은데?’
‘많이 주고 있는 것 맞아.’
“자. 받아가세요.”
“어... 고맙군.”
이한은 ‘실수로 많이 줬군’이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받아가야 할지 살짝 고민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먼저 받아간 학생이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다.
“사제님! 워다나즈가 받은 양이 저보다 두 배는 더 되는 것 같은데요?!”
‘세 배쯤 되는 것 같은데.’
사실 두 배도 좀 대충 잡은 것 같았다.
“그야 방금 받아가신 건 사제님이 준 물약이고 워다나즈 님이 받아가신 건 플레맹 교단의 눈부신 샛별 같은 인재인 시아나 사제가 준 물약이니까 그렇죠.”
“......”
“......”
“뭐 불만이라도 있으세요? 다시 주실...”
“아, 아닙니다.”
방금 따진 학생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물러섰다.
“플레맹 교단의 금성(金星) 같은 시아나 사제님...”
“지금 하면 늦었죠. 다음!”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쯧쯧. 미리 했어야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부를 미리 해둬서 나쁠 게 없었다.
이렇게 뒤늦게 하려는 모습들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워다나즈...! 사제님까지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다니...!”
“눈은 장식품으로 달았냐?”
이한은 다른 탑 학생의 반응에 어이없어했다.
이게 어딜 봐서 이한이 시아나 사제를 쥐락펴락하는 것이란 말인가.
자기들이 미리 안 해놓고!
* * *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강의를 맡고 있는 로지네 교수는 들어오자마자 학생들을 칭찬했다.
“와! 샤일스 학생! 번개걸음 교수님께서 샤일스 학생이 돌보는 말이 아주 상태가 좋아졌다고 칭찬하시던데요?”
“감, 감사합니다.”
“아산 학생! 멋진 정령을 데리고 왔다고 들었어요. 훌륭해요!”
“운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한 학생! 이한 학생은...”
로지네 교수는 이한의 차례에서 잠시 멈칫했다.
칭찬할 게 너무 많아서 그 중에 뭘 골라야 할지 잠시 혼동이 온 것이다.
“...하여간 잘 하고 있어요!”
“?!”
이한은 당황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글... 글쎄?”
로지네 교수는 그 뒤로도 더 학생들을 칭찬하고 나서 앞에 섰다.
에인로가드에서 교수들에게 어지간해서 칭찬 들을 일 없는 학생들은 자존감이 충족된 얼굴로 눈빛을 반짝였다.
“교수님.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는 기말 전 과제가 따로 없나요?”
교수는 밝고 통통 튀는 목소리로 기쁘게 대답했다.
“아! 기말 전 과제는 따로 없습니다. 대신 간단한 시험이 있어요!”
“......”
“아, 아니야. 난 플뤼워크 교수님을 믿어.”
갑작스러운 기습시험에 학생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몇몇 학생들은 ‘그래도 로지네 교수님은 달라’하면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들어와요.”
모두 안녕하세요.
압박감 가득한 저음의 목소리를 뱉으며 들어오는 거대한 악마의 모습에, 방금까지 ‘그래도 교수님은 달라’했던 학생들의 인상이 딱딱하게 돌변했다.
하여간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은...!
“싸, 싸워야 하나? 싸우는 게 시험 아니야?”
“설마...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이 그러시겠어?”
“그러는 교수님도 있는데.”
“농담하지 마, 워다나즈! 하나도 안 웃겨!”
“......”
이한은 친구들을 강제로라도 볼라디 교수의 강의에 끌고 가지 않은 걸 살짝 후회했다.
“여기 오리퓰라스 씨는 제국 법무관 소속으로 131년간 근무하신 뛰어난 악마죠! 이런 강력한 악마를 법무관으로 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계약입니까?”
“훌륭해요! 모두 박수!”
학생들의 박수 소리는 저번보다 좀 작고 기운이 없었다.
“물론 오리퓰라스 씨는 강력한 악마입니다. 그리고 마법사가 자기보다 강력한 존재와 계약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 설득?”
“정답입니다! 모두 박수!”
짝짝짝.
“오늘 여러분은 이 오리퓰라스 씨를 상대로 모의계약을 시도해볼 겁니다! 오리퓰라스 씨는 여러분이 제안한 조건을 진지하게 고민하시고 평가해주실 테니, 여러분들도 최선을 다해서 제안해주세요. 여러분처럼 뛰어난 학생들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겁니다!”
“????”
학생들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싸우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했는데...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하지?
“뭘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해? 심장하고 피를 바친다고 해야 하나...?”
“황금?”
“친구의 목숨?”
“친구의 카드 덱?”
“죽을래?”
“일단 뭘 좋아하시는지부터 물어보면서 가벼운 대화로...”
그러는 사이 불운한 학생 한 명이 가장 먼저 오리퓰라스 앞에 앉았다.
오리퓰라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내가 자네와 계약을 해야 하나? 새파랗게 어린 마법사여?
“그... 그게. 저와 계약하신다면 금화를...”
금화? 금화??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날 고작 금화에 계약을 맺고 마법사의 일을 도울 존재라고 평가한 것인가? 자네 도대체 날 어떻게 본 거지?
“죄... 죄송합니다...!”
학생은 오리퓰라스의 압박면접에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남은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 * *
-카, 카드 덱은...
-농담이라면 나쁘진 않지만 그런 건 가치가 없지.
-힘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마력을 공급해드리고 필요하시다면 물약도...
-그건 자네보다 약한 존재와 계약할 때나 할 말일세. 자기보다 약한 존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넘어갈 악마가 어디 있겠나. 마력? 자네가 주는 것보다 내가 직접 구하는 게 더 빠르고 강하겠지. 물약? 자네가 만드는 것보다 내가 만드는 게...
-심... 심장이나 피 같은 거 좋아하십니까?
-자네는 기본 매너부터 다시 배워오도록.
‘큰일났군.’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이한도 긴장했다.
생각보다 오리퓰라스는 취향이 까다로웠던 것이다.
저 악마가 뭘 제안해야 좋아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나씩 조심스럽게 던지면서 반응을 파악해본다. 그것밖에 없어.’
“안녕하십니까.”
음!
“먼저 기본적인 것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계약자로서 마력을 공급해드리는 부분에 최선을 다해...”
합격.
“...예?”